노컷뉴스 자료사진. 박종민기자
폭스바겐이 미국의 피해고객과 환경오염에 대한 배상액으로 153억달러, 우리 돈으로 17조9천억원을 지급하기로 29일 합의했다. 2.0L TDI 디젤엔진을 장착한 폭스바겐 차량소유자 47만5천명 전원에게 일단 대략 591만원에서 1100만원까지 배상금이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폭스바겐은 한국과 유럽에는 배상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임의설정에 해당하는지는 법률해석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아예 임의설정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폭스바겐이 미국과 한국에서 이처럼 180도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법체계의 차이점 때문이다.
◇ 영미법 미국 vs 대륙법 한국…법체계 달라
영미법 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소비자가 한명이라도 배상 판결을 받으면 그 판결의 효력은 같은 물품을 구매한 모든 소비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이라고 해서 실제 피해가 발생한 액수의 3배에서 10배를 배상하도록 한다. 때문에 배상 액수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또 재판부가 공판 전 증거개시결정을 내리면 해당 기업은 사건과 관련한 내부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 내부 정보나 영업 비밀이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징벌적 손해배상에 기업 비밀까지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재판을 받기보다는 대부분 합의를 보려고 한다. 이번에 도출된 폭스바겐의 153억달러 배상 합의안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 우리나라는 손해배상은 피해가 발생한 만큼 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고 위자료 인정도 매우 깐깐하다. 또 소비자 집단소송이 인정되지 않아 배상을 받으려면 소비자 개인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배상액이 크지 않을 뿐 더러 이마저도 소송을 제기한 사람에게만 해주면 되니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폭스바겐이 합의 보다는 재판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이득이다.
◇ 그동안 입증책임 문제로 승소 힘들어게다가 우리나라는 손해배상에 대한 입증책임이 대부분 원고, 즉 소비자에게 있다. 법률사무소 시원의 빈정민 대표 변호사는 "소비자가 일일이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는 문제와 함께, 미국과 달리 손해 발생과 손해액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폭스바겐이 고의나 과실로 피해를 입혔다는 점을 차량 구매자가 직접 입증해야 한다. 앞서 뻥연비 논란을 빚었던 차량의 구매자들이 여러차례 소송을 제기했지만, 줄줄이 패소한 것도 결국 입증책임 문제에서 걸렸기 때문이다.
환경부가 임의설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리콜을 허가해주지 않겠다고 폭스바겐을 계속 압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스바겐이 조작 사실을 인정하면 소비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이나 부당이득 반환 소송에서 승소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폭스바겐코리아가 "임의설정에 해당하는지는 법률해석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재판까지 가보겠다고 버티는 이유이기도 하다.
빈정민 변호사는 "우리나라도 이번 폭스바겐 사건을 계기로 입증책임 완화와 함께 소비자 집단소송을 확대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는 등 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자료사진)
◇ 국내 소송 나선 폭스바겐 구매자들…이번엔 이길까국내 폭스바겐 관련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바른에 따르면 29일 현재 소송을 제기한 원고인단은 4432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번 폭스바겐의 미국 소비자에 대한 배상 합의를 계기로 국내 원고인단의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 폭스바겐 차량 소유주들은 부당이득 반환과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과 함께 폭스바겐을 사기죄로 검찰에 형사고발을 한 상태다. 또 환경부로 하여금 대기환경보전법상 자동차 교체명령을 발동할 것을 요청했다.
소송대리인인 하종선 변호사는 "폭스바겐이 임의설정 인정을 거부하면서 리콜 명령을 이행할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환경부가 자동차 교체명령을 충분히 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자동차 교체로 배출가스 문제가 시정되지 않으면 환불명령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부는 환불은 규정에 없어서 힘들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최근 "검토는 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내비치고 있다. 과거와 달리 국내 차량 소유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소비자 배상 판결이 성사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