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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깃들어 있는 이한열의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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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설 'L의 운동화', 김숨 지음

 

"L의 운동화요?"
"L의 운동화가 인공 유기물이 아니라,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덩어리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김숨 작가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 'L의 운동화'가 출간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피격 당시 이한열이 신었던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현재 오른쪽 한 짝만 남아 있는 상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질 만큼 크게 손상되었지만, 2015년 그의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3개월 동안 복원하여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김숨 작가는 김겸 박사의 미술품 복원에 관한 강의를 듣고, 과천에 있는 김 박사의 연구소를 방문해 복원 작업을 지켜본 후,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시켰다.

'L의 운동화'는 한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 시대적, 역사적 유물로 의미를 부여받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미술품 복원 전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이한열의 생존 당시 이야기와 그의 친구들 및 유가족들의 뒷이야기도 그려졌다.

이 소설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통해 한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는 운동화 한 짝이 ‘사적인 물건’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시대를 대변하는 물건’으로 역사적인 상징이 되는 과정을 김숨 작가 특유의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력으로 세세히 그려내며, 삶과 죽음, 기록과 기억, 훼손과 복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복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은 무엇일까. 공장에서 이제 막 생산되어 나온 직후?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당시? 작품 속 화자인 복원가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한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복원’과 ‘훼손’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원작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적정한 선’에서 작업을 멈추는 것은 복원가의 역량이자 덕목”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된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과 미선,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홀로코스트까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스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우리 기억 속에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7만 8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산처럼 쌓인 5만 7천 점의 피해자 신발을 언급하며 끝을 맺는다.

“원래는 똑같았을 신발들은, 더 이상 똑같은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을 신었던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신발이 되어 있었다.”

김숨 작가는 이 작품을 일컬어, “‘이한열 운동화 복원’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있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내린 운동화를 복원하듯, 한 조각 한 조각 김숨의 문장으로 숨을 불어넣어 부서진 운동화가 되살아나고, 희미해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사라져 버린 ‘그’가 되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책 속으로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33쪽

1987년 6월 9일, 집회가 열리던 그곳에는 천여 명의 학생이, 따라서 이천 개의 발들이 운집해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 이천 개의 발들은 분주히 흩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L의 왼발에서 벗겨진 운동화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듯 발들 속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자신의 왼발에서 운동화가 벗겨질 때, L은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나처럼 허물이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벗겨진 운동화를 다시 신으려고 L은 허둥거렸을까.
단발이거나 긴 생머리이거나 어색하게 파마를 한 여학생이, L의 운동화를 주워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새를 주워 드는 심정으로 L의 운동화를.
여학생의 손이 뻗어 와 혼비백산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순간, L의 운동화는 구원의 손길을 만난 듯 안도했으려나. -59쪽

“우리 아들이 어디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도망가다 죽었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더라도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뒤에서……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위험하니까 하더라도 앞에서 하지 말고…… 사진을 보니까 앞에서 했더라구요…… 앞에서…….” -125~126쪽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135쪽

그녀가 가 버리고, L의 운동화 앞에는 또다시 나 혼자 남겨진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면서 내 작업대 위 L의 운동화가 어쩌면 환(幻)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든다. 만질 수도, 집어 들 수도, 신을 수도 없는 환. -203쪽

L의 운동화는 세대를 걸쳐 다시 복원될 것이다. 한 세대, 두 세대를 걸쳐서. 내가 하고 있는 복원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현재 내가 L의 운동화에 진행하고 있는 복원 방법은 100년, 혹은 200년 뒤에 있을 복원 작업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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