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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었으되 낡지 않았다', 7080들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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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 '내가 언제나 바보 늙은이였던 아니야'

 

“우리는 늙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이룬 위대한 업적입니다.”

78세 레옹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으 삶을 그린 소설 '내가 언제나 바보 늙은이였던 건 아니야'가 출간된 2011년, 작가 알렉상드르 페라가는 32세였다.

전직 강도, 사기꾼, 뱃사람이었던 ‘관습과 규칙의 파괴자’·‘무중력 방랑자’ 레옹은 아파트 화재에서 극적으로 구출돼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여자와 매일 춤을 추는 현학적 독서가 잭, 한 손에는 복막 투석기를 다른 한 손에는 소시지와 치즈에 와인을 곁들이며 행복한 자살을 실천 중인 로제, 빈 캔버스만 노려보는 말하지 않는 화가 피에르, 궁금한 적도 물어본 적도 없는 과거사를 늘어놓는 카뮈 부인, 단정한 옷차림에 곱게 화장을 하고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라빌 부인, 예쁘고 솜씨 좋은 간호사 마릴린이 그를 맞이한다. 소설은 레옹의 과거와 현재를 평행편집해 요양원 사람들뿐 아니라 레옹의 과거 속 인물들이 품고 있는 삶의 비밀까지 하나씩 밝혀 간다.

요양원에 들어간 첫날, 엉덩이가 예쁜 간호사 마릴린을 만난 레옹은 오랜만에 ‘혈기’를 느낀다. 또라이는 또라이로 현자는 현자로 늙는 법. 사람이 나이 먹는다고 크게 바뀌지 않는다. 젊어서 막되 먹게 살았던 레옹 파네크는 늙어서도 거침없는 노인이 되었다. 그리고 요양원에서 거죽만 늙었을 뿐, 젊어서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을 만난다.

‘늙은이 한 묶음’으로 치기엔 인생도 성격도 제각각인 이들은 레옹의 현실인 동시에 독자의 미래다. 레옹의 말마따나 그들이 처음부터 “의존적인 늙은이였던 것은 아니”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육체가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인 할아버지의 손자이자 노동자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의 아들인 떠돌이 범죄자 레옹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가리지 않고 엮여 살아왔고, “세상의 모든 여자를 갖기 위해 세상의 모든 남자가 되고 싶”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 덕에 그는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비상한 재주”를 갖춘 데다 “평생 책 한 권 펼쳐 보지 않”고도 “훌륭한 변증법”을 구사하며, “아무리 위대한 문학작품이라 해도 불이나 감자 같은 생필품보다 중요하진 않다”는 진리를 깨쳤다.

저자는 ‘노인의 기억은 역사책보다 소중하다’고 말한다.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깨달음을 얻었거나 말았거나 노인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좀 아는 법이니까.

레옹은 어느 날 익명의 쪽지를 받는다. “당신이 불에 타 버리도록 내버려 뒀어야 해.” “당신을 정말로 원해.” 증오와 욕망의 발신인들 말고도 그는 궁금한 게 많다. 많아야 60대 초반밖에 안 된 ‘젊은’ 놈은 왜 한껏 멋을 부린 채 요양원에 들어앉아 있는 건지, 정신 나간 카뮈 부인은 대체 왜 자신을 붙잡지 못해 안달인 건지, 잭은 왜 허구한 날 춤을 춰 대며, 한번 가 본 적도 없는 이구아수폭포 사진을 붙여 둔 로제는 대관절 무슨 생각인 건지…….

나이를 먹어도 욕구는 변치 않는다. 인류의 오랜 꿈, 더 나은 삶과 내 맘에 쏙 드는 죽음은 노인들에겐 더욱 절실한 현실이다. 레옹은 젊은 날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나를 나 자신의 신으로 추대했으며, 내가 벌이는 하찮은 짓거리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도 이제 자력으로는 단 두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삶은 끝장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은 젊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나이 든 삶의 격렬한 몸부림을 치밀하게 보여 준다.

소설 속 청춘과 노년의 대비는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주변 사람들의 비밀을 알아내는 동안 마침내 그 자신의 가장 내밀한 속내마저 마주한 레옹은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삶은 끝나지 않았다. 늙음은 때로 젊음을 말하고, 죽음은 삶을 비추며,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생의 본질을 파헤치는 법이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파산시키기도 하고 먹여 살리기도” 하는 시대, “죽어야 하지만 죽을 수 없는 노인들과 살아야 하지만 살 수 없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시대다. 젊은이들은 ‘보고 배울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고, 늙은이들은 “우리 자식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걸까?”라고 묻는다.

자식 없이 떠돌아다닌 레옹이나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카뮈 부인이나 요양원에 갇혀 있기는 한 가지다. 부모나 자신의 노후를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왔고, 1인 가구와 딩크족은 날로 늘어 간다. 수명은 늘었고, 노년기는 자꾸 늦춰지고 길어진다. 100세 전후의 삶을 어떻게 젊게 살 것인가. 이 채근 그 고민의 답과 함께 생의 본질을 탐구한다.

책 속으로

나는 그 뭐냐, 대가라고 불리는 작자들의 유일무이한 작품을 한 줄도 읽지 않았지만, 여태 잘만 살았다. 다른 사람들만큼 놀아도 봤고, 평생 먹은 밥그릇 수를 따져도 도서관에 죽치고 사는 쥐새끼 같은 놈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평생 제 성기를 야릇한 곳에 갖다 대 보지도 못한 놈도 있는데, 내가 왜 신세한탄을 해야 하는가? 나는 아마추어 문학 서클을 싫어했다. 유명 작가가 쓴 글귀에 열광하며 찬사의 말을 늘어놓는 머저리들을 좋아한 적이 없다. 세계 평화를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적어도 열 번은 읽어야 하지만, 정확히 인류의 절반은 전혀 관심 갖지 않는 작품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작자들 말이다. 아무리 위대한 문학작품이라 해도 불이나 감자 같은 생필품보다 중요하진 않다.
38쪽

의약 산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3분의 1이 머리가 좀먹고 턱을 가슴에 붙인 채 침을 흘린다면,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내는 세금으로 은퇴자들의 생계를 겨우 감당한다면, 미래가 없는 미래에 겁을 먹은 노인들이 유람 여행에도, 발기부전 치료제에도 땡전 한 푼 쓰지 않는다면, 지도자들은 텅 빈 국고를 들여다보며 안락사 지지자들을 비난하기 전에 두 번쯤은 숙고할 것이다. 불쌍한 부자 나라들! 이 빌어먹을 지구 위에는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해 영양 과잉상태로 하루하루 죽음의 날을 뒤로 미루는 노인들이 있다. 굶어 죽는 아이들과 불멸을 꿈꾸는 노인들이라니! 참으로 훌륭하다. 죽어야 하지만 죽을 수 없는 노인들과 살아야 하지만 살 수 없는 아이들이 이렇게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코미디이다.
52~53쪽

다행히도 나는 생애 최초의 비밀을 잊은 적이 없다. 많은 것이 물에 빠진 설탕처럼 사라지거나 변했지만, 그 비밀은 손상되지 않은 채 언제나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이룬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나는 이런 내 믿음이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시시콜콜한 비밀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비밀이다. 비밀은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다. 분명 여기에 있지만, 잠드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달리 비밀은 수치스러움이라는 단두대로부터 비밀을 소유한 자를 보호해 준다.
103쪽

내가 아는 한, 남자와 여자에 비견할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갖기 위해 세상의 모든 남자가 되고 싶었다. 내 눈앞에는 그녀들이 있었고, 나는 그녀들 모두를 송두리째 머릿속으로 데려올 수도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고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여러 여자들과 섹스를 했다. 훌륭한 학생이 되어 섹스가 끝나자마자 헤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길 위로 뛰어들었다. 그 여정은 대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처럼, 각자 자기만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181쪽

그가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은 탄수화물 부인, 오른쪽은 배설물 부인이라네.”
“아내와 애인이군.”
“그러게 말이야.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녀석이야.”
우리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웃었다. 세상의 모든 암들이 공격해 와 우리를 독방에 가두고 먹어 치운다고 해도 웃는 것만큼은 막지 못할 것 같았다.
267쪽

나는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나를 나 자신의 신으로 추대했으며, 내가 벌이는 하찮은 짓거리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 나는 질서를 어지럽혔고, 쾌락을 좇아 터무니없는 규칙을 만들어 선포했으며, 기존의 규칙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기 위해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화려한 포장으로 그 이름을 감쌌다. 그것이 전부였다.
무국적의 카멜레온처럼 나는 수많은 이름으로 거의 모든 대륙에서 살았다. 나이지리아, 브라질, 홍콩, 마카오, 소련……. 다 나열하자니 지나치게 목록이 길다. 여하튼 때로 나는 미국인이었고, 덴마크인과 네덜란드인이었으며, 프로테스탄트이거나 유대교도, 애니미스트이기도 했다. 매춘부를 양성하는 사육자였는가 하면, 기업의 CEO였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발품을 파는 세일즈맨이기도 했다. 인간의 대비극 속에서 내가 거절한 역은 없었다.
274~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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