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9일. 광주시 광산구 본양면(당시 전남 광산구 본양면)에서 방위병으로 군복무 중이었던 정동열(57) 씨는 광주 시민들이 자신과 같은 군인들의 총칼에 쓰러져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군에 가담한다.
하지만 시위 도중 목포에서 붙잡힌 정 씨는 15년형을 구형받았고, 이듬해 3월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광주교도소에서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시위에 가담했던 정동열(57)씨
정 씨는 퇴행성관절염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다. 그는 “그때 조사실에서 군화로 무릎을 하도 밟히고 걷어차여서 그런지 10년 전부터 무릎이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정 씨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자리를 잡기 어려웠던 그는 “강원도 정선 탄광에도 지원했었지만 광주시위에 참가했던 전력을 문제 삼아 마지막 과정에서 떨어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 씨에겐 해외 취업마저 녹록치 않았다. 그는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 때도 저는 신원조회에 걸려 출국할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설명했다.
결국 정 씨는 부천시 역곡동과 서울 노량진 등지에서 구두 닦기 일을 하거나, 지역을 전전하며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 1300만원의 보상금으로 작은 가게를 차릴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대형 슈퍼마켓에 자리를 빼앗겨 접었다고 한다.
◇ "살 터지라고 몸에 물붓고 몽둥이질 하더라"당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광주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80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신군부는 총칼로 이들을 제압했고 그로인한 피해자들도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1980년 5월, 강원대학교 영어교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윤(57) 씨는 강원도 춘천에서 민중문화연구회 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강원도 춘천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했던 최윤(57)씨
춘천에서는 강원대학교가 시위를 주도했다고 최 씨는 말한다. 그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만 내도 감옥에 가는 시대에 침묵을 지킨다는 건 내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라며 시위에 가담한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점으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이전까지 전국에서 펼쳐졌던 시위도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옆집과 아버지 친구 집에서 숨어 지내던 최 씨는 도피 열흘만인 28일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조사실에서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 씨는 “몽둥이로 때리기 전에 몸에 물을 왜 뿌리냐고 헌병에게 묻자 살이 터지라고 그랬다고 했다. 이후 전기고문도 이어졌다”면서 “‘우리는 빨갱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고 우리를 폭도로 몰고 가기 위해 고문한 것”이라고 말했다.
2년 7개월가량을 교도소에서 보낸 최 씨는 아직도 대학 졸업장이 없다.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교직 이수를 해 평범한 선생님의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최 씨는 40살이 될 때까지 민주화운동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최 씨는 시위 가담 이후 일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교사였던 아내 덕분에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형제나 가족한테 피해가 가는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때는 괴로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박종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최정기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조사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겪은 가장 큰 고통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다.
또, 전체 응답자의 61.7%가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해 사회활동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 "힘들게 살고 있지만 내 행동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때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민주화운동 참가자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정 씨는 “다시 하라면 난 또 한다. 다시 총을 잡으라고 하면 든다. 내가 태어나서 최고로 잘한 일이 그 일(민주화운동 참여)인지도 모른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동정하는 주변 시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정 씨의 입에서 단번에 튀어나온 말이다.
광주 항쟁 당시 진압 군인이 단봉으로 시민을 내리치는 가운데 시민의 옷에 선혈이 낭자하다. (사진=5.18기념재단)
그는 “지금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지만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우린 절대 보상을 바라고 행동한 게 아니다”라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씨는 당시 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항상 설득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리가 불편하기 전까진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에서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 씨 역시 1980년 5월에 한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 동족이 살해당했고, 7년간 군사독재체제가 이어져오던 상황에서 제가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개나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됐을 것”이라며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정경자 사무처장은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보호받아야한다는 시각이 먼저 돼서는 곤란하다”며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긍지에 초점을 두고 왜 그런 희생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한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올해로 36주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