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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유대인 가족의 초상, 밀어로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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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탈리아의 여성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소설 '가족어 사전'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이 책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전적 이야기다. 하지만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있으며, 작가 역시 이 이야기가 소설로서 읽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탈리아의 가족, 친지, 친구들이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고, 이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이탈리아의 현대사와 조우한다.

작품의 배경은 무솔리니가 등장하여 파시즘이라는 독재 체제가 들어서고 인종법이 발의되어 유대인 등 소수 인종에 대한 박해가 현실화되는 시기이다. 레비 가족은 토리노에 살던 유대계로서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파시즘은 당시 이탈리아 정치의 대세였고 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이 파시즘에 동조했다. 그러나 안목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파시즘의 광기를 예견하고 이에 저항했다. 작가의 아버지 주세페 레비, 오빠들, 남편 레오네 긴츠부르그와 친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되는 개인적 체험을 다룬다. 즉 '가족어 사전'은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유년과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고백하는 자전 소설인 동시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작가와 가족, 친지, 지인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다.

책의 원제 'Lessico famigliare'에서 lessico의 본래 의미는 '사전'인데, 이 책에서는 가족이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그들끼리만 통하는 말, 즉 '밀어'(密語)를 함축한다. 작가는 가족이 쓰는 사적인 밀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족의 일상을 형상화한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버지 주세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가족들에게 '당나귀', '니그로', '얼간이', '살라미 소시지'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권위적인 성격이 드러나지만 동시에 미워하기 어려운 인간적 면모가 부각된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던 오빠 마리오가 어릴 때 즐겨한 말장난 "일 바코 델 칼로 델 말로. 일 베코 델 켈로 델 멜로. 일 비코 델 킬로 델 밀로"('일 부코 델 쿨로 델 물로'[노새 똥구멍]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모음을 바꿔서 말을 만드는 게임)는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유년의 뜰'로 독자를 데려간다. 오빠 알베르토가 지은 시 "가슴도 없는/ 노처녀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았네"는 레비 가족의 지적인 자유분방함과 문화적 감수성을 짐작하게 한다.

레비 가족의 밀어는 오직 레비 가족만이 알 수 있다. 그 밀어가 '가족의 감정적 기반'을 이루고 가족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리하여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쁜 형제들을 다시 5남매가 함께 살았던 시간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반복하여 썼던 말들이다.

작가는 가족의 밀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끼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 이런 문장 하나 혹은 이런 말 중의 하나는 우리 형제들이 어두운 동굴 속이나 수백만의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서로를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들의 라틴어였고 지나간 날들의 사전이었으며 이집트 혹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상형문자, 존재하기를 멈추었지만 난폭한 물살과 시간의 부식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세포들과 같은 것이다."(36~37쪽)

가족의 밀어를 통해 레비 가족의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개성이 되면서, 한편으로 이 세상 여느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권위적이고 괴팍하지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내 리디아에게 자식들 걱정을 토로한다. ("알베르토 때문에 걱정이야!" 아버지는 한밤중에 눈이 떠지면 이렇게 말했다. "군사재판에 회부될 정도라면 정말 장난이 아니었을 거야!"―147쪽) 그리고 파시즘에 반대하고 반파시스트 투쟁가를 신뢰하여, 오빠들이 체포되어 투옥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머니 리디아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사랑하며 집 안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낙천적이고 유쾌하며,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포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 주세페와 어머니 리디아 덕분에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레비 가족은 일상에서 지성과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마리오와 알베르토는 청소년기에 반항적이고 자주 말썽을 피워 아버지에게 '당나귀'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지만, 청년기에 들어서는 파시즘에 맞서 결연히 투쟁한다. 반파시스트 투쟁가 친구들의 면면도 화려한데, 알베르트의 친구 잔카를로 파예타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요 멤버이고 비토리아 포아는 전후 이탈리아의 주요한 정치인이 된다.

작가의 남편 레오네 긴츠부르그 역시 유명한 반파시스트 투쟁가이다. 전쟁 시기에 작가에게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남편 레오네의 죽음이다. 그러나 작가는 남편과의 유형지에서의 생활과, 투옥과 고문으로 인한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극적이기보다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자신에게 일어난 운명을 받아들이고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레비 가족의 유쾌함과 낙천성, 그로부터 말미암는 보살핌과 사랑 덕택이었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가족의 일상, 그 일상에서의 가족 간의 교류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책은 나탈리아의 인생을 만든 사람들, 그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고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한 여성의 기나긴 자기 탐색의 여정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과거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손을 다시 잡을 수는 없지만, 작가의 기억과 글쓰기는 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오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모든 종류의 악기를 증오했는데 피아노, 아코디언, 탬버린 같은 것도 그에 포함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아버지와 함께 로마의 식당에 간 적이 한번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구걸을 하러 식당으로 들어왔다. 종업원이 그녀를 내쫓으려고 하자 아버지는 그 종업원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불쌍한 여인을 내쫓지 마시오! 그냥 놔둬요!" 아버지는 여인에게 적선을 했다. 모욕을 당해 몹시 화가 난 종업원은 팔에 냅킨을 걸친 채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여인은 외투 안에서 기타를 꺼내 연주를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안절부절못하고 유리컵을 옮기기도 하고 빵이나 포크와 나이프를 옮기다가 냅킨을 무릎 위로 내던졌다. 그 여인은 자기편을 들어준 데에 대한 답례로 아버지 쪽으로 기타를 기울이면서 계속 연주를 했다. 기타에서는 우울하고 비탄에 잠긴 긴 음들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갑자기 폭발했다. "음악은 그만하면 됐소! 나가요! 이런 연주를 참고 들을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여인은 연주를 계속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해진 종업원은 구석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62~63쪽

오빠는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해부학 강의실에서 오빠를 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오빠를 강의실에서 만난다는 걸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번은 강의실을 어둡게 하고 아버지가 슬라이드를 돌리다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담뱃불을 발견했다.
"누가 담배를 피우나?"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어느 개자식이 담배를 피우는 거야?"
"저예요, 아빠." 오빠가 익히 알려진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126쪽

알베르토 오빠는 얼마 뒤에 아주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절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나 우리 형제 중 누군가가 몸이 좋지 않아 알베르토 오빠에게 진찰을 받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는 예의 그 천둥 치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알베르토야! 알베르토가 대체 뭘 안다고!"
―127쪽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 감옥에서 다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구두끈도 없었다. 아버지는 겨드랑이 밑에 신문지로 싼 더러운 속옷 꾸러미를 끼고 있었다. 수염이 길게 자라나 있었는데 아버지는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146쪽

그날 아침, 멀리 북쪽에 떨어져 있는 내 부모 형제들을 생각하며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며 보낸 그 많은 고독과 공포의 시간 이후에 만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아드리아노의 친숙한 모습 앞에서 내가 느꼈던 그 큰 안도감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그리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인내심 있는 선량한 태도로 허리를 구부려 방에 흩어진 우리 옷들과 아이들의 신발들을 모으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집에서 빠져나올 때 아드리아노는 그 옛날 투라티를 데리러 우리 집에 왔을 때의 그 얼굴, 누군가를 구해낼 때의 숨이 차는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해 보이기도 하는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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