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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꾀꼬리 소리에 넋을 잃고…조선의 풍류 그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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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화전-풍속인물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4.20~8.28

김홍도 <마상청앵>

 

단원 김홍도는 진경풍속화풍의 대미를 장식한 화가로, <마상청앵〉(바로 위="" 작품)이="" 그런="" 그림="" 중의="" 대표작이다.="" 신록이="" 짙어가고="" 뭇꽃들이="" 피어나는="" 늦봄,="" 어느="" 화창한="" 날에="" 젊은="" 선비가=""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문득="" 말에="" 올라="" 봄을="" 찾아="" 나섰다가="" 길가="" 버드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 쌍이="" 화답(和答)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해="" 낸="" 그림이다.="" 꾀꼬리의="" 화답="" 장면과="" 넋="" 나간="" 선비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듯=""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길섶="" 한곁으로="" 몰아="" 놓고="" 선비="" 일행을="" 큰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하늘로="" 비워="" 둔="" 대담한="" 구도를="" 보였다.="" 선비와="" 말을="" 모는="" 떠꺼머리="" 총각의="" 옷주름은="" 단원=""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철선묘(鐵線描)로="" 처리하여="" 조선옷이="" 가지는="" 넉넉하면서도="" 빳빳한="" 옷맵시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었다.="" 반면="" 갓과="" 말="" 그리고="" 길섶="" 풀들은="" 먹의="" 번짐만을="" 이용하였으니="" 철선묘와="" 대조를="" 이루어="" 조화를="" 얻게="" 하려는="" 의도일="">

간송문화전 여섯번째 전시인 「풍속인물화 – 일상, 꿈 그리고 풍류」에서는 풍속인물화와 함께 조선시대 선조들의 일상생활과 꿈 그리고 풍류를 느껴볼 수 있다.

김홍도의 <마상청앵>, 김득신의 <야묘도추>, 신윤복의 <미인도>, 신윤복의 <단오풍정> 등 풍속화의 걸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구범석작가의 미디어 작업은 옛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이이남 작가의 <꿈 속의="" 선비="">는 단원 김홍도의 명화 <마상청앵도>의 말을 타고 가다 봄의 소리를 듣게 되는 원작의 분위기를 동영상 기법으로 표현했다. 구범석 작가의 <간송아트컬렉션>은 조선시대 풍속인물화 걸작 10점을 선별하여 초고해상도 화질로 구현하여 고미술의 색다른 영상미를 감상 할수 있다.

이번 전시회는 풍속화에 초점을 맞춰 조선 오백년 동안 인물풍속화의 변화를 담고 있다.적이다. 석경(1440-?)으로부터고희동(1886-1965)에 이르기까지 근 500년 동안 조선왕조가 배출한 33명의 화가들이 그려낸 인물풍속화를 한 자리에 선보였다.

신윤복 <쌍검대무>

 

한 시대 문화는 그 시대를 주도하는 이념이 그 성격을 결정짓는다. 그 사실은 이념을 뿌리로 피워낸 꽃인 예술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가시적이고 고정적인 조형예술, 즉 미술에서 더욱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 회화사에서도 이 사실은 극명하게 드러나니 남중국 발원의 주자성리학 이념을 받아들여 국시로 천명하고 개국하여 전기 250여년을 살아오는 동안에는 중국풍의 그림양식을 모방하려는 노력이 지속된다.

그래서 주자성리학적인 문물제도가 정비되는 세종대에 이르면 집현전에서 그 제도정비를 담당했던 강희안(1418-1465) 같은 사대부화가가 출현하여 묵법(墨法) 위주의 남중국풍 그림양식을 사대부화풍으로 정착시킨다.

동시에 화원화가인 안견(1418-?)은 필묘(筆描) 위주의 전통적인 북방화법을 화원화풍으로 정착시켜나간다.

이로써 중국의 남북방 양대화풍이 철저하게 서울 화단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산수·인물 · 화훼· 영모 등 모든 화과(畵科)에서 중국 그림을 따라하지 않는 게 없었으니 하다못해 소를 그리면 우리에게 없고 남중국에만 있는 물소만을 그려내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가 차례로 나와 조선성리학 이념을 정립시키자, 이 고유이념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에서 조선 고유색이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율곡학파가 주도하고 퇴계학파가 묵시적으로 동조하여 성공시키는 인조반정(1623)에서 조선성리학이 주도이념으로 공식화된 이후에 진경풍속화의 대발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홍도 <염불서승>

 

겸재 정선(1676-1759)이 출현하여 조선성리학이념을 바탕으로 진경풍속화풍을 창안하니 조선의 인물화는 조선사람의 의복을 차려입은 조선풍속화로 일변한다. 이에 한동네 10년 후배인 조영석(1686-1761)이 풍속화에 주력하여 그 기틀을 확립하는데 초상화 발전과 보조를 나란히 한다.

그러나 심사정(1707-1769), 강세황(1713-1791)등 진경시대 중반을 대표하는 사대부화가들은 명나라 문화의 본격적인 계승을 주장하며 남종화풍을 수용하여 인물 표현을 중국식으로 되돌리려는 반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데 진경시대를 마무리 짓는 세대인 김홍도(1745-1806), 김득신(1754-1822), 신윤복(1758-?) 등 화원화가들이 우리 풍속화풍을 발전적으로 완성시켜 놓음으로써 조선풍속화풍은 그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김정희(1786-1856)에 의해 고증학의 문호가 개설되고 청조문인화풍이 수용되면서 다시 중국풍의 인물화가 등장하게 되는데 심사정의 조선 남종화풍이 그 가교 역할을 했기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장승업(1843-1897)은 추사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문기(文氣)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으로 중국화풍을 모방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밀려드는 청대말기의 인물화풍을 능력껏 수용하여 자기화해 나갔다. 이는 망국기 조선사회의 혼란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법이 조선최후의 화원인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그 제자들인 이도영(1884-1933), 고희동(1886-1965) 등에게로 이어져 현대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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