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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를 종단한 한국 청년, 길 위에서의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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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4,300km'

 

모험가 양희종은 서른을 앞둔 시점에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동행을 구해 4,300km의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로 떠난다. 신간 '4300㎞'는 175일(2015.4.16~10.7) 동안의 생생한 기록이다. 텐트와 침낭과 식량을 배낭에 짊어지고 9개의 산맥과 사막과 황무지를 걷는 동안 폭염과 폭설과 폭풍우를 겪고, 계곡물에 빠지기도 하며, 달려드는 모기떼와 싸운다. 마른 식량을 물에 녹여 먹고, 보급품이 바닥나면 가까운 마을로 탈출하여 식량을 채우고, 고산증으로 지독한 편두통을 앓기도 한다. 타는 듯한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밤중에 달빛 하이킹을 하고, 산 정상이나 사막에서 캠핑을 한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거운 배낭도, 뜨거운 사막도, 물집과 무릎통증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두려움과 외로움이었다. 산을 내려가며 반대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될 때의 막막함. 아무도 없는 광야를 걸으며 혼자라는 생각.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위로받고 힘은 얻은 것은 따뜻한 온천과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호수, 힘차게 내리꽂는 폭포, 구름으로 뒤덮인 산 등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만날 때였다. 그를 걷게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네 켤레의 신발, 동행이었던 희남,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캠핑사이트를 무료로 내준 호주 부부, 물이 떨어진 순간 음료수와 간식을 챙겨준 하이커들, 개가 보급품을 먹어버렸다며 사과 편지와 20달러를 보낸 도나, 잘못 산 냉동피자 때문에 난처해하는 그에게 사흘 동안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준 마크 부부, 플러그 하나를 전해주러 시애틀에서부터 달려온 바리스타, 캠핑사이트에서 벌어지는 하이커들의 맥주파티,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나누는 교감과 우정…. 그들 하나하나가 트레일 엔젤이었고, 트레일 매직이었다. 희남이의 부상으로 완주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업고서라도 함께 길의 끝에 서고야 말겠다는 다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꿈과 욕망, 직업, 사랑, 결혼, 이별, 우정, 환경…. 서른 살이 된 저자는 지인들로부터 화두를 받아 이 시대의 청년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되돌아본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저자는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정신의 근육까지 단단해진 모습으로 길 끝에 선다. 그리고는 말한다. 내가 해냈으니 당신도 언제든 가능한 일이라고. PCT를 완주한 후 그는 캐나다로 넘어가 빅토리아마라톤에 참가하고, 시애틀에서 자전거를 타고 멕시코까지 달렸다. 그의 다음 도전은 미국 중부 로키산맥을 따라 5,000㎞의 CDT(Continental Devide Trail)를 걷고, 자전거로 멕시코에서 남미의 끝까지 달리는 일이다. '4300km'는 장거리 트레킹을 준비하는 이들, 극한의 걷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자극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본문 속으로

옷을 갈아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마을에 들러 빨래를 할 때 빼고는 계속 단벌로 지냈다. 양말도 찢어질 때까지 계속 신고 찢어지면 버리고 새것을 사서 신었다. 물론 부지런하다면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많겠지만 마을을 만나지 않는다면 대부분 산속에 있는 계곡이나 개울물에서 씻어야 한다. 그래서 하이커들이 일주일 동안 샤워를 안 하는 것은 예삿일이다.

별이 내 눈앞으로 쏟아지는 듯했다. 앞으로도 수없이 만나게 될 PCT의 별밤. 누군가 그랬다. 별 백만 개짜리 호텔에서 자보았냐고, 나는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수없이 자게 될 것이다.

꿈만 같았던 사흘 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 만난 날부터 엄마처럼 자상하게 챙겨주고 음식을 만들어주고, 밤이면 이부자리를 봐주며 잘 자라고 토닥여주던 트리시 아주머니, 아침마다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주던 마크 아저씨. 만나서 너무 행복하다며 웃어주던 그들, 내 그림이 너무 좋다며 인쇄하여 액자에 끼워놓던 장면까지 하나하나…. 그들이 낯선 동양 청년들에게 베풀어준 친절과 따뜻함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맛본 문명의 혜택은 달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그만큼 다시 PCT로 돌아가기가 두려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PCT 도전 혹은 완주. 국내 최초이든 아니든 나에겐 크게 중요치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 인생 최초의 도전이며 경험이고 이뤄낼 목표란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 최초의 PCT가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PCT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다.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

내 앞에 리안드레아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내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고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호텔에서 챙겨온 오렌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나한테 주는 거야? 왜 주는데?"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이뻐서,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거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바보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먹고 남은 거야."

많은 사람들이 PCT 완주에 초점을 맞추고 관심을 가지며 이 길의 끝에 섰을 때 나에게 박수를 더 쳐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길 끝에 서지 못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이 길도 끝이 있다. 그 끝에 하루 빨리 도달하고 싶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루라도 더 늦게 도달하고 싶기도 하다.

식탁에는 미국인과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그리고 두 명의 한국인이 앉아 아메리칸 커피와 이탈리안 소시지, 프렌치토스트, 그리고 코리안 김치를 함께 먹고 있었다. 다국적 사람들과 다국적 음식의 조합이라니.

원래 계획보다는 조금 늦어졌지만 그러면 어떤가. 순리대로 하면 되는 것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네가 지금 포기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끝까지 완주하고 싶다면, 내가 업고라도 갈 테니 걱정 마라."

PCT를 걸으며 내리막에서 두려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려가며 반대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내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될 때이다. 신나게 내려가고 있지만 그만큼을 다시 미친 듯이 올라야 한다.

희남이가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몇 번인가 보았지만 일부러 따라잡지 않았다. 마지막 이 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홀로 이 길 끝에 섰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도달하기. 어찌 보면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핑계 삼아 우리의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 용기를 내자.

나는 가난한 여행자이다. 물론 여행을 하는 것 자체가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나는 분명 여유롭지 않은 여행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시간에 쫓겨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마음의 여유까지 사라진 나를 발견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무서웠다. 마음만은 가난해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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