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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거인' 하승진 "이세돌 패배에서 깨우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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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큐, 쎈돌' KCC 센터 하승진(오른쪽)은 9일 인삼공사와 4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 앞서 열린 이세돌(왼쪽)과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벌인 '세기의 바둑 대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사진=박종민 기자, KBL)

 

'2015-2016 KCC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눈앞에 둔 정규리그 우승팀 KCC. 7일과 9일 전주에서 열린 인삼공사와 4강 플레이오프(PO) 1 ,2차전을 내리 이겼다. 5전3승제 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겼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올 시즌 최고 선수 안드레 에밋(191cm). 1, 2차전에서 에밋은 양 팀 최다 27점, 39점을 올려 2연승을 견인했다.

하지만 에밋의 활약과 팀 승리를 뒷받침한 숨은 주역은 하승진(221cm)이었다. 하승진은 1, 2차전 득점은 15점과 14점이었지만 리바운드는 그것보다 많은 16개씩을 잡아줬다. 추승균 KCC 감독은 1, 2차전 인터뷰 모두 "승리의 발판은 하승진을 중심으로 한 제공권 장악이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하승진은 공격 리바운드를 5개와 7개나 기록했다. KCC 선수들이 마음 편하게 슛을 쏠 수 있던 이유였다. 김민구는 "내가 못 넣어도 골밑에서 잡아준다는 생각으로 자신있게 던졌다"고 했다. 하승진은 상대 머리 위에서 리바운드를 걷어내거나 톡 쳐서 탭슛으로 연결하며 골밑을 지배했다.

지난 시즌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골밑에서 상대 빅맨들에 밀리기 일쑤였던 하승진이 아니다. 2~3명이 밀어도 꿈쩍않고 버티며 자신의 장점인 신장의 우위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걸까. 어떤 점이 하승진을 예전 두 차례의 챔프전 우승을 가져온 '괴물'로 되돌린 걸까.

▲'힘없는 변덕규'에서 다시 '하킬' 괴물 모드로

일단 하드웨어인 체격의 변화가 있겠다. 사실 지난 시즌 하승진은 15kg 이상을 감량했다. 2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지고 복귀한 하승진은 의욕적으로 살을 뺐다. 150kg 거구에서 가해지는 하중을 줄여 고질적인 무릎 부상 등에서 자유로워지고 느리다는 지적을 피해 스피드를 기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상대적으로 힘이 준 하승진은 그저 '키만 큰 선수'에 불과했다. 기대만큼 스피드는 향상되지 않았고, 골밑에서는 밀리는 하승진은 더 이상 두려운 선수가 아니었다. 인기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인물로 비유하자면 1학년 때의 능남고 센터 변덕규라고나 할까.

그런 하승진은 올 시즌 달라졌다. 뺐던 살을 다시 찌웠다. 그러나 여기에 고된 웨이트 훈련을 더해 그 살들은 근육질로 업그레이드됐다. 예전 '하킬'의 위세를 되찾았다. KCC가 정규리그 막판 12연승을 달릴 수 있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둘로는 역부족' KCC 하승진(가운데)이 9일 인삼공사와 4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오세근(왼쪽), 찰스 로드의 더블팀을 뚫고 공격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자료사진=KBL)

 

4강 PO 2차전 뒤 하승진은 지난 시즌의 과오를 돌아봤다. "지난 시즌 스피드를 키우려고 살을 뺐다"면서 하승진은 "그런데 221m 키에서 감량하더라도 절대 빨라지지 않고 힘만 없어지더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래서 올 시즌은 힘이라도 챙기자는 생각과 함께 살과 근육을 키웠다"고 강조했다.

허버트 힐(203cm)의 가세도 하승진에게는 분명 도움이 됐다. KCC는 당초 올 시즌 에밋과 리카르도 포웰(196cm)로 외인 2명을 채웠다. 그러나 생각만큼 성적은 나지 않았다. 에밋과 포웰의 역할이 겹쳤고, 하승진은 팀의 유일한 장신으로 골밑을 혼자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포웰을 전자랜드로 보내고, 힐을 데려오면서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졌다. 에밋은 더 자유롭게 코트를 휘저었고, 하승진은 힐과 함께 골밑 부담을 나눴다. 25분 안팎으로 출전 시간을 조정해 집중할 수 있게 된 하승진은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추 감독은 "힐이 오면서 하승진이 지칠 때 교체를 해줄 수 있게 됐다"면서 "체력 안배는 물론 부상 위험도 방지할 수 있다"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강조했다.

▲"인간의 단점이자 장점, 감정을 이용하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다. 하드웨어의 발전과는 또 다른 엄청난 진보를 이뤘다.

하승진은 2차전 뒤 인터뷰에서 올 시즌 달라진 비결에 대해 묻자 일단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이어 감성을 언급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체격 조건보다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하승진이 예를 든 것이 바둑 세계 최고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펼친 세기의 대결이었다. 4강 PO 2차전에 앞서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이 펼쳐졌는데 하승진은 짬을 내 승부를 지켜봤단다.

하승진은 "둘의 대결을 봤는데 알파고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면서 "반면 이세돌은 잘 되지 않을 때 고개를 흔드는 등 감정의 기복을 볼 수 있었다"고 촌평했다. 이는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포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과연 잘 둘 수 있을까'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의 첫 번째 대국에서 첫 수를 준비하는 모습.(자료사진=구글)

 

여기서 또 다시 깨달음을 재확인했다는 것이다. 하승진은 "아무래도 사람은 장점이자 단점이 감정적인 것"이라면서 "이세돌도 기분이 안 좋아지면 자기 것을 가져가는 걸 잊더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반대로 이용하면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나도 감정적인 스타일인데 잘 활용하면 컨디션과 에너지가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흔들리지 않고 좋은 감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승진은 "중요한 경기를 하다 보면 (상대 도발과 템포 등에) 자칫 말릴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어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한데 그래서 플레이오프가 되면 의지나 집중력이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세돌처럼 하승진이 깨달은 것은 또 있다. "5판 모두 이기거나 잘 하면 1판을 내줄 것을 예상한다"고 자신감을 보였던 이세돌은 1차전에서 알파고에게 충격의 불계패를 당한 뒤 "이제 승부는 5대5가 됐다"고 한 발 접었다.

하승진도 마찬가지다. 4강 PO 미디어데이 때 평소 낮은 자유투 성공률에 대해 하승진은 "자유투 정말 자신있다"고 우려를 일축했다. 그러나 1차전 13%(8개 중 1개), 2차전 40%(5개 중 2개)의 낮은 성공률에 그쳤다. 이에 대해 하승진은 "자유투는 정말 성스러운 영역"이라면서 "내가 경솔한 발언을 했다"고 뉘우쳤다. 이어 "자유투에 대해 사과를 하고 다시는 설레발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스포츠는 신체가 발휘하는 운동 능력과 기술을 겨룬다. 그러나 그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다. 하승진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또 다시 깨달은 진리이자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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