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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민주·통일…백범 정신이 청년모금으로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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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한 양반출신 김구, 동학이념에 반해
- 십대 후반에 이미 동학군 지도자로 활동
- 임시정부 초기엔 경무국장 담당
- 임정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 후 임정수반으로
- 청년들 주도로 한달만에 3천만원 모금
- 김구의 정신 상징하는 조형물 만들 예정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3월 1일 (화)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이준식 연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 정관용> 3.1절날 보내드리는 시사자키 마지막 코너인데요. 우리 독립운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애국지사 이렇게 꼽히는 분이죠. 그래서 오늘은 김구 선생 공부 좀 제대로 하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준식 연구위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준식>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우리 국민들이 독립 운동가들 중에서 제일 많이 기억하고 제일 추앙하고 하는 분이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대략 이렇지 않습니까?

◆ 이준식> 그렇습니다. 국민들 상대로 여론조사 하면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이 김구 선생님입니다. 그다음에 안중근 의사 이 정도가 꼽히죠.

◇ 정관용> 그렇죠. 그런데 정작 ‘김구 선생이 무슨 일 했는지 알아?’ 하면 잘 몰라요.

◆ 이준식> 임시정부 주석 그 정도만 알고 계시죠.

◇ 정관용> 그러니까요. 어떻게 하다가 주석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이런 거 잘 모르잖아요.

◆ 이준식> 오늘 그 얘기를 하겠습니다.

◇ 정관용> 얼마 전 히트쳤던 암살이라는 영화에 ‘아, 김구 선생이 저렇게 암살지령 이런 것도 하셨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보는 분들 많더라고요.

◆ 이준식> 국민들이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는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이 두 분의 의거를 사실 계획한 것도 김구 선생이고요. 이런 저런 활동을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이렇게만 알고 계시죠.

◇ 정관용> 이제 공부합시다. 몇 년도에 어디에서 태어나신 분입니까?

◆ 이준식>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고요. 조상 중에 역모사건에 관련된 분이 계셔서 해주에 낙향을 했고 어렸을 때 집에서 공부를 해서 과거에 응시를 했는데 과거에 실패를 했습니다. 과거에 실패하고 난 다음에 왜 내가 과거에 실패했을까 세상이 잘못돼서 그런 거다. 부패한 세상 문물들이 판치는 세상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계시다가 그 당시가 막 동학이 일반민중 사이에 널리 퍼지던 때입니다. 동학이 내세우던 평등주의. 모든 사람들이 다 골고루 대해야 된다는 평등주의에 반해서 동학에 입문을 합니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해주 동학농민군의 대장이 돼서 당시 황해도의 중심지가 해주였는데요. 해주성을 공략하는 전투를 직접 이끕니다.

◇ 정관용> 나이 열여덟, 열아홉 이때인데.

◆ 이준식> 10대 후반에요. 어린 나이에 해주성 공략에 나섰는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바로 동학농민군이 패퇴하고 탄압을 받지 않습니까? 탄압을 받았을 때 이 김구 선생을 거둬준 사람이 있습니다. 거둬준 사람이 누구냐면 같은 황해도 신천에 안태훈이라는.

◇ 정관용> 안태훈하고.

◆ 이준식> 안태훈이라는 분이 거둬주는데 이분이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입니다. 참 묘한 인연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안태훈이란 분은 양반 입장에서, 지배층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는 쪽이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요?

◆ 이준식> 그런데도 김구 선생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숨겨준 거죠. 보호를 해준 거죠. 그리고 이제 안태훈 집에 가 있을 동안에 김구 선생님이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전기를 맞이합니다. 고능선이라는 황해도 지방의 대표적인 유학자 밑에서 본격적으로 유학을 공부합니다.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을 하고 고능선 선생이 강조한 게 의리입니다. 의롭게 살아라. 의롭지 않은 일은 뿌리치고 의롭게 살라는 가르침에 공명을 해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학에 입문해서 동학에서 활동했죠. 아주 정통 유학자로부터 유학을 공부했죠. 그다음에 안태훈의 집을 떠나서 이런저런 활동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학교를 만들어서 교육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또 한때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요.

◇ 정관용> 독립운동.

◆ 이준식> 네. 그것도 독립운동이죠. 그리고 1907년에는 신민회라는 당시 국내 최대 비밀결사가 만들어지는데.

◇ 정관용> 신민회.

◆ 이준식> 정치적인 비밀결사가 만들어지는데 신민회에 들어가서 또 활동을 합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굉장히 큰 발자취를 남기는 분들 가운데 신민회 출신이 굉장히 많은데 김구 선생님도 신민회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당시 조선의 국모가 민비인데 민비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던 일본 제국주의 낭인들이.

◇ 정관용> 시해했잖아요.

◆ 이준식> 궁에 들어가서 시해하지 않습니까? 그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황해도에서 우연히 김구 선생이 일본군 장교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 일본군 장교가 을미사변의 원흉이라고 생각을 해서 일본군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죽입니다.

◇ 정관용> 그래요? 힘도 장사였네요.

◆ 이준식> 힘도 굉장히 장사였던 모양입니다. 무기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때려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일본군 장교를 죽였으니까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죠. 사형 선고까지 받았는데.

◇ 정관용> 그때는 일제시대는 아니지만.

◆ 이준식> 일제시대는 아니지만 일본의 영향으로 어쨌거나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는데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을 면합니다. 고종 입장에서 보면 자기 부인을 죽인 원흉인 줄 알고 죽였으니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했겠죠. 그래서 사형을 면하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탈옥을 합니다.

◇ 정관용> 탈옥. 이야, 참. 영화네요, 영화.

◆ 이준식> 그리고 승려 생활, 기독교 전도사 생활, 애국계몽운동 이런 다양한 활동을 벌이시고.

◇ 정관용> 그때는 좀 숨어다니고.

◆ 이준식> 숨어다니기도 하고 인천에도 숨어 있었고 전라도까지 숨어다니고 그러셨죠.

◇ 정관용> 그러던 와중에 절에도 잠깐 계셨다가 그러다가 기독교도 궁금하니까 한번 공부하셨다가.

◆ 이준식> 그래서 젊었을 때는 아마 지적 호기심 이런 것도 굉장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러다가 만주로 떠나신 건 언제였습니까?

◆ 이준식> 상하이로 떠나셨던 건 1919년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해외로 망명해서 당시 1919년 4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는데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서 유명한 말인데 ‘문지기라도 시켜 달라’. 나는 임시정부에서 제일 낮은 자리에서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자원을 했고 실제로 문지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 정관용> 그렇죠. 무슨 국장 이런 거 하셨던데.

◆ 이준식> 네, 경무국장을 하셨는데 경무국장이라는 것이 주로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일제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지키는 역할. 좀 경무국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임시정부의 정보기관 그런 역할이겠죠.

◇ 정관용> 정보, 경호. 이런 쪽.

◆ 이준식> 네.

◇ 정관용> 힘쓰는 일을 하셨네요.

◆ 이준식> 네. 그런데 1920년 이후에 임시정부 활동이 좀 침체됩니다. 거기다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을 둘러싸고 굉장히 큰 갈등이 일어납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승만이 미국 윌슨 대통령을 상대로 해서 위임통치청원이라는 것을 합니다.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인데 일본 대신에 미국이 들어와서 우리를 통치해 달라고 하는 게 위임통치청원인데. 위임통치청원을 하니까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굉장히 큰 반발이 일어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경우는 극단적으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 팔아먹었지만 아직 독립도 하지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이완용보다 더 나쁜 매국노다’ 이럴 정도로 큰 반발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임시정부 안에서 퇴진운동이 벌어지는데 이승만이 퇴진을 안 합니다.

◇ 정관용> 버티죠.

◆ 이준식> 버티죠. 그러면서.

◇ 정관용> 그러다가 아무튼 임시정부 전체 활동이 위축이 되고.

◆ 이준식> 그래서 위축되고 1925년에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을 합니다. 면직 결의를 하는데 면직 결의를 하고 난 다음에 이 대통령제가 문제가 있으니까 지도체제를 바꾸자. 그래서 국무령제라고 해서 일종의 내각 책임제를 도입을 합니다. 그리고 첫번째 국무령으로 첫번째 임시정부 수반으로 만주에 있던 이상용 선생을 모셔오는데 잘 안 됩니다. 계속 26년까지도 혼란이 계속되니까 이제 임시정부 안에서 임시정부를 고수하던 세력이 김구 선생을 ‘당신이 나서서 이 혼란을 좀 수습해라’ 해서 26년에 임시정부 수반이 됩니다. 국무령이 되죠. 그러니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고 나서 한 7년 지난 다음에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거죠.

◇ 정관용> 그렇죠. 내각제 지도체제의 어떤 총리 내지는 수상, 이런 자리에 올랐던 거죠. 그리고 그 후에 말씀하신 그런 무장투쟁 내지는 이봉창 이런 등등의 지휘부로 계속 활동도 하셨고.

◆ 이준식> 26년에 국무령으로 취임하셨는데 역시 임시정부의 갈등, 분열, 침체가 잘 극복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1930년대 들어서 백범 김구 선생님이 활로를 모색해야 된다. 탈출구를 찾아야 된다고 해서 한인애국단이라고 하는 의열투쟁을 전문적으로 하는 단체를 만듭니다.

◇ 정관용> 한인애국단.

◆ 이준식> 한인애국단이요. 1931년에 만들어지는데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의거와 그다음에 윤봉길 의거를 계획하는 거죠. 그러면서 당시에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국민당 정부, 장제스 정부가 임시정부 활동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하지를 않았습니다. 탐탁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고 나니까 장제스가 깜짝 놀란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중국인 100만 군대가 하는 것보다 한인 1명이 한 것이 더 훌륭하다’ 그러면서 임시정부를 다시 보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고 하는데 이게 또 윤봉길 의거가 동시에 임시정부 활동의 장애요인으로 작용을 합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상하이는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조차지였습니다.

◇ 정관용> 모두가 다 들어와 있었잖아요.

◆ 이준식> 네. 조계라고 그러죠. 두 가지 조계가 있었는데 하나는 공동 조계라고 하서 열강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지역이 있었고 하나는 프랑스 조계라고 해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조계가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해서 묵인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늘 얘기하는 똘레랑스 정신에 입각해서 한국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하니까 그건 인정을 하겠다. 대신에 실정법은 어기지는 말아라.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독립운동하는 것은 프랑스는 용인한다 했는데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니까 프랑스 정부가 윤봉길 의거를 살인사건으로 판단을 합니다. 이것은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임시정부의 활동을 묵인할 수 없다. 그래서 임시정부가 활동할 근거지를 상실한 거죠. 그러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시정부에 대해서 일본이 계속 탄압하려고 하니까 당분간 상하이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 해서 32년에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서 그다음부터 한 10년 동안 1940년 사천성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이른바 유랑생활을 합니다. ‘장정’이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유랑생활을 하는데. 영화 암살에 보면 처음 임시정부 김구 선생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유랑생활 초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상당히 그럴 듯하게 그려졌는데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힘들게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정관용> 해방을 맞을 그 당시의 직책은?

◆ 이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습니다.

◇ 정관용> 그렇죠.

◆ 이준식> 그러니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체제가 몇 차례 바뀌는데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그리고 다시 주석제로 바뀌는데. 처음부터 주석이 된 것은 아니고 중간에 주석이 되셨고요. 임시정부 주석이 되면서 중요한 것이 마지막 주석인데. 마지막 주석이 중요한 이유는 임시정부 마지막이 이른바 합작정부입니다. 처음에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는 독립운동 여러 세력이 합작을 해서 출범을 했죠. 그러다가 임시정부 안에 분열이 일어나서 떨어져나갈 사람은 떨어져나가고 그랬는데 1940년대 이후에는 떨어져 나갔던 여러 세력이 다시 임시정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합작 정부가 되는데 합작 정부가 되면서 1944년에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개헌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부주석제도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부주석제도를 도입하면서 임시정부 안에 여당인 한국독립당 대표가 주석, 임시정부 안에 야당인 민족혁명당 대표가 부주석. 이렇게 권력을 나눠 갖는 겁니다.

◇ 정관용> 연정이죠. 연정.

◆ 이준식> 그러면서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김구 선생이 주석을 맡고 민족혁명당의 당숙이던 우사 김규식 선생이 부주석을 맡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에 오셔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시고 북한 가서 협상했는데 잘 안 되고 결국은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 과정은 저희들이 좀 알죠. 그러다가 49년에.

◆ 이준식> 암살되시죠. 김구 선생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정관용> 배후가 누군지? 안두희의 배후가 누구인지.

◆ 이준식> 안두희가 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과연 안두희가 단독범행을 저질렀겠느냐. 안두희의 뒤에서 봐준 사람이 있다. 최소한. 봐준 사람이 결국은 조정자 아니겠느냐라고 보는데. 안두희가 어쨌거나 사람을 죽였는데 거기다가 백범 김구 선생님 같은 민족지도자를 죽였는데도 사실 처음에 형을 살다가 바로 나옵니다. 그 풀어준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죠. 그래서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최종 지시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자료로 입증되는 얘기는 아닙니다.

◇ 정관용> 네. 오늘 짧은 시간이나마 이렇게 공부를 하고 최근에 시민들이 성금을 직접 모아서 김구 선생님의 조형물을 만든다. 지금 어떻게 추진되고 있습니까?

◆ 이준식> 젊은 청년학생들이 온라인에서 정말 제대로 된 김구 선생 조형물을 만들자고 캠페인을 벌였는데 한 달 정도 아마 모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3000만원 정도 걷혔습니다. 단순히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아니라 김구 선생으로 상징되는 독립, 민주, 통일을 다 아우르는 조형물을 세우자고 의견이 모아져서 그런 방향으로 작업을 추진할까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일본 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 만든 분들도 참여하신다면서요?

◆ 이준식> 3000만원이라는 게 굉장히 큰돈인 것 같지만 실제로 조형물을 만드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돈입니다. 다행히 해 주겠다. 일종의 재능 기부인 셈인 거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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