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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문학의 몫, 기억 위해 새로운 언어 고안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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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 평론가, '문학과 증언: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 발표

(사진=자료사진)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은 어떻게 반응했고,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문학평론가 김형중 교수(조선대학교 국문학과)는 15일 조선대 인문학연구원 주최의 학술대회에서 '문학과 증언: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를 짚었다.

김 교수는 아가멤논의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는 일이 문학이 할 일이라는 것, 기록과 기억을 위해 장르간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는 것이 문학의 몫이라는 점을 제시했다.

그는 아가멤논 벽화, 그라운드 제로 개념(폐허이자 새로운 출발점)을 끌어 들여 세월호 사건이 주는 충격의 강도가 어느 정도이고, 그 충격이 문학적 표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논지를 펼쳐나간다.

"1세기 경, 티만테스가 실화를 바탕으로 그렸다는 폼페이의 벽화 '아가멤논과 이피게네이아'에는 정작 아가멤논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티만테스는 희생 제의에 딸을 바쳐야했던 아가멤논의 고통이란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듯하다고 발표자는 해석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가멤논의 얼굴은 예술적 한계이자 무능력이었다. 물론 티만테스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는 세월호 이후 한국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들 건우를 잃은 노신자씨의 고통을 흔히 시나 소설이라 불리는 장르 체계 속에서 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인용하는 것 자체가 잔인하게 여겨지고, 정리된 인터뷰로조차 읽기 힘든 저와 같은 고통 앞에서 한국 문학은 80년 오월 이후 다시 한 번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아도르노의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충격이 초래하는 언어도단, 경악이 낳은 형용 불가'의 상황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말들의 기원이자, 다른 문학의 기원이기도 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발표자는 "이 글이 바로 그 '파괴되어 버린 문법' 위로 쏟아진 말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문학에 던지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정리해보려는 소박한 의도에서 쓰인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팽목항은 21세기 한국의 '그라운드 제로'라고 규정한다. 이 명칭은 9.11 이후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저자는 "국가와 법의 민낯이 드러난 곳, 그러나 새로운 주체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곳, 아무런 근거도 없는 폐허에 세워진 ‘하나의 장소’가 바로 팽목항이다."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문학을 일별해 보면 팽목항이 문학에 대해서도 그라운드 제로라는 사실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월호를 다룰 때, 언어는 시가 되지 못하고 소설은 차라리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작가의 노력이 불가피함을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사건은 문학을 무능력과 직면하게 하고, 재현불가능한 것을 국가나 법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로 재현하라고 요청한다. 요컨대 사건 이후 작가들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작업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어 "간단히 말해 문학이 겪어야 할 그 고초란 '아가멤논의 고통에 어떻게 표정을 부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그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숙고 없이 사건을 소재로 삼는 문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긴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는 아가멤논의 빈 얼굴에서부터 시작하는 '재현 불가능한 것들의 재현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발표자는 세월호 사건 이후 이를 다룬 르포와 논픽션이 대거 등장한 점에 주목하며, '르포‧논픽션'과 '시‧소설'의 장르별 특성이 각기 다름에 유의할 것을 환기시킨다. "요컨대 이런 말이 가능하겠다.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가 일종의 문학적 '기억술'이라면, 르포와 논픽션은 문학적 '기록술'이다. 논픽션에서 정보 상의 오류가 발견되는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소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 반대로 소설이 지나치게 정보만 나열할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논픽션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전자가 언어의 형식으로 애도의 종결을 지연시키려 한다면, 후자는 사실의 압도적인 힘에 의지해 사건을 기록한다. '르포‧논픽션'과 '시‧소설'이 같은 문학장 내에서 층위를 달리하는 하위 장르들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사건에 대한 문학적 증언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은 사실의 언어로 사건을 '기록'야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어느 시점 사건성을 상실하려 할 때, 불가능한 언어를 고안해 그것을 '기억'해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장르들 간의 협업과 겸업이지 한 편의 개업과 다른 한 편의 폐업은 아닐 것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인용한 내용과 시인 박형준이 세월호 참사로 죽은 아이들의 시점에서 쓴 글의 비교는 기억과 기록으로서 문학의 역할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김형중 교수는 이 글을 쓰면서 소리 내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울기만 많이 울었지만, 써낸 것은 졸고라고 겸사를 한다. 그럼에도 문학에 주어진 몫이 분명히 있고, 그게 무엇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재앙이 일상화되어가는 재난자본주의 시대에 문학은 항상 사건 앞에서 재현 불가능성과 마주치게 되고, 그때마다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럴 때 '대통령과 5분간 통화했으나 이후로 헤아릴 수 없는 긴 고통'을 겪고 있는 문종택씨의 '울음'을 기록하고, 사라진 지성이의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금의 사건을 기억해 내는 언어를 고안하는 것, 그것이 문학에 주어진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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