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세계 무대 결승에서..." 당구 천재 김행직(왼쪽)-김태관 형제가 최근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뱅킹샷 포즈를 취하고 있다.(인천=황진환 기자)
전 세계 당구 역사상 이런 형제가 또 있었을까. 세계 주니어 3쿠션 선수권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던 당구 천재 형제... 이들은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성인 무대로 나와 함께 세계 정상을 노리고 있다.
'당구 신동'에서 천재로 거듭난 김행직(24 · 전남당구연맹)과 5살 아래 동생 김태관(경기도연맹)이다. 형은 이미 최초로 세계주니어선수권 3연패 및 4회 우승을 달성했고, 동생은 지난해 형의 뒤를 이어 대회 정상에 올라 역대 최초 형제 우승의 역사를 썼다. 또 한 국내 대회에서 최초로 형제 동반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랬던 형제는 이제 나란히 세계 톱클래스 선수들과 제대로 맞붙을 채비를 마쳤다. 김행직은 지난해 말 군 복무를 마쳤고, 김태관은 올해 형의 모교 수원 매탄고를 졸업했다. 국내외 무대에 나서는 데 다소 불편했던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2016년 세계 정복을 노리는 당구 천재 형제를 그들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인천 계양구 '김행직 당구클럽'에서 만났다.
▲세계 최초 Jr선수권 형제 우승…체육회장배 동반 정상도
익히 알려진 대로 김행직의 이력은 화려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당구 신동으로 소문이 났던 김행직은 고교 1학년이던 2007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10년부터 3년 연속 이 대회 정상에 오르며 사상 최초로 4회 우승 대기록을 세웠다.
지난해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정상에 올랐고, 역대 최연소 국내 랭킹 1위에도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무엇보다 군 복무(공익근무요원) 중에 거둔 성과였다. 대회 출전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휴가와 복무 기관의 배려 등으로 근근히 얻어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4월 이집트 룩소르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거뒀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남자' 김행직은 최근 LG U+에서 3년 공식 후원 계약을 맺을 정도로 이제는 '당구 신동'에서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았다.(인천=황진환 기자)
이런 성과와 가능성을 인정받아 김행직은 국내 선수 중 최초로 대기업의 후원까지 받게 됐다. 거대 통신기업 LG U+로부터 3년 동안 공식 후원을 받는다. 한국 당구 사상 최초의 세계선수권 우승자 최성원(부산시체육회)과 조재호(서울시청), 강동궁(수원시청) 등 현재 국내 최고수들도 받지 못한 대기업 후원이다. 김행직의 현재도 빼어나지만 그 미래가 더 기대되는 까닭이다.
형에 아직 미치지 못하나 동생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김태관은 지난해 형의 뒤를 이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역대 이 대회에서 형제가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지난해 11월에는 한 대회에서 형제가 우승컵을 든 장면도 나왔다. 제 11회 대한체육회장배 전국대회에서다. 형인 김행직은 일반부에서 정상에 올랐고, 고교생이던 동생은 고등부에서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역시 한국 당구 최초의 진기록이었다. 이런 활약에 김태관은 지난 16일 대한당구연맹이 제정한 1호 '꿈나무상' 수상의 영예도 안았다.
▲"형이 미안했다" 달달한 당근보다 채찍일단 형의 마음은 뿌듯하기만 하다. 5살 터울, 결코 적지 않은 차이의 어린 동생이 힘겨운 경쟁을 이겨내고 선수로 자라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지난해 김태관의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결승 당시 김행직은 객원 해설위원으로 TV 중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김행직은 "동생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우승을 해서 벅차올랐다"면서 "웃음도 나고 정말 기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하다, 아우야' 지난해 세계주니어 3쿠션 선수권대회에서 김태관(오른쪽)이 우승을 차지한 뒤 경기 중계 해설을 맡았던 형 김행직과 기념 촬영을 한 모습.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김행직의 표정이 인상적이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원래 김행직은 경기 때나 우승 이후에나 무표정한 얼굴로 정평이 나 있다. 워낙 침착하고 내성적 성격이라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김행직이다. 김행직은 "내가 우승하면 너무 무덤덤해서 촬영 기자 분들이 제발 좀 웃으라고 부탁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그런 김행직이 그토록 기뻐했다면 동생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워낙 힘든 길이다 보니 칭찬보다는 질책을 하는 때가 더 많다. 당구는 어느 정도까지는 재미로 즐길 수 있으나 일반을 넘어 선수의 길을 걷는다면 피나는 훈련이 필수다. 김행직 역시 하루 10시간 이상의 훈련과 동영상 연구 등 10, 20대의 청춘을 다 바쳐 지금의 성과를 냈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김행직이기에 어린 동생에 엄격할 수밖에 없다.
김행직은 "형으로서, 당구선배로서도 먼저 길을 걸었다"면서 "그 과정을 아니까 과연 잘 이겨낼까, 잘 하겠지만 내가 겪었던 힘든 경험을 이겨낼 수 있을까 노파심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이어 "때문에 아무래도 달달한 당근보다 채찍을 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쓴소리를 많이 했다"면서 "노하우를 많이 가르쳤지만 좀 더 잘 되라는 마음에서 과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옆에 있던 김태관은 인터뷰에서 "맞기도 했다"고 고자질했지만 김행직은 "절대 말로만 했다"고 시치미를 뗐다.)
▲"형이 부러웠다" 늦었지만 가파른 상승세형은 동생에게 우상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부터 워낙 입상도 많고, 우승도 많았다. 구력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김행직은 당구장을 운영하던 집안의 영향으로 3살 때부터 큐를 잡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로 나섰다.
반면 김태관은 원래 당구를 멀리했던 터였다. 김태관은 "처음에는 당구가 싫었다"고 회상했다. "담배 연기도 많고 어른들도 싫었어요. 또 그 어린 나이에 형은 당구장에만 있었고, 나가서 뛰어놀 나이에 실내에만 있는 게 싫었죠."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김태관은 운명처럼 큐를 잡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또 당구 매니아인 아버지(김연구 씨)의 권유로 당구를 치다 재미가 들렸고 중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도 언젠가 형처럼 되고 말 테야' 김태관이 아버지가 형의 이름을 따 운영하고 있는 '김행직 당구클럽'에서 매섭게 공을 노려보고 있다.(인천=황진환 기자)
그런 과정에서 형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됐다. 김태관은 "당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점점 알아가는 과정에서 형이 정말 대단하구나 힘든 과정을 이겨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강훈련이 고되다는 것을 안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재미도 있었지만 동생으로서 오기도 있었다. 김태관은 "형이 너무 부러웠고, 계속 명예가 붙으니까 샘도 났다"면서 "나도 저렇게 돼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형이 개척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원 매탄고 당구부에 김태관이 진학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구 역사 최초의 형제 결승, 꼭 한번 해야죠"그렇다면 지금 실력은 누가 더 위일까. 아직은 '형 만한 아우는 없다'는 속담이 맞겠으나 '청출어람'이라는 성어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란다. 김행직은 "옛날에는 내가 많이 이겼는데 지금은 비슷비슷하다"고 귀띔한다. 일반부와 학생부로 나누어 출전했기에 공식 경기에서 아직 한번도 맞붙지 않았는데 올해 형제 대결이 가능해졌다.
사실 형제의 구력은 1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김행직은 15년 정도 큐와 살았지만 김태관은 불과 당구 입문이 4년 남짓이다. 이런 가운데 비슷한 실력이라면 김태관의 학습 능력과 성장세는 놀랍기 그지 없는 셈이다.
다만 형이 보기에는 모자란 점이 수두룩하다. 김행직은 동생에 대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시작이 늦으니까 구력이 짧다"면서 "그래서 능숙하게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하는 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내 코가 석자지만 기본적인 것, 1차적인 것만 보완하면 세계적인 선수로 갈 잠재력이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YouTube 영상보기] [무료 구독하기] [nocutV 바로가기] 형의 평가에 대해 김태관은 "영광이다. 당구 선수로서 정상급 선수가 평을 내려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형에 대해 "너무 탄탄한 선수"라면서 "승부처에서 무너지지 않는 부분들이 100년 된 소나무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10년 된 작은 소나무"라고 겸손함을 드러냈다.
이어 "나는 경기 중 활발하게 움직여야 잘 하는 스타일인데 형은 일단 스타트를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템포를 유지한다"면서 "승부처에서 마음이 급하거나 생각을 잘못할 때도 있는데 형을 보면 경기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장점을 평가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면 서운하다. 김태관은 "형이 지금은 높이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도 드러냈다.
특히 세계 정상에서 형제가 맞붙을 꿈을 항상 꾸고 있다. '당구 황제' 토브욘 브롬달(스웨덴)과 '인간 줄자'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등 이른바 4대 천왕을 비롯한 세계 강호들과 대전해왔던 형은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며 신중한 표정이지만 아직 패기가 넘치는 동생은 "세계선수권이나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면서 "신기할 거 같고, 당구 역사상 없는 일이니 꼭 한번 해야죠"라고 눈을 반짝였다.
과연 두 형제가 우승컵을 놓고 격돌하는 새 역사가 쓰여질 수 있을까. 왠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만 같다. 이 둘은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성장하는 형제니까. 이들처럼 절차탁마해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는 선수들도 드무니까. 천재의 피는 혼자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