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래퍼들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하지만 '악마의 편집'이 판을 치는 프로그램에서만 이들을 보기에는 뭔가 아쉽다. 그래서 준비했다. 래퍼들과 직접 만나 근황과 생각을 들어보는 '힙합 릴레이' 인터뷰. 네 번째 주인공은 딥플로우가 지목한 일리닛이다. [편집자 주]
일리닛 'Made In `98' 앨범재킷
일리닛(illinit, 본명 최재연)은 지난달 정규앨범 'Made In `98'을 발매해 힙합 리스너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홍보도, 방송 출연도 없었지만, 이전보다 한층 발전된 랩 실력과 신선한 음악이면 충분했다. 서서히 입소문을 타며 대박이 났고, 당초 디지털 음원으로만 발매됐으나 CD로도 제작됐다.
유독 완성도 높은 힙합 앨범이 많았던 2015년. 일리닛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방점을 제대로 찍었다. 사실 그는 인지도에 비해 구력이 상당한 래퍼다. 국내 힙합씬에 첫 발을 들인 건 지난 2001년. 대학 졸업, 군 복무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진 못했으나 MC스나이퍼가 이끄는 크루와 레이블에 오랜 기간 몸 담으며 나름의 존재감을 쌓았다. 스나이퍼 품을 떠난 뒤 한동안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진 일리닛은 이번 앨범을 통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총 11곡이 담긴 'Made In `98'은 학창시절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최재연 혹은 일리닛이라는 인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세밀하고 촘촘한, 재치있는 가사로 풀어낸 앨범이다. 무엇보다 일리닛의 감칠맛 나는 랩스킬 덕에 앨범을 통째로 들어도 지루함이 없다.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앨범을 만들어낸 일리닛을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
Q. 반갑다. 근황부터 전해달라.
최근엔 주로 CD 발매 준비에 시간을 보냈다. CD를 찍어낼지 고민이 많았는데, 음원 발매 이후 반응이 좋아서 확신이 생겼다. 무엇보다 이번 앨범을 내가 CD 형태로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앨범 디자인, 페이지 소개 속지 하나하나 신경을 많이 썼다. 마무리가 잘 되서 판매에 들어갔으니 이제 내 손을 떠났다. 그 외 음악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피처링 제안도 꽤 들어왔다.
Q. 딥플로우가 당신을 지목했는데.굉장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아티스트다. 친해진 건 1~2년 전이다. 이번 앨범에 굉장히 큰 영감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곡 작업하면서 피드팩도 부탁했었다. 딥플로우가 인스타그램에 앨범 홍보도 해줘서 고마웠다.
Q. "나이가 꽤 있는데도 불구하고 랩 스타일을 이전보다 세련되게 발전시켰다"는 딥플로우의 평가에 대해선.잘 봤다는 생각이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도 해준 적이 있다. 이번 앨범을 계기로 날 처음 알게 된 분들도 있더라. 사실 중간중간에 냈던 앨범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3년 전부터 무르익는 단계가 됐지. 언제나 멋지고, 신선하고 싶고, 또 랩 하는게 항상 재미있어야 하니까 실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Q. 어떤 점이 달라졌나.
과거엔 보여주기 위한 랩을 했다. '나 랩 잘해'라는 느낌으로. 어느 순간 그런 랩에 싫증이 났고, 내가 말할 때의 목소리가 아니어서 가짜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점점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내 진짜 목소리와 성격이 음악에 묻어나더라. 리스너들도 그런 음악을 더 좋아 해주시고.
Q. 일리닛의 랩스타일을 설명하자면.'완급조절'이 있는 랩을 선호한다. 엇박을 치기도하고, 숨을 쉬지 않고 내뱉기도 하는 다이나믹함도 추구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건 글이다. 가사를 쓸 때 스스로 자랑스러워야 하고, 들었을 때 재밌어야 한다.
Q. 커리어를 한 번 되돌아보자. 랩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됐나.4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고, 초딩학교 졸업할 때 다시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는데, 내성적인 성격이여서 뭔가 혼란스러웠다. 그때 듣게 된 힙합은 나에게 '슈퍼 히어로' 같은 느낌이었다. 센 가사를 들으면 내가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지.
그러다 아버지 일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미국으로 갔다. 집에 돈이 많아서 유학을 간 건 아니었고, 좁은 단칸방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미국에서 힙합이 황금기였는데, 나도 자연스럽게 힙합 음악에 더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도 슈퍼 히어로 같은 래퍼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지.
Q. MC스나이퍼가 이끄는 힙합크루 '붓다베이비'의 일원이기도 했지.고등학교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베스핏'이란 듀오를 결성했다. 당시 한 힙합 페스티벌에 출전했는데, 그때 MC스나이퍼를 처음 만났다.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게 됐고, 1~2년 정도 지나니 하나의 크루가 형성되어 있더라.
Q. 그게 2001년 이야기 아닌가. 연차에 비해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은 편인데.맞다. 그땐 난 대학생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MC스나이퍼, 배치기 등과 가끔 공연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내 앨범을 만들고 있진 않았다. 그냥 이태원 인근에서 맨날 술 마시고 생각 없이 지냈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 한심했지. (웃음). 그땐 '난 랩 잘하니까 언젠가 잘 되겠지' 라는 생각이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2009년쯤이 되어서야 스나이퍼사운드와 정식 계약을 했다. 그리고 미니앨범, 정규앨범을 냈었지.
Q. 기억난다. 첫 정규 앨범 발매 후 케이블 음악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었나.하하.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굉장히 이상한 경험이었고 내가 마치 광대가 된 느낌도 들었다. 방송 무대를 즐기면서 하는 분들을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닫기도 했고.
Q. 2013에 스나이퍼사운드를 떠났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MC스나이퍼가 앞선 릴레이 인터뷰에서 '그들이 나간게 아니라 보내준 것'이라고 표현하셨더라. 그 말이 맞다. 개인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와 방송 활동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고, 아버지 눈치를 보듯 회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회사와 내가 서로 미안해하는 상황. 그걸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MC스나이퍼에게 '죄송합니다. 잠깐 음악을 쉬고 싶습니다'라고 했었지. 일단 모든 걸 끊고 내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나는 누군지라는 고민이 필요했던 시기다.
Q. 요즘은 혼자 음악하는 건가.지금은 '팩토리보이 프로던션'이란 힙합 레이블에 속해있다. '페임제이'가 대표고, 그 외 일레븐, 릴샴, 씨엠와이케이 등 래퍼들이 속해있다.
Q. 이번 앨범 이야기를 해보자. 반응이 상당히 좋던데.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웃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줄 거라고 생각 못 했고 앨범을 완성하기 바빴다. 작업하면서 느낌은 굉장히 좋았다. 한 곡 한 곡 즐기면서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앨범이라서 애착이 간다.
Q. 홍보도 제대로 안했던 걸로 아는데, 비결이 뭐였을까.홍보도 없었고 사실 묻힐 뻔했다. 그런데 SNS를 통해서 입소문을 타면서 반응이 왔다.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동료 아티스트들이 '앨범 좋다'는 글을 올려준 거지. '일리닛이 누구길래 우리 오빠가 멋지다고 하지?'란 생각으로 내 앨범을 들어본 것 같다. 하하. 굉장히 고마웠다. 앨범 듣고 자극이 많이 됐다는 연락도 꽤 받았다. 내가 이렇게 멋진 걸 했었나 싶어 기분이 좋더라.
Q.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었나.올해 2월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앨범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미친듯이 곡을 작업했는데, 'Made In `98'이라는 하나의 줄기가 완성되더라. 과거, 현재, 미래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거지.
Q. 앨범명 'Made In `98'의 의미는.뜻을 풀이하면 '1998년산'이라는 건데, 내가 일리닛이라는 활동명을 지은 게 1998년이다. 그 작은 선택이 날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니까 중요한 시발점 같은 거다. 어찌보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당시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최대한 세밀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Q. 그러고보니 일리닛은 무슨 뜻인가.'ill'이라는 단어가 원래는 '아프다'는 뜻이지만, 슬랭(속어)으로는 '죽여준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걸 1998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었는데 뭔가 멋있어 보이는 거다. 그렇게 'illinit(일리닛)'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는데 글씨로 썼을 때도 예쁘고, 입에도 잘 붙더라.
Q. 다시 앨범 이야기로. 딥플로우 앨범 '양화'를 듣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고.딤플로우 앨범 자체에 영감을 받았다기 보단, 그 사람이 해준 말과 한 길을 묵직하게 걸어온 커리어에 영감을 받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딥플로우에게 '내가 어떻게 음악을 하면 좋을 것 같느냐'고 물었는데, '형은 정규앨범을 꼭 하나 내야한다. 그래서 실력을 제대로 한 번 보여주라'고 해주더라. 사실 내가 국내 힙합신에서 입지를 제대로 다지지 못한 '중고' 같은 느낌 아닌가. 딥플로우의 말을 듣고 이번엔 꼭 정규 앨범 하나 만들자고 다짐했었지.
Q. 간략한 앨범 소개가 참 인상적이었다. ('일리닛'이라는 항상 자유로운 존재는 '98년에 탄생했고 때론 backpack에 beer를 넣어 다닌다고 한다.)
하하. 어차피 그건 읽는 사람들만 읽으니까 느낌만 주는 문장만 쓰고 음악을 한 번 들어보라는 뜻이었다. 앨범 소개를 쓰라고 해서 쓴 건데 정말 편하게 썼다. 큰 의미는 없고, 타이틀곡 가사를 살짝 인용했지.
Q. 정식으로 한 번 소개해달라.1번부터 11번 트랙까지 하나의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시간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 1번 트랙부터 끝까지가 총 38분 18초다. 앨범을 다 들어보면 일리닛이라는 사람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게 될 거다. 꼭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봐야 느낌을 알 수 있는 앨범이다.
Q. 타이틀곡을 'Beer In My Backpack'으로 정한 이유는?그게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른 트랙은 옛날의 나, 미래의 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거고. 'Beer In My Backpack'이란 곡의 감정은 온전히 나와 연결되어 있다. 정말 실화고, 길에서 걸어가면서 가사를 썼다.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인 맥주를 사고 집에 돌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거지. 작업할 때부터 당연히 이 트랙을 타이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
Q. 맥주를 참 좋아하나 보다. 곡 작업을 할 때도 술을 마시는 편인가.그렇진 않다. 맨 정신에 쓴다. 술먹을 때 가사쓰면 그땐 멋져보이지만, 다음날 일어나서 다시보면 '꽝'이다.
Q. 앨범 재킷도 인상적인데.1998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진이다.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 재킷 속에 앉아 있는 그 남자애는 아직 래퍼는 아니고 양아치가 되고 싶어하는 착한애다. 계속 그렇게 뭐가 불만인지 지금보면 참 웃기다. 패기있는 모습이 가끔 부럽기도 하고.
Q. 연차도 꽤 됐고, 앨범 반응도 좋다. '대체 왜 안뜨냐'는 댓글이 많더라.못 뜰만 하니까 그런 거다. 하하. 사실 내 안에는 유명세에 대한 두려움이 같은 게 있다. 그러면서도 내 음악을 더 많은 사람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유명해져야 더 많은 사람이 내 음악을 듣는 건데, 뭔가 모순적인 거지. 유명해진 이후 악성 댓글로 힘들어하는 동료를 보면 더욱 그렇다. 난 그들처럼 신사적으로 대응하고 잘 견뎌낼 자신이 없다. 불편함을 잘 못 견디는 성격이기도 하고. 영원히 이렇진 않을 거고, 치유될 수 있겠지. 결론적으로는 아직 내 실력과 내공이 부족한 것 같다.
Q. '조금만 가면돼'란 곡도 있지 않았나. '조금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질문을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대답을 못 해줬다. 그냥 자유롭게 내가 하고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단계로 간다는 의미를 담아 가사를 썼던 것 같다. 내 기준 안에서의 성공을 말한 거다. 성공, 돈, 명예 이런 거 말고 내 음악을 자유롭게 하는 거.
Q. 요즘 힙합씬에 대한 생각은.특별한 생각이 없다. 예전엔 그런게 있었는데, 지금은 어차피 내가 뭐 혁명을 일으켜서 힙합씬을 바꿀 것도 아니니까. 그냥 퀄리티 있는 내 음악을 만들어내자는 생각뿐이다. 아까부터 내가 너무 재미없고 진지했나? (웃음).
Q. 일리닛을 대표할 만한 곡을 추천해달라.가장 최고는 이번 앨범이다. 그걸 제외하면, '조금만 가면돼'가 들어있는 믹스테잎 전곡, '나와 같은지', 일레븐이라는 친구와 낸 '에어본(Airborne)'이란 곡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곡들이다. 물론 모든 곡이 다 애착이 가지만, 꼭 꼽아야만 한다면, 또 일리닛이라는 래퍼을 알릴 수 있는 곡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두 곡과 하나의 믹스테잎을 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