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자료사진)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87년 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한국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 변모했을 것이고, 정치는 지금보다 더 선진화됐을 것이다. 최소한 상생과 화합·협의의 정치는 자리잡았을 것이다. 당연히 지역감정의 골이 지금처럼 깊게 패이지 않았을 것이며 호남과 부산·경남·울산(PK) 지역민들 간의 지역감정은 크게 완화됐을 것이다.
통합과 화합을 무기로 한 민주화 세력이 한국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권위주의 시대 인물들의 퇴장이 앞당겨졌을 수밖에 없다. 빨랐을 것이다. 정치 지형 또한 크게 바뀌었을 것은 분명하다. 영남 전역을 정치적 텃밭으로 하는 지금의 새누리당은 없다. 물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종하는 새정치민주연합도 없다. 대신 정통 민주당을 간판으로 하는 정당이 존재할 뿐이다.
새누리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7년 12월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하고 난 뒤 대통령이 되고자 1990년 1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후신이다. 민자당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당명만 바꾼 것이다.
지금과 같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일방적인 정치 지형은 3당 합당(야당은 '야합'이라고 지칭)으로 파생된 결과물이며 그 폐해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분열과 보수와 진보의 극심한 대립, 호남 고립주의로 일컫는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
YS와 DJ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둘 도 없는 동지였으나 대통령을 눈 앞에 두고서는 불구대천의 숙적 관계였다. 둘의 공생관계는 87년 후보단일화 실패로 갈라선 이후 종지부를 찍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인 지난 2009년 8월 세브란스병원으로 DJ의 병실을 찾아 문안했다. YS는 병문안을 마친 뒤 "화해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2009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자료사진)
표면상으로는 양김의 화해였다. 며칠만 빨랐어도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통합과 화해를 외쳤을 수 있었을 것을, 말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 한 DJ를 병실에 둔 YS의 일방적인 화해 멘트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15년 11월 22일 YS도 DJ가 갔던 그 영면의 길을 따라갔다.
양김 씨는 87년 후보단일화를 위해 만났으나 서로 후보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갈길로 갔다. 양김은 재야시민단체 대표들이 단일화를 위해 만든 고려대 집회에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YS는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DJ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나섰다.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보기 좋게 졌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겼고 대구·경북(TK)의 노태우, 부산·경남(PK)의 김영삼, 호남의 김대중, 충청의 김종필로 좁은 땅덩어리가 4분화 됐다.
양김 단일화의 일화다. 김경재 씨는 1987년 12월 선거 이틀 전(16일) 특보단 8명이 DJ의 동교동 지하실에 모였다고 회고했다. 사전에 DJ로부터 "특보단 8명이 만장일치된 의견을 가져오면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내락을 받고 난상토론을 거쳤다. 양김이 독자 출마하면 필패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며 후보직 사퇴를 반대하는 특보들을 설득했다고한다.
DJ 특보인 이문영 전 고대교수만이 'DJ의 후보 사퇴-YS 지지'라는 결정을 반대했다고 김경재 씨는 말했다. 이런 결정 과정을 알고 반대파들이 동교동에 들이닥쳐 결사 반대를 하는 바람에 DJ의 후보 사퇴는 무위로 그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DJ 진영에서는 YS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DJ는 나이로 보나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보나 YS가 양보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지자들 중에서도 YS에게 양보하고 다음 차례에 대통령이 되는 게 좋다는 의견이 있음을 알고 고민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은 막판에 결단을 내리지 못해 갈라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고 조영래 변호사는 87년 양김 단일화 실패를 보고난 이후부터 정치를 멀리했다고 한다.
(사진=자료사진)
DJ가 87년 YS에게 양보했다면 그 다음 대통령이 됐을까? 역사의 가정이란 극히 무모하고 부질없는 일로, 할 일 없는 자들의 상상의 나래라고 한다. 그렇지만 YS를 이어 DJ가 대통령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을 보면 어떻게든 YS·DJ는 대통령이 됐을 것 가능성이 컸던 것 같다. 역사적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 민주화운동 지도자의 대통령 시대를 5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지금처럼 찢기고 갈라진 정치 현실을 애석해 하는 정치인들과 전직 의원들은 87년 양김의 단일화 실패를 통한의 아픔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역사 발전의 '순리'였다면 모를까, '역리'였다면 노태우 정권의 5년은 허송세월이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을 이용한 천문학적인 부정축재는 없었을 것이며 정경유착의 고리도 좀 더 일찍 끊어졌을 것이다.
이제 김영삼 전 대통령마저 하늘나라로 갔다. 6년 전 DJ처럼 그도 말없이 떠났다. 한국 현대사의 장엄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만큼이나 '통합'과 '화해'라는 큰 숙제를 현 정치권에 던졌다. 생전에 자신도, DJ도 이루지 못한 숙제를 '유언'으로 남기고 사라졌다. 통합을 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던 것 같다.
이 유언은 살아 있는 정치인들의 '숙제'이자, 풀어야 할 '정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라. 과연 그런 정치인이 있긴 한가?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현 정치인들도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과연 누가 될까, YS가 눈을 감기 전 주창한 '통합·화해'의 정치를 실현할 재목으로 떠오른다면 그는 차세대 한국의 지도자로 부상할 것이다. 지나친 단정일지 모르지만 '정답'은 그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