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에손의 작은 마을 실리마자랭시에 사는 무슬림 아이차 타바케는 아이 학교에서 온 급식 관련 질문지를 작성하다 잠시 당황했다. 보통 돼지고기를 먹는지 체크하는 항목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시청에 문의했더니 "이제부터는 돼지고기를 먹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먹거나 둘 중 하나"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프랑스 학교 급식 메뉴
학교 급식의 돼지고기 메뉴를 둘러싼 프랑스 내의 문화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 학생들에게 제공되던 대체 메뉴를 폐지하는 학교가 잇따르면서 이것이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의 실천인지, 아니면 단순히 종교적 편협함인지를 두고 논란이 거세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프랑스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재량으로 학교 급식 규칙을 제정할 수 있게 돼 있다. 이슬람이나 유대인 율법에 맞는 메뉴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는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는 그런 규정이 없지만,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에는 무슬림 학생들에게 대신 칠면조 고기나 다른 채소 요리를 제공해왔다.
실리마자랭시도 지난 30년간 무슬림과 유대인 학생들에게 돼지고기 대체 메뉴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음 달부터 대체 메뉴를 없애기로 하면서 앞으로는 돼지고기 메뉴가 나오는 날 무슬림 학생들은 사이드 메뉴만 먹게된 것이다.
우파 정당인 공화당 소속의 실리마자랭 시장은 "공공부문의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상식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좌파 정치인들이나 학부모, 교사들은 학교 급식에까지 정치 논리를 적용해 이슬람 낙인을 찍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타바케는 "4살 짜리 딸은 너무 어려서 자신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조차 못했다"며 "그런데 최근 들어 뭔가 달라진 걸 눈치 채고 울면서 급식을 안 먹겠다고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돼지고기 급식'을 둘러싼 프랑스 내의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초 부르고뉴의 샬롱쉬르손시가 학교 급식에서 돼지고기 대체 메뉴를 없앤다고 발표했고, 이에 반발해 이슬람단체가 제기한 소송에서 1심 법원은 샬롱쉬스손 시의 손을 들어줬다.
프랑스에는 과거 식민지 시절 알제리, 튀니지 등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교도가 전체 인구의 9%에 달하면서 문화 충돌 현상이 자주 발생해왔다.
전통적으로 타 종교를 인정하는 '톨레랑스'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지난 1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등을 겪으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프랑스어로 '라이시테'로 불리는 세속주의 원칙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우파를 중심으로 커진 것이다. 세속주의는 이슬람을 비롯해 '프랑스적'이지 않은 것을 배척하려는 극우파들이 가장 즐겨쓰는 말이 됐다.
사회학자 프랑수아 두베는 "세속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백인 기독교인인 프랑스인이 '우리는 무슬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이 됐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교 교장은 "세속주의는 돼지고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라며 "학교는 학생들에게 어떤 차이에도 서로를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돼지고기 대체 급식 폐지는 우리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