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로몬은 쓸모있는 것만을 '즐겨찾기' 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신조어' 입니다. 풍부한 맥락과 깊이있는 뉴스를 공유할게요. '쓸모 없는 뉴스'는 가라! [편집자 주]최근 한장의 사진(박정희 위인전 34쪽/(주)학원출판공사)이 SNS에서 화제를 끌었습니다. '박정희 위인전'의 한 대목을 문제삼은 건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더 큰일을 하기 위해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만주로 갔어요"
교과서도 아닌 삽화가 들어간 '어린이용 위인전'인데다 해당 책은 2000년에 절판된 것인데, 갑자기 왜 이 '짤방'이 떴을까를 유추해보다가 아마도 최근 국정 교과서 사태와 맞물려 '역사 왜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한창 논란이 됐을 때 누군가는 이 책이 '옛날 교과서'라고 주장해 논란을 더 키우려고 했지만, 해당 책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냥 민간에서 만든 '어린이 위인전'의 일부였습니다.
여기서 퀴즈입니다. 밑줄 친 ①②③④중 올바르게 기술된 곳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기사 제일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① 박정희는 나라를 위해 더 큰일을 하기 위해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만주로 갔어요여기서 '나라'는 어디일까요? 위인전만 보면 '대한민국'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일본'이 맞습니다.
훈도 박정희가 혈서 지원을 했다는 내용을 전한 만주신문 기사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29일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으로부터 군관지원서,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목숨 바쳐 나라를 위함 박정희"라는 혈서도 보내계원을 감격시켰다"
이어 만주신문은 훈도(교사) 박정희가 보낸 편지의 내용도 소개했는데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개와 말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이 편지에도 불구하고 징모과는 박정희의 지원을 정중히 거절했지만, 같은 해 10월의 재도전에서 박정희 훈도는 당당히 합격하게 됩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다카키 마사오'로 이름을 바꿉니다.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은 더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훈도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서를 냈던 1930년대 후반은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1930년대에는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고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면서 조선인 항일 투쟁의 흐름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만주에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던 반일 무장 투쟁은 거의 소멸되다시피했는데요. 독립 가능성에 회의를 갖게 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거죠. 이같은 상황은 조선내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선 내에서도 일제에 대한 투항이 급격히 진행되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경례를 하고 있는 박정희
② '일본은 곧 망할 것이다' 박정희는 마음 속으로 이런 믿음을 가졌어요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편입을 합니다. 일본육사 생활은 모범적이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 육사 교장이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일본 육사 시절의 박정희
더 나아가 다카기 마사오 소위는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개명을 합니다. 완전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셈입니다.
일본 육사 졸업후 1944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중국의 열하성 흥륭현 삼도하의 만주군 제5관구 보병 제8단에서 근무했습니다. 이 부대는 일제가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였습니다.
③ 박정희는 광복군에 들어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훈련을 쌓았어요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박정희가 광복군에 들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평진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습니다. '천황폐하에게 충성하던 장교'가 광복군으로 둔갑한 순간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실제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했을 뿐,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습니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俘虜)관리처'인 것도 이를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이에따라 박정희가 해방이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이념과 정신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보신책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광복군이 해방이후 국내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중국에서 해방 후 귀국을 모색해야하는 처지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요?
④ 박정희는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어요박정희는 1946년 광복군과 함께 입국한 후 조선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2기로 입교해 국군 장교의 길로 들어섭니다. 단기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그해 12월 졸업과 함께 소위가 됐고 이듬해 38선 경비를 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