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강호.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배우 송강호는 충무로에서 이름 세 글자 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영조든, 인권 변호사든 아니면 또 다른 누구든.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들로 살아가며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사도'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본인 나이보다 서른 살 가량이나 많은 조선의 군주 영조. 송강호는 아버지와 군주의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그 간극을 자신의 기량으로 채워나갔다.
송강호의 영조는 사람이다. 그래서 매정하고 얄미우면서도, 어느 순간 고독한 군주를 향한 측은한 마음이 샘솟는다. 만약 그가 진정성을 담아내려 하지 않았다면 '인간적'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지만, 배우 송강호 역시 사람이었다. 스크린을 벗어나면 그는 역사를 좋아하고, 50대를 목전에 둔 평범한 아버지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다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목소리에 에너지가 넘쳤다.
인터뷰 내내 송강호는 어떤 질문에도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확실한 주관과 생각을 꺼내 보였다. 그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저력은 그토록 단단한 바탕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송강호가 이야기한 영화 '사도'와 그의 삶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봤다.
▶ 영화 '사도'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을 것 같다.
- 우리들은 크게 고무돼 있는 상태다. 사실은 조마조마하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감상하는 게 아니냐. 다행히 예상보다는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아쉬운 결과가 나오면 또 아쉬운 대로, 그런 게 아니겠나. (웃음) 물론 스태프들도 그렇고, 고생한 사람들이 많아서 잘되면 좋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진심을 담아 영화를 만들어서 그 진심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기만 해도 기본적인 목표를 이룬 거다.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 사도세자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꽤 있었다.- 다 아는 이야기라서 어떨지 제일 큰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이준익 감독이 임오화변(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영화적 장치로 꾸미지 않고, 정공법으로 이야기를 다룬 것이 가장 매혹적인 부분인 것 같다. 그런 것 때문에 선택하기도 했다. 관객들이 드라마를 통해 사도세자 이야기를 많이 접했지만 영화는 1956년에 '사도세자'라는 영화 이후 60년 만이다. (웃음)
▶ 그럼 본인이 생각하는 '사도'만의 승부수는 무엇인가.- 저희는 정치 역학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기 보다는 군주인 아버지와 세자인 아들, 부자지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관객들이 더 잘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큰 본질은 아니지 않나 싶다. 저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인 것 같다.
배우 송강호.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제작보고회부터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담아내려 했다고 들었다.- 재해석을 하게 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더 주관적인 느낌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많은 장면과 대사들이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것이다. 100% '팩트'가 아니라 90% '팩트'라고 했던 이유는 영화 속 상황은 역사와 똑같은데 대사의 시점이 다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장소와 시간에 한 이야기가 아니었을 뿐, 해당 대사도 영조와 사도세자가 나눴던 이야기는 맞다. 이 영화에는 제 애드리브가 단 한 마디도 없다. 그것이 영화의 궁극적 목표다. 미화나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포장하지 말자. 그래서 일반적인 사극과 달리, 세트 같은 것도 화려하고 풍성하게 하지 않았다.
▶ 영조가 툭툭 뱉는 현대어와 가까운 대사들도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그 대사들이 실제로 영조대왕이 했던 말씀들이다. 우리 속에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보이지 않는 고정관념이 있다. 관객들은 수십 년 동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왕은 저럴 것이고, 왕의 말투는 저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고증을 해보니까 물론 어려운 고어도 있지만 왕도 편하게 이야기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더라. 저희가 일부러 그런 대사를 쓴 것은 아니다.
▶ 영조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연령에 맞게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를 했다. 사실 외모는 특수 분장을 하면 되지만 노회한 정치가이자 외로운 군주인 영조의 일면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평생 개인적 콤플렉스로 고통 받아왔던 군주의 탁하고 삭막한 정서랄까. 특수 분장 가지고는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걸음걸이나 손짓, 언어의 전달에 집중했다. 언어에서 영조대왕의 인생이 묻어 나길 바랐다. 어쩔 수 없이 목을 좀 학대했다. 세트장이 전북 부안 바닷가 옆에 있었는데 공기도 좋고 자연 풍경이 좋다. 세트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목을 만들었다. 유아인 씨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서 괴성이 들리면 내가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스태프들이 다 알고 '(송강호 씨) 왔다'고 그랬다더라.
▶ 영화를 보면 영조가 너무 엄격하고 매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장면에서는 저도 좀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잘하자'고 칭찬하다가 갑자기 돌변하다니. 그런데 알고 보니 대리청정도 12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에 기대와 희망을 걸었지만 점점 실망하고 좌절까지 겪는 그 12년이 이틀로 함축된 것이다. 사실 어떻게 자기 친아들이 미울 수가 있겠냐. '네가 세자가 아니고 내가 왕이 아니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겠냐'는 대사가 영조의 변명 같지만 절절하다. 군주라는 것이 그만큼 행복만 있었던 게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자리라고 생각한다.
▶ 송강호가 바라본 사도세자는 어떤 인물인가.- 사도세자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얽매인 형식보다는 좀 더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것 같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도 권위가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살도록 정치하고 싶었던 분이 아닌가. 영조대왕은 사도세자에게 네 말이 맞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거고.
배우 송강호.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영조 캐릭터는 평생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까다로운 캐릭터인데, 충분히 납득은 됐나?- 영조 역할을 맡아서 그런 게 아니라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 저는 영조대왕이 왕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남모를 고통과 자기만의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영조대왕의 과거가 보이는 것이 대비인 인원왕후와 대립하는 장면이다. 영조대왕은 인원왕후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윤허 받았지만 인원왕후는 영조의 친어머니가 아니다. '왕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냐'는 그 대사에는 생모에게 보다 더한 고마움이 느껴진다. 겉으로는 소리를 쳐도 눈빛을 보면 인원왕후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 어머니가 천한 무수리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콤플렉스가 신분을 중시하는 당대 사회에는 얼마나 크게 작용했을까. 수많은 사대부들과 백성 앞에서 떳떳한 정통성을 가지는 것. 그것이 영조가 평생 갈구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항상 사도세자를 꾸짖는 영조대왕에게도 그런 나약한 감정이 있다는 게 느껴져서 그 장면이 참 좋다.
▶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 영화 때문에 따로 역사 공부를 했나.- 이전까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것만 알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작품을 하면서 세세하게 알게 되고 느끼게 됐다. 다시 대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다. 특정한 시대나 인물이 궁금한 건 아니고 역사 전반에 흥미가 있고 호기심이 많다. 책을 읽어도 대부분 역사와 관련된 책을 본다.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다.
▶ 사도세자 역할의 유아인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난다. 유아인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장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고 하더라.
- 보통 배우들이 촬영이 끝나면 숙소로 가니까 가볍게 맥주 한 잔 한다. 그런데 유아인 씨는 숙소에서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더라. 처음에 나한테 '선배님은 (숙소에서도) 잘 주무시냐'고 물어봤다. 그러면서 자기는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유아인 씨는 멀어도 집까지 왔다 갔다 했다. 사실 되게 피곤했을 거다. 그렇다 보니 술 마신 기억이 회식 때 빼고는 없다. (웃음)
▶ 영화 속에서는 갈등하고 대립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어땠나?- 저와 유아인 씨의 공통점이 낯을 가린다는 거다. 제가 현장에서 이야기도 많고 그럴 것 같지만 말도 없고 굉장히 조용하다. 감독과 대화도 별로 없다. 일단 인위적이고 형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걸 싫어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런데 유아인 씨는 너무 편하더라. 아인이도 저와 비슷해서 '참 편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에야 다 끝나고 회식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얘기했다. 영조와 사도가 되어버렸다. (웃음) '우리는 어찌 개봉을 앞두고 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유아인 씨도 처음에는 좀 무서웠는데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
배우 송강호. (사진=박종민 기자)
▶ 유아인 또래의 젊은 후배들이 많다. 선배로서 생각하는 배우 유아인은 어떤가.- 영화 '완득이' 때 보고,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얼굴도, 연기력도 매력 있는 느낌? 사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많은데 매력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드물고 귀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기술시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김윤석 씨만 오고 유아인 씨는 없더라. 그래서 그 친구는 안 오냐고 물었더니 급한 손님이 있어서 못 왔다고 했었다. 그 이후에 이 영화로 만난 거다. 저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배우로서의 감각과 촉이 살아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
▶ 그 동안 수많은 감독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이준익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첫 대본 리딩할 때, 인사하는 자리에서 감독님이 '결과도 중요하지만 영화 촬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행복하게 하자'고 말했었다. 그래서 저는 장난으로 '저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고 이야기했다. (웃음) 쫑파티 때도 똑같이 인사를 하는데 그 때 제가 '이 작품을 하면서 과정이 결과를 지배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너무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정도로 편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다. 정말 즐거웠다.
▶ 이준익 감독만의 스타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 일단 미장센이나 형식미 등 예술적 터치보다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 '소원', '라디오 스타' 등 전작들도 그랬다. 그런 점이 참 좋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표현해 낸다. '사도'가 이준익 감독님의 전작과는 많이 다른 문법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제가 감독님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 분이 감독으로서 가진 모든 것들이 다 녹아 들어갔지 않나 감히 이야기해본다.
▶ 실제로 어떤 아버지인지 궁금하다.- 무뚝뚝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경상도 남자들이 그런 면이 있다. 토종 경상도 남자들 기질 자체가 그렇다. 그래도 속정이 깊다고 해야 되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대화가 필요해' 코너가 좀 비약된 부분도 있지만 정말 거의 비슷하다. 물론 전 그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