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아베 총리. (사진=일본 총리실)
일본의 세계적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지난해 9월 한 월간지 기고문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가리켜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몰라도 참 상냥한 이름"이라고 조롱했다.
위안부 문제를 집중 보도한 아사히신문을 비판하면서 나온 말이다.
핵 보유까지 주장하는 그의 극우 성향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아사히 보도를 문제 삼은 이유만큼은 이참에 되새겨 볼만 하다.
그는 "(네덜란드 여성도 위안부로 끌려간) 이야기가 확산되면 일본에 치명적일 수 있다"며 "정부는 그 전에 급히 손을 쓰라"고 채근했다.
1960년대부터 이탈리아에 거주하며 서구 세계에 정통한 그가 생각하기에 이웃이자 피해자인 아시아는 무시해도 좋지만 서양인들은 다르다고 귀띔한 셈이다.
19세기 메이지 유신이 기치로 삼았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 대열에 진입한다)가 아직도 일본인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흔히 일본을 일컬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고 한다.
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좋게 말하면 상황 판단이 빨라지고 생존 능력이 발달한 것이다.
일본 패망 후 미군은 예상외로 순종적인 일본군을 보며 이들이 과연 가미가제 공격을 감행했던 전율스런 적들이 맞나 의문을 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무조건 서양을 숭배·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식 연미복을 입고―그러나 신발은 벗은 채―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배타적 국수주의를 강렬하게 발산한다.
20세기 초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시 최강국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곧 '영미귀축'(영국과 미국을 아귀와 축생이라 부르며 공격)의 배신을 가한 나라가 일본이다.
지금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중국 견제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언제 또다시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여전히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사실상 수용의 입장을 밝혔다. (사진=청와대 제공)
지난 14일 발표된 아베 담화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담화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서구 국가들이 식민지 경제를 휩쓴 경제 블록화를 추진하자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서술했다.
무조건적 잘못을 시인했던 역대 담화와 달리 서구에 대한 복잡한 심사를 표출한 것이다.
물론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을 거명하며 일본의 재기를 용인하고 지원해준 사실에 대해서는 세 차례나 감사의 뜻을 밝혔다.
반면 한국과 대만의 식민지 통치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직접적 언급도 없이 철저히 배제했다.
"지난 대전(大戰)에서의 행동에 대한 거듭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고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 아시아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후략)"이란 대목은 있다.
그러나 '대전'만 있을 뿐 '식민 지배'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하듯이 '머리카락 쪼개기' 식으로 문장을 정밀 분석한다면, '대전'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당시 교전국이 아니었던 대만과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이어지는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도, 그 자체가 모순인 사실을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에 공허한 내용이 되고 만다.
결국 아베 담화는 시오노 나나미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서구인들의 입맛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에 말하고 싶은 아베 총리의 진짜 속내는 식민지배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역사 수정주의일 것이다.
한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 중국 등과의 대일 과거사 공조에도 균열을 낸다면 그것은 덤으로 얻게 되는 효과다.
따라서 굳이 사죄와 반성을 할 이유는 없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보니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란 태도다.
(자료사진)
그는 오히려,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러일전쟁의 승리가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에 용기를 줬다는 얼토당토한 궤변까지 늘어놨다.
하지만 이처럼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부인하는 태도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을 속국으로 삼은 게 합법적이었다면 일본의 패전과 그에 따른 한국의 해방은 일본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해방시킨 미국은 대체 뭐가 되는가.
이는 태평양 전쟁의 주요 원인을 '서구 국가들의 경제 블록화' 탓으로 돌린 것과 맞물려 일본의 꿍꿍이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케 한다.
실제로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조만간 2차대전 전범재판과 연합군의 일본 점령정책을 검증하는 기구를 발족할 계’이다.
언젠가는 승전국 미국의 그늘에서마저 벗어나려는 음험한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다.
이처럼 아베 담화 이전과 이후의 한일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준엄한 현실에서 일본 우경화에 대한 비판도 보다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내용으로 강화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