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장정서와 맞지 않거나 후진적인 재벌그룹들의 행태가 잇따르면서 한국기업이 자본시장에서 제 가격을 받지 못하는 코리아디스카운트가 더 악화되는 것 아닌가는 우려가 높다. 재벌지배구조와 문화 개선이 시급한 실정이다. CBS노컷뉴스에서는 그 실상과 문제점, 대책을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1. 후진적인 재벌지배구조…셀프 디스카운트 부추긴다 2. 금수저 물고 태어난 재벌 3세 황제경영 3. 제도보다는 운영…주주권 제대로 행사해야 |
자료사진 (사진 = 스마트이미지 제공)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경주돼왔다.
그동안 신규 순환출자금지와 사외이사제도 활성화 등 여러 제도와 대책이 마련돼 시행돼 왔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아진 것이 없고 심지어는 더 악화되기까지 했다.
◇ 재벌소유지배제도 개선…제도보다는 운영
재벌 소유지배구조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는 소유와 지배구조의 괴리, 적은 지분으로 황제 경영하는 것이 꼽힌다.
이런 문제점은 재벌그룹 경영권이 창업주에서 2세, 3, 4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장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롯데그룹 형제 다툼은 0.05%의 지분을 갖고 있는 그룹 총수가 여전히 황제경영권을 행사하는 후진적인 기업문화가 여전히 온존돼 있어 가능한 것이다.
일부 재벌그룹에서는 보다 세련되고 지능적으로 대처하지만 그 속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달라진 것이 없어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적법이라는 모양은 갖췄지만 기실은 3세로의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의 포석이 깔린 삼성물산 합병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가운데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김상조 한성대교수는 “2002년을 저점으로 GDP대비 재벌의 자산총액 비율이 빠르게 상승해 2002년과 2012년을 비교해보면 이 기간 중 30대 재벌의 자산총액 비율은 1.8배 증가했는데 범 4대 재벌의 비율은 1.91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20대 재벌 중에서도 범 4대 재벌 등 최상위 재벌의 자산이 더 빠르게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벌지배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하겠지만 재벌문화를 바꾸고 운영방법을 개선하는데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정재규 연구기획팀장은 “IMF 이후에 사외이사제도니 감사위원회 제도니 지배구조와 관련한 많은 제도를 도입했다. 사외이사가 독립성, 전문성이 있느냐, 거수기 아니냐, 로비스트 아니냐 하는 자조적인 발언도 있는 것을 보면 제도만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팀장은 “제도와 함께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고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플레이어가 필요한데,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 행사를 한다든지 소액주주들도 주주행동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목소리를 내면 기존의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소수주주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던 것들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벌그룹의 소유지배구조와 문화를 시정해 나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주주, 특히 기관투자자가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주주들은 투자자의 관점에서 손해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 임시주주총회를 요구하거나 이사후보 추천과 같은 주주제안을 하고 필요할 경우 주주대표소송까지 제기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경영진을 압박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주인이 경영과 관련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성물산 합병과정에서 헤지펀드 엘리엇이 주주로서의 이익을 침해한다며 합병을 반대하고 나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고 일부 무리수를 두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주주로서 응당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대부분의 다른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는 커녕 자신의 권리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특히 지분 11.6%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대응은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두개 자문사로부터 이 합병이 불공정하고 문제가 있다는 똑 같은 결론의 보고서를 받았지만 내부에서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가운데 합병에 찬성하는 족으로 손을 들어줬다.
제도의 미비를 탓할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현행제도 아래서도 얼마든지 삼성의 무리수를 바로 잡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재벌 소유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 연기금의 역할이 중요하다.
◇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 제대로 하는지가 관건현재 적립된 국민연금기금이 5백조원 규모고, 2030년에는 천 8백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 기금은 운용방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상당한 규모가 주식에 투자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현재도 많은 상장기업에서 최대주주의 지위에 올라서있는 국민연금의 주주로서의 위상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그런 위상에 걸맞게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국민연금의 운용독립성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대표는 “재벌의 힘이 커져 비판,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는데 하나 있다면 공적연기금이다. 국민연금만 해도 260개 기업을 5% 이상 갖고 있다. 삼성전자 지분도 8%이상 갖고 있는 최대주주다. 최대주주로서 이에 걸맞게 상응하는 목소리를 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 대표는 이어 "현재는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어서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구조기 때문에 국민연금기금의 운용기능이 독립돼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전문성을 갖고 정치권력으로부터도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고 의결권도 투명하게 분석되고 사후적으로도 어떤 근거에서 결정됐는지 공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자가 제대로 주주권을 행사하는데 있어서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고 우리나라도 검토하고 있는 스튜워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가 도입되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스튜워드십 코드 : 기관투자자가 배당이나 시세차익에 대한 관심에만 그치지 않고 기업의 의사결정에 어떻게 참여할지를 정한 준칙으로 기관투자자 가운데 이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투자자는 공개해 일반 투자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류 대표는 “스튜워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들이 주주권행사를 어떻게 할지를 정한 하나의 준칙이다. 우리나라 기관투자자들이 돈 따먹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워런 버핏처럼 주주로서 기업에 대해 주주권행사도 하고 경영에 참여도 하고 이런 것이 작동돼야 재벌지배구조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재규 팀장도 “기관투자자는 고객의 돈을 받아서 운영하는데 고객의 돈으로 최대한 수익을 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스튜워드십 코드의 기본정신이다. 수탁자로서의 책임을 의미하는 거다. 스튜워드십 코드가 도입되면 기관투자자는 지금까지처럼 회사측이 원하는대로 무조건 찬성,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찬성하는 것이 고객의 자금으로 최대한의 수익을 내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배구조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은 신중해야
한편 엘리엇사태를 계기로 재벌그룹의 소유지배구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과는 상반된 주장을 재계 일각에서는 제기한다.
헤지펀드의 공격으로 인한 기업의 적대적 M&A,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 오히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거론되는 대표적인 제도가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 제도이다.
포이즌 필은 적대적 M&A 때 기존주주에게 신주를 저가에 인수할 수 있는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고 차등의결권제도는 대주주에게 일반주주보다 1주당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영권 방어장치가 마련되면 기업들은 적대적 M&A에 대비한 경영권 방어행위로 자원을 낭비시키지 않고 기업역량을 분산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재벌그룹의 복잡한 출자구조를 변화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김현종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밝혔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포이즌 필이나 차등의결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가 허용돼 있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재벌그룹의 복잡한 출자구조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경영권 방어장치가 없는 가운데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적대적 M&A에 노출되게 되니까 출자구조가 심각하게 복잡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적대적 M&A를 노리는 펀드가 아니고 엘리엇의 문제제기도 투자자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주권을 행사한 것에 지나지 않은 현실에서 엘리엇사태를 계기로 경영권 방어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부교수는 “경영권 인수와 주주행동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소버린이나 엘리엇 모두 주주행동주의에 불과하다. 그 사람들은 경영권 인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강조했다.
엘리엇사태와 무관하게 경영권 방어제도가 우리 기업현실에 필요한 것이라 해도 도입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지켜줘야 할 경영권은 경영이 투명하게 이뤄지고 미래전망도 밝은 건강한 기업이지 부실한 경영으로 수익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기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재규 팀장은 “경영권은 무조건 보호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성장도 못하고 계속 침체하고 있고 회계부정, 횡령, 배임 등으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면 경영진이 교체될 수 있어야 하고 교체되는 것이 맞다.경영권 방어만이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실업을 완화시키는 대응방식이라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우찬 교수는 우리나라에 외국에 없는 경영권 보호장치가 있다며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세제도 경영권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장내에서 주식을 매도하면 주식양도차익과세가 없는데 장외에서 팔면 세금 붙는다. 어떤 회사가 적대적 M&A를 위해서 공개매수할 때 그 공격자한테 주식을 팔면 장외매도가 돼 세금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들 세금내기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공개매수 있을 때 절대 안 판다. 실제 그런 사례가 있었다. 한 명의 주주도 안 팔았다, 세금내기 싫다고. 외국에 없는 경영권 보호장치가 우리나라에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