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사건의 억울한 피해자들은 최근의 재심을 통해 늦게나마 치유됐을까. 현실 속 그들은 고문 가해자와 다시 맞닥뜨린 트라우마로 충격 속에 세상을 등지기도 했고, 배상 절차의 허점 때문에 또다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CBS노컷뉴스는 '되살아난 고문, 두번 죽는 이들' 기획을 통해 공안사건 피해자들이 다시 겪는 아픔을 조명한다. [편집자 주]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조차 지켜지지 않던 1980년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한 탄광에서 일했던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 이원갑(75)씨.
그가 재직했던 '동원탄좌'는 당시 국내 석탄 생산량의 9%를 담당하는 최대 민영탄광업체였다.
하지만 근로조건은 형편없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이 캔 석탄 양을 축소 계산해 임금을 낮췄고, 사장 친인척으로 구성된 '암행독찰대'가 사생활을 감시했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노동조합은 사측의 어용 조직에 불과했다.
"광부가 되는 사람들은 돈 없고, 배우지 못하고, 소위 '빽' 없는 사람이었죠. 회사는 이 약점을 이용해 인권을 유린하고 임금을 착취하는 일을 자행했어요. 탄을 캐다가 광부가 죽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거든요."
이씨 등은 노조지부장 부정선거 무효화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집회를 열고자 했지만 경찰이 가로막았다.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지자 계엄사령부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무차별적인 고문으로 이어졌다.
"물고문으로 여성들의 옷이 벗겨졌는데 가슴이 드러난 걸 부끄러워 하기 보다 우선 살려달라고 애원했죠. 여기저기서 '악'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책에서나 봤던 '아비규환'이 바로 이거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갈비뼈가 내려앉아 배 부분에 툭 튀어나왔고, 왼손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져 펴지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난 이후의 삶도 쉽지 않았다.
취직은커녕, 이씨와 친하다는 소문이 돌면 모두 해고됐기 때문에 지인들도 모두 그를 피했다. 사복 형사들도 밤낮 없이 따라다녔다. 하루 벌어서 하루의 생계를 간신히 버텼다.
결국 이씨는 2005년에서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지난 2월에는 재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먼저 인정받은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그때 생활지원금이라면서 징역 1일 당 4만원을 쳐 줬어요. 근데 이걸 받았다고 무죄를 받아도 국가가 손해배상을 안해준대요."
이는 민주화보상법 18조 2항에 때문. 이 법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받은 경우, 민사소송법에 따른 재판상의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근거로 대법원은 사북항쟁 관련자들이 이미 국가와 화해했으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와 함께 민주화보상법을 적용받더라도 사업자 등록증이 있거나 연소득 5000만원 이상인 이들에게는 생활지원금이 지급되지 않았는데, 이 경우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