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2월 물가는 담뱃값 인상분을 빼면 전체 물가는 마이너스로 파악된다.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같은 언급으로 디플레이션, 즉 수요부진에 따른 극심한 경기침체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경기침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춰 시중에 돈을 더 풀어야 한다는 논리가 최근 힘을 얻고 있다. 돈 값을 내려 기업이나 가계 등 경제주체들이 현금을 보유하기보다는 더 쓰도록 유도해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도록 해야한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금리인하를 결정하기 전에 한번 더 따져봐야할 조건이 있다. 바로 '돈맥경화' 현상이다. 시중에 풀린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황에서는 금리인하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금고에 잠자는 5만원…돈이 안 돈다지난해 말 기준으로 시중에 풀린 5만원권은 10억4천만장으로, 발행 잔액이 52조원을 넘었다. 전체 통화의 7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은행으로 환수된 5만원권은 전체의 29.7%로, 발행된 10억장 가운데 불과 3억장만 돌아왔다.
이렇게 환수율이 낮다는 것은 현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어딘가에 고여있다는 뜻이다. 실질 예금금리가 1%대까지 낮아진 상황에서 예금의 실익이 없고 오히려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이 세금 회피 등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풀린 돈의 상당수는 기업이나 고소득자의 금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
또 금융기관들도 위험회피를 위해 주로 주택담보대출이나 안전한 채권이나 대기업에만 투자하면서, 정작 돈이 필요한 기술 중소기업에는 돈이 돌아가지 않은 채 풀린 돈이 몇차례 돌지도 못하고 다시 한국은행으로 돌아가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금융기관의 보신주의 타파를 부쩍 강조하고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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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값 내려도 현금 안내놔"…유동성의 함정실제로 발행된 돈(본원통화)이 은행을 통해 몇 번이나 돌았는지 보여주는 통화승수는 지난 2008년 27배였던 것이 지난해 말에는 19배까지 내려앉았다. 또, 통화 한 단위가 각종 거래를 매개하기 위해 몇 번 유통되었는지를 나타내주는 통화유통속도도 지난해 3분기에 0.73을 기록해 2012년 이후 내리막길이다.
이렇게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면 어떻게 될까. 현대경제연구원 김천구 선임연구원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으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춰 시중에 돈을 풀어도 그 효과가 상쇄되고,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동성 함정은 미래 경기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업과 가계 등이 금리를 낮춰도 현금을 쥐고 내놓지 않아,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는데도 돈이 돌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통화정책을 통해 금리를 계속 낮춰도 소비나 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결국 금리가 0%까지 내려가 통화당국이 더 이상 경기부양을 위해 손쓸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 가계부채 뇌관 건드릴라…게다가 금리 인하는 이미 1천조원을 넘은 가계부채를 더 부채질할 수 있다. 가뜩이나 기준금리가 2%로 낮아지면서 가계부채가 이례적으로 크게 늘어난 상황에서, 곧 봄 이사철을 앞두고 전세난에 지친 실수요자들이 대거 매매수요로 옮겨갈 경우, 주택담보대출 수요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다행히 가계부채 폭탄이 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채 증가는 가계가 대출 원리금을 갚는데 소득의 상당부분을 쓰도록 만들어 장기적으로 소비위축을 더 심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금리를 인하하려면 먼저 돈이 돌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여기에 수요 증대, 즉 소비와 투자를 유도하는 정책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저물가로 인한 디플레이션 우려로 금리인하 압박이 높아지고 있지만, 가계부채에 대한 정밀한 관리대책과 함께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즉 가계 소득을 늘려주는 방안이 병행되지 않으면 금리인하는 오히려 우리 경제에 독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오는 12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금리인하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다. 과연 사상 초유의 1%대 기준금리 시대가 올지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