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산업이 3년 연속 관객 1억 명을 넘어서며 최고의 호황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지금 안녕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잔뜩 화가 나 있고 좌절한 영화 제작자들도 울분을 삼키고 있습니다. CBS 노컷뉴스가 화려함 속에 감춰진 한국 영화의 불편한 민낯을 연속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① 누구를 위한 영화관인가…빼앗긴 '볼 권리'
② 돌려쓰는 극장용 '3D 안경'…이대로 괜찮나?
③ "왜 영화 상영시간에 광고를 끼워넣죠?"
④ "극장 팝콘값 뻥튀기 담합?"…울며 겨자 먹는 관객들
⑤ "영화 대기업 횡포? 짜증을 드러내야 바뀌죠!"
⑥ [단독] CGV, '선택권' 앞세워 '영화값 6%' 편법 인상
⑦ 프리미엄관에 가봤더니…영화 관객은 '봉'
⑧ 뒷짐 진 공정위…영화 관객만 '부글부글'
⑨ "영화 만들기…이젠 행복 아니라 고통입니다"
⑩ '위험수위' 넘은 대기업의 자사 영화 밀어주기
⑪ '다양성영화' 상영횟수…360대 4의 비밀
⑫ '중박영화' 고사시킨 '퐁당퐁당' 상영 아시나요?
⑬ '스크린 독과점'에 무너진 한국영화…대안은?
⑭ '애매모호' 다양성영화…멀티플렉스 '독과점'에 악용
자료사진/황진환 기자
국내외 예술영화, 독립영화 등을 아우르는 의미로 쓰이는 '다양성영화'가 그 애매모호한 기준 탓에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독과점 강화, 수익 극대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25일 오전 10시쯤 서울 신사동에 있는 CJ CGV압구정점의 예술영화전용관 아트하우스. 3개관으로 운영되는 이곳의 상영 시간표를 살펴보니 한국 독립영화 개봉작은 '꿈보다 해몽' 단 한 편으로 오후 12시30분과 5시35분 두 차례 걸려 있다.
나머지 상영작을 보면 한국영화는 최근 CGV 아트하우스를 중심으로 상영관이 확대된 상업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오전 9시55분, 오후 3시·8시5분, 이하 개훔방), 역대 다양성영화 최고 흥행작에 이름을 올린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오후 10시25분)가 걸려 있다.
외국영화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미국, 오후 2시30분), '리틀포레스트-여름과 가을'(일본, 오전 11시55분, 오후 6시40분), '아메리칸 셰프'(미국, 오후 5시), '와일드'(미국, 새벽 12시15분), '웰컴, 삼바'(프랑스, 오전 11시30분, 오후 9시50분), '위플래쉬'(미국, 오후 7시30분), '이다'(폴란드, 오후 4시40분·11시45분), '트라이브'(우크라이나, 오후 9시), '폭스캐처'(미국, 오후 1시55분)가 상영 중이다.
익명을 요구한 영화계 한 관계자는 "개훔방의 경우 상업영화인데도 CGV 아트하우스에 진입하면서 정작 걸려야 할 작은 영화들이 밀리는 일이 벌어졌다"며 "CGV 스스로 모든 기준을 거스를 수 있는 내부방식이 있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기업들이 수직계열화를 통해 내부에 예술영화 팀과 전용관까지 만들어 일반관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골목 상권으로 대형마트가 들어온 격"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수직계열화 탓에 피해를 본 개훔방이 사회적 논란을 부르자 CGV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아트하우스에서 받으면 안 되는 영화를 걸어 버렸다"며 "이는 좋게 얘기하면 관객들의 요구인데, 다르게 보면 상업영화가 다양성영화관을 차지한 횡포가 된다"고 지적했다.
결국 멀티플렉스가 일반관에서 소위 '되는' 영화만 틀고, 예술영화관에서는 일반관에서 밀려난 모든 영화를 소화하는 식으로 다양성영화 개념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다양성영화, 효율적 정책 지원 위해 만든 개념…별도 선정기준 無"
지난 12일 서울 명륜동에 있는 CGV 대학로점에서 참여연대·민변·청년유니온이 마련한 '멀티플렉스 3사 관련 10대 불만사항 발표·시민참여 캠페인' 당시 시민들이 불만사항을 나타낸 표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사실 다양성영화의 분류 기준은 모호하다. 2000년대 초반 영화진흥위원회는 상업영화를 제외한 영화를 다양성영화로 규정하고 이들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접점을 넓힐 수 있도록 지원을 시작했다.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인 인디플러그 김정석 대표는 "2008년과 2009년 온라인 영화 시장이 커지면서 대거 수입된 외국영화의 경우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하지 않았거나 유럽산 영화까지 다양성영화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다이빙벨' 등을 배급한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는 "다양성영화는 독립영화·저예산상업영화 진영 등에서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정책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정식 개념은 아니"라며 "CGV, 롯데시네마 등이 영진위의 다양성영화관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이들도 예술영화관의 범주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다양성영화의 심사 기준은 어떻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별도의 기준은 없다.
영진위 관계자는 "예술영화를 심사할 때 개봉 첫날 200개 이상 상영관에 걸 수 없고, 840회차까지 틀 수 있다는 선정 기준에 따라 제한을 두지만 다양성영화를 추리기 위한 심사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영화로 분류할 때 특별한 제작비 기준은 없는데, 현업에 종사하는 심사위원들의 판단에 기대는 측면이 크다"며 "다양성영화 전용관은 1년 365일 기준으로 219일 이상 예술영화를 상영해야 한다는 지원 규정만 따르면 모든 프로그램 편성은 극장 자율에 맞기고 있다"고 했다.
예술영화관조차 멀티플렉스가 장악한 극장 환경에서, 설자리를 잃어가는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영진위의 정책적 고민은 있을까.
영진위 관계자는 "다양성영화에 대한 관객 저변을 확대하는 지점과 이들 영화의 제작을 지원하는 일을 담당자 입장에서 함께 고려하고 있지만, 영진위 차원에서 특별한 계획은 나와 있지 않다"고 전했다.
◇ 설자리 없는 예술영화전용관…"시민 참여·정책 지원 맞물려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25일 폐관한 대구 동성로 동성아트홀의 내부 모습. 이곳에서는 지난 11년간 2000여 편의 영화를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사진=동성아트홀 제공)
대구 지역에서 11년간 2000여 편의 영화를 개봉해 온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성아트홀이 25일 폐관했다.
지난해 9월 석연찮은 이유로 영진위의 예술영화관 지원에서 탈락한 뒤 매달 400만~500만원의 적자를 봐 왔는데, 결국 자구책을 찾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동성아트홀 프로그래머인 남태우 국장은 "영진위에서 연간 최고 6300만원까지 지원받았는데 '시설이 낡고 관객이 들지 않는다'는 지원 탈락 이유는 구차한 변명"이라며 "국가가 운영해야 할 문화 공공재를 민간에서 대신 해 온 것인데, 당연히 시장성이 떨어지니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남 국장은 "결국 대기업 직원의 연봉도 안 되는 5000만 원이 없어서 극장 문을 닫게 된 셈"이라며 "대구시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동성아트홀을 포함해 지방의 5곳 극장에 대한 지원을 끊은 영진위는 그 자리에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전용관을 불러들였다. "영진위가 대기업 밀어주기에 혈안이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영진위가 독립영화 진영에 시장 논리를 적용하고 있지만, 지금은 여기에 정치 논리까지 짙게 배 있다"며 "결국 정권이 불편해 하는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는 것인데, 공익성을 띤 문화를 자기 입맛에 맞추려는 모습이 몹시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멀티플렉스의 독과점으로부터 작은 영화의 독립성·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인디플러그 김정석 대표는 "전국적으로 거점 형태의 예술영화전용관을 몇 곳 선정해 일주일 동안 한 영화만 틀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는 것도 영화의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한 방법"이라며 "민간 예술영화전용관의 생존을 담보한 상태에서 상영관을 일정 수 이상 가진 멀티플렉스에서는 1개 관을 무조건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운영하는 '마이너리티 쿼터' 도입까지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