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자료사진
국가정보원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9일 항소심 판결로 정치권에 파장이 일고 있다. 대선 패배 2년여 만에 제1야당의 사령탑이 된 문재인 대표의 취임 첫날 나온 이 판결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판결의 핵심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심리전단에 특정 후보의 낙선을 위한 활동을 지시했고, 이는 바로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의 조직적인 댓글 달기는 국정원법 위반은 맞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야당은 즉각 사필귀정이라며 환영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국정원 대선개입 무죄공작저지 특별위원회는 "'죄인은 감옥으로'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을 확인해준 판결"이라며 "사법부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모든 국정원 관련 사건의 남은 진실을 밝혀 헌정질서와 국기를 문란한 세력의 만행을 국민 앞에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며 45일 동안 노숙투쟁을 벌였던 김한길 전 대표도 "한마디로 만시지탄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며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과 같이 민주주의의 근본을 뒤흔들고 대선 결과의 정당성에 큰 상처를 내는 국기문란 사태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은혜 대변인은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지난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법적으로 인정된 만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대선 개입의 책임이 전·현 정권 모두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신임 당대표의 취임 첫날 나온 이 판결로 박근혜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새정치연합의 대여 공세에 힘이 더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침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 수준인 반면, 문 대표는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1위에 오르는 등 2년 2개월 만에 둘의 처지가 묘하게 엇갈린 상황이기도 하다.
다만 당내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자칫 대선 불복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당 국정원특위 소속의 박범계 의원은 이날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당 차원에서는 유무효에 관해 이의가 없다고 분명히 얘기를 했고, 아직 (판결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 차원의 액션이 고려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었다.
새누리당은 가급적 말을 아꼈다.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매우 유감스럽다. 국정원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차분하게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지난 대선의 정당성과 박 정부의 정통성에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긴장하는 기색이 엿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삭제 사건에서도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무죄 판결이 나온 터라 부담이 더 큰 상황이다.
한편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 격인 문 대표와 청와내는 이날 판결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