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광해'에는 서로 떨어진 '진짜' 광해군과 '가짜' 광해군을 잇는 중요한 소재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승정원일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격인 조선시대 승정원이 왕의 행적을 빠짐없이 날짜별로 써놓은 기록물이다.
영화 덕에 유명세를 탄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고전 문헌은 알려진 것만 180만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옛 생활상을 오롯이 담은 이들 고전은 역사 연구는 물론 드라마·영화로 대표되는 한류의 기름진 밑거름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접할 수 있도록 돕는 고전번역가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승정원일기의 번역을 총괄하는 김낙철(52) 역사문헌번역1실장에게 고전번역가의 삶을 물었다.
11
김낙철 실장이 고전번역원에서 일한 지는 올해로 12년째다. 마흔한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들어선 고전번역가의 길은 그가 수십 년 방황 끝에 되찾은 꿈이다.
김 실장이 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때는 1988년. 한중수교(1992년)의 문이 열리기 전이라 전공을 살린 일자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그해 코트라 한 곳에서만 중문학 전공자를 뽑았는데, 떨어졌어요. 군대에 있을 때 결혼을 해서 현실도 외면할 수 없었죠. 전공을 버리고 보험회사, 중소기업에서 관리직으로 10년을 일했어요. 사는 게 재미 없더군요." 고등학교 시절 한문의 묘미를 깨우쳐 준 은사의 영향으로 대학 전공도 중문학을 선택했던 그다.
바쁜 생활에 쫓길 때도 늘 고전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결국 그는 1996년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운영하던 국역연수원에 입학해 고전번역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서른여섯 살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맞벌이 하던 아내를 설득했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고 말이죠. 그런데 아직도 못 갚았어요.(웃음)"
김 실장은 연수원 과정 3년과 상임 과정 2년을 거쳐 5년 만에 치른 입사 시험에서 합격해 고전번역원에 남았다. 입사 뒤에도 2년 동안 교정·교열 작업만 하면서 번역 노하우를 쌓았다.
그는 베테랑 고전번역가가 된 지금도 주어진 업무량을 마친 뒤면 항상 찜찜하고 켕기는 구석이 남는다고 했다. 글처럼 번역도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보완할 부분을 끊임없이 공유하는 데 힘을 쏟는다.
"우리나라 고전의 가치는 누구나 아는데,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어요. 한문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대가 아니니, 한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고전은 무용지물인 셈이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활용할 수 있도록 길을 넓혀간다는 데 고전번역가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22
◈ 고전번역가들도 직업병이 있나.
"회의 문서나 새 책을 접하면 빨간펜을 들고 교정교열부터 본다. '우리말 어법에 안 맞는데' '오자가 있네' 생각이 그쪽으로 쏠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걸 봤을 땐 답답하다. (웃음) 친구들을 만나도 일할 때 번역가들끼리 일상적으로 쓰는 고전 속 단어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친구들이 어리둥절해 할 때가 많다."
◈ 번역가들의 면면이 다양하다고 들었다."고전번역원의 외부 번역가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있다. 환갑을 넘기셨는데, 경북 상주와 서울을 왕복하며 국역연수원에서 번역을 배우셨다. 칠십 살을 넘기신, 정부부처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던 분도 퇴임 뒤 참여하고 있다. 내부 직원 중에는 김밥 전문점을 하던 사람이 있다. 한문학을 전공한 뒤 먹고 살려고 장사를 하다 제 길을 찾아온 경우다."
◈ 한문을 많이 안다고 고전번역가가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일을 하다보면 현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는 경우가 있다. 하루에도 몇 건씩 만난다. 이때 다양한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는 것이 번역가의 역량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소설을 좋아하는데,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지만하외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시대 죄인들의 진술서에는 마지막에 '지만(遲晩)'이라는 단어를 쓰더라. 한문으로 '더딜 지' '늦을 만'인데, 빨리 실토하지 않고 늦어서 죄송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 승정원일기 번역에만 90년이 걸린다는데. "승정원일기의 분량만 3242책, 2억 4250만 자에 달한다. 3세대가 걸린다고 보면 된다. '예산 줄 테니 10년 안에 끝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일단 전문인력이 없다. 제대로 된 고전번역가를 키우려면 5~10년은 투자해야 한다. 무리하게 기간을 줄이면 번역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큰 손해다. 무엇보다 인력 양성에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현재 번역원에서 고전번역교육원을 7년 과정으로 운영하는데, 학위로 인정되지 않다보니 한계가 많다. 교육원을 고전번역대학원으로 승격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