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고(故) 김지태 씨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장학회 주식을 증여한 사실은 인정되나 증여를 취소할 수 있는 10년의 기한이 지났고,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의 시효도 소멸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염원섭 부장판사)가 24일 고 김지태 씨의 장남 영구(74) 씨 등 유족들이 재단법인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낸 주식인도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하면서 밝힌 이유이다.
◈ 직원과 부인 구속한 데 이어 김지태 씨에게 징역 7년 구형…기부 이틀 만에 공소기각 재판부는 우선 국가가 김씨를 구금한 상태에서 강제로 장학회 주식을 기부하는 내용의 승낙서에 서명을 한 사실은 인정했다.
판결문에 적시된 기초사실에 의하면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분 아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등 기업인들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이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27일 부일장학회 상임이사와 삼화그룹 측 임직원을 구속하고 이어 김씨의 부인 송모 씨를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은 군 야전복을 입고 권총을 찬 채 "우리 군이 목숨걸고 혁명을 했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다"고 겁을 줬다. 부산지부 수사과장도 "살고 싶으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에 체류하다 소식을 듣고 귀국한 김지태 씨 역시 관세법위반과 국내재산도피방지법위반, 공문서허위작성 및 행사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군 검찰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결심공판 바로 다음날인 5월 25일 김씨는 문화방송과 부산일보 주식 100%와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에 관한 포기각서를 작성했고, 6월 20일에는 당시 법무부장관이 제시하는 기부승낙서에 서명했다.
군 검찰은 이틀 만에 '김지태가 죄과를 뇌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뜻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김씨 등 구속자 전원에 대해 공소를 취소했고, 김씨는 바로 석방됐다.
이후 김씨에게서 받은 주식을 기본재산으로 5ㆍ16장학회가 설립됐고,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정수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 재판부 "취소권 행사기간 및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모두 지나" 재판부는 그러나 정수장학회는 주식을 반환하고, 이행이 어려울 경우 불법행위를 한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유족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먼저 주식 증여가 강박에 의한 행위로 무효라는 주장에 대해 "당시 김지태 씨가 의사결정의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식을 증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주식을 헌납한 대가로 김지태 씨가 풀려났다는 유족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국가가 김지태 씨로부터 주식을 증여받는 대가로 반드시 구속취소 내지 공소취소 결정을 해 김씨를 석방시켜야만 하는 반대급부를 이행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설령 실제로 약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민 개인이 가지는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보장에 관한 헌법상의 기본 원리는 물론, 국가 형벌권과 형사 재판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무효이고 급부로서의 일반요건인 적법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김씨가 주식을 헌납하면 국가가 그를 풀어준다는 내용의 약정 자체가 무효이므로 이를 전제로 한 주식 반환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증여를 취소할 수 있는 취소권의 행사기한, 즉 제척기간이 이미 지났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정수장학회와 국가의 주장은 모두 받아들여졌다.
재판부는 "김씨가 주식을 증여한 1962년 6월 20일부터 10년이 지날 때까지 증여 행위를 취소하지 않아 취소권이 소멸됐고, 마찬가지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도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 "박정희 대통령 통치기간에 소송 제기했어야 한다"는 결론 재판부의 판결 이유를 종합하면 "김지태 씨가 국가의 강압에 의해 주식을 증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척기간이자 소멸시효인 10년 안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청구를 기각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장학회를 강탈한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고 유신 체제에 나서기 전인 1972년 6월까지 김씨가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증여의 취소를 구하거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는 최근 들어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법원 판결에 배치된다.
대법원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지난해 6월 한국전쟁 당시 국가에 의해 학살된 울산 지역 국민보도연맹 피해자들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국가의 항변은 신의칙에 반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국가권력의 비호나 묵인 아래 조직적으로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해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고 판결했다.
이후 일선 법원에서는 청주ㆍ청원 보도연맹, 청도 보도연맹 사건에 이어 나주경찰부대 사건까지 유족들에 대해 국가가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김지태 씨의 유족들도 재판에서 "박정희 1인의 권위주의적 통치기간 내에서는 권리 행사가 불가능했고, 과거사정리위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이후에야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며 국가의 시효 소멸 주장을 반박했다.
제척기간 경과에 대해서도 "증여 취소권 행사의 제척기간은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진행되는데 이듬해 4월 김씨가 반환청구를 낸 바 있으므로 이미 토지에 대한 증여의 의사표시는 적법하게 취소됐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