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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버스 운전기사들이 생계를 위해 심야시간대에 대리운전 기사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이런 영업은 엄연히 불법인데다 운전기사들의 피로누적으로 어린이와 학생들을 태우는 시간대에 안전사고도 우려되지만 관계당국은 단속이 어렵다며 나몰라라 팔장만 끼고 있다.
지난 10일 새벽 2시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 이어폰을 귀에 꼽고 휴대전화를 든 중년의 남성들이 천막에 모여들었다. 천막은 이 근방에만 7개 정도가 죽 늘어섰다.
모두 하나같이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지만 '끼익~'하고 노란색 영어 학원버스가 천막 앞에 서자 우르르 몰려 차에 올라탔다.
왜 이 새벽에 어른들이 학원버스를 타는 걸까?
대리기사들은 자신들을 실어 나르는 11, 15, 25인승 승합차량을 '셔틀'이라고 불렀다.
이 셔틀 중 절반 이상은 학원 상호를 그대로 단 채로 운행했다. 어린이집, 태권도학원, 영어학원 등 업종도 다양하다. 노란 학원 버스인데도 상호만 뗀 차량도 눈에 띄었다.
이들 차량이 낮에 보는 학원버스와 다른 점이라면 조수석 창문 앞에 붙인 행선지나 차 앞 범퍼 윗부분에 단 빨간색, 파란색 네온사인 표시. 대리기사들은 캄캄한 새벽에도 반짝이는 이 표시로 한 눈에 셔틀차를 알아볼 수 있다.
▣새벽마다 대리기사를 실어 나르는 학원버스 기사들▣셔틀을 운행하는 운전기사 김모(45.가명)씨의 노선은 강남~강서권이다. 김 씨는 1호차, 같은 학원 운전기사로 일하는 동료 2명이 2호차, 3호차를 운행한다. 배차 간격은 30분이다.
김 씨는 노선도나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대리운전 기사들이 많이 찾는 온라인 카페 등에 올려 홍보를 한다.
대리운전 기사들에게 받는 돈은 1인당 3,000원에서 최고 4,000원까지. 이렇게 하루 3회 정도 왕복을 하면 기름 값, 밥값을 빼고 평균 6만원 가량을 번다.
김 씨는 낮에는 노원구에 있는 00 영어학원 운전기사다.
정오부터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태우고 한 두 시간 쉬었다가 새벽 1시부터 3시까지는 막차가 끊긴 대리기사들을 실어 나른다. 주말을 빼곤 평일 내내 '투잡'을 뛰고 있다.
불철주야로 운전을 하니 사고 위험에 노출된 적도 많다. 아이들을 싣고 새벽처럼 과속을 할 때나 피로로 졸음이 몰려올 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일을 두 개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그렇지 뭘..." 왜 학원운전과 셔틀을 하냐는 말에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자신의 차를 가지고 학원과 계약해 운전을 하는 지입 방식으로 김 씨가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생활이 불가능한 140만원에 불과해 어쩔수 없이 대리기사 셔틀을 할 수밖에 없다.
▣노란 학원버스를 직접 타보니... 정원초과, 과속에 ‘안전 빨간불’▣직접 셔틀을 뛰는 노란색 학원버스에 올라 봤다. 김 씨의 학원버스는 15인승이었지만 꽉꽉 채워 17명이 탔다.
함께 탄 대리기사 한 명은 "구겨져 셔틀을 타고 있으려면 참 힘들다. 그래도 택시를 타면 그나마 쥐는 돈이 없는데 어쩌겠냐"며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속 100킬로 이상을 밟아 10여분 만에 합정역 근처에 도착했다. 콜을 받은 대리기사가 번개처럼 내렸다.
대리운전기사들에게 셔틀버스는 '필요악'이다. 하루가 다르게 대리운전 가격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이 타지만 위험하다는 것도, 불법인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6년 째 대리운전을 한 기사 조모(47)씨는 “셔틀이 15인승인데 20명까지 태우다 사고가 난 것도 봤다. 차가 너무 오래 된데다 사람을 너무 많이 실으니 바퀴가 펑크가 나고 차가 뒤집히더라"고 담담히 말했다.
기자가 탄 김 씨의 학원버스도 신호 위반은 기본에 안전벨트나 손잡이도 없어 고속으로 달릴 때는 몸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불법’ 셔틀 운행, 구청도 경찰도 알면서 “적발이 어려워” 팔짱▣현행법상 셔틀은 엄연히 불법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르면 개인 차량으로 노선을 정해 돈을 받고 운송을 해서는 안된다.
이에 대해 강남구청 관계자는 지속적으로 단속을 하고 있지만 적발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사들이 셔틀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태워줬다는 식으로 둘러대기 때문에 심야에 단속을 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으면서까지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것.
경찰은 구청으로부터 통보 받은 자료를 가지고 수사를 해서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이하의 벌금을 선고한다. 하지만 경찰도 구체적 증거로 불법을 입증해야하기 때문에 단속이 어렵다고 털어놨다.
단속하는 구청도, 경찰도 모두 셔틀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셔틀버스 600여대는 새벽마다 서울과 수도권을 오가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 매일 밤마다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