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조용필도 3-4년은 외우지 못했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노래방에서 누구나 한번쯤 구성지게 불러 봤을 노래,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비롯해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김국환의 ‘타타타’ 등 우리 가요계의 전설적인 명곡들을 만들어낸 부부가 있죠. 작곡가 김희갑 씨와 작사가 양인자 씨.
음반에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이란 문구 한 줄만 들어가면 무조건 히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가요계의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는 분들인데요.
두 분이 벌써 회갑과 고희를 넘겼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반작업과 뮤지컬에서 늘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란 영화처럼 작곡가와 작사가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는 두 분, 작곡가 김희갑 씨와 작사가 양인자 씨를 3월 3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21년째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이자 친구같은 부부
▶ 여전히 활동 많이 하시죠?
김희갑 (이하 ‘김’) : 예. 가만히 놔두지를 않네요.
▶ 그렇게 바쁘신 것이 양인자 선생님은 어떠세요?
양인자 (이하 ‘양’) : 좋을 때도 있고요. 그 가운데서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어요. 일이 자꾸 들어오는데, 그 일을 비집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참 재미있어요.(웃음)
▶ 두 분이 커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붙어 다닌다고 주변에서 하지 않으시나요?
양 : 꼭 이렇게 같이 부르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두 분이 참 친하시네요.” 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김 : 떼어놓지를 않아요.
▶ 김희갑 선생님을 생각하면 양인자 선생님이 떠오르고, 반대로 양인자 선생님을 생각하면 김희갑 선생님이 떠오르는데요.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하신 것은 없으시죠?
김 : 그런 불편은 없어요. 으레 사람들이 저 혼자 가면 “왜 양인자 선생님은 안 보이세요?” 라고 물어요.
▶ 음악적으로는 두 분이 잘 맞으시지만, 성격은 서로 좀 다르실 것 같은데요?
양 : 많이 다르죠. 김 선생님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행동적이고 성격도 급한데, 저는 그 반대거든요. 저는 매사에 좀 천천히 하자는 쪽이고, 성격도 저는 너그럽다고 생각하는데...
김 : 제가 적응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죠.
▶ 그러면 김 선생님이 속 터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김 : 그렇지는 않고요.(웃음)
양 : 제가 느리다고 해서 그렇게 굼벵이는 아니고요. 제가 자꾸만 뛰려고 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땀을 식히게 하죠.
▶ 양인자 작가님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요?
양 : 네. 노래방에 가면 막 억지로 시키잖아요. 그래서 초기에는 한 두어번 했더니, 하는 즉시 사람들이 저를 아주 무시하고, 온 얼굴에 실망의 빛을 감추지 않아서요.(웃음) 원래 저는 사람들이 하라고 하는데 안하고 버티는 것을 참 싫어하거든요. ‘하면 하고, 말면 말지.’ 하는 스타일인데, 지금은 끝까지 노래 안 한다고 버텨요.
▶ 두 곡 정도 부르신다고 하던데, 어떤 곡인가요?
양 :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그 대사는 제가 달달 외우니까 따라하죠. 그리고 노래 부분은 옆 사람을 시키고요.
▶ 결혼하신지 몇 년 정도 되셨죠?
양 : 21년 정도 되었어요.
▶ 두 분이 같이 작업을 하시다가, 김희갑 선생님이 먼저 고백하신 건가요?
김 : 네.
양 : 무슨 고백을 해요?(웃음) 사람이 친해지다 보면 고백할 타이밍이 지나가버리고 없지 않나요?
▶ 그럼 고백도 안 받으시고 그냥 결혼하셨단 말인가요?
양 : 그냥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어느 날 신문에 대서특필이 됐어요. 그래서 잘못 하다가는 좀 우습게 되겠다 싶었는데, 김 선생님이 모든 말을 생략하고 “예식장을 어디로 잡을까?” 하시는 거예요.
▶ 그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나요? 아니면 정말 속마음을 이야기 하신 건가요?
김 : 기사로 대서특필을 해놨으니 어물어물 하다가는 망신을 당하겠더라고요. 그냥 공개하고 결혼을 하면 될 것 같아서, 그 핑계김에 했어요.(웃음)
▶ 두 분 다 능력도 있으시고 매력이 있으셔서 굳이 고백이 필요치 않고 자연스럽게 교류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양 : 자연스럽게 시작된 거죠. 이 쪽도 혼자 살고 저도 혼자 살면서 친해지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가족 같아지더라고요. 그 때는 아이들이 어렸는데, 저는 일하는데 몹시 치어서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할 때였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도 잘 가고 스키장에도 가고 낚시도 데리고 가고 하면서 보모 노릇을 아주 잘하는 바람에 그냥 가족이 되어 버렸어요.
김 : 아이들이 둘이 있는데, 좀 안쓰럽더라고요. 엄마는 글 쓴다고 방에만 처박혀 있는데, 아이들은 멍하니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데리고 다니면서 운동도 시키고 그랬죠.
양 : 그래서 둘째 아이가 골프 선수가 되었잖아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발표된 지 7~8년 후에야 인기를 얻게 된 노래▶ 두 분이 손만 대면 반드시 히트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요. 그 비결이 뭔가요?
김 : 제가 작곡을 시작한 것이 1965년도부터였어요. 그 때부터 해서 1970년도 말쯤 돼서는 영화음악만 하고 대중음악은 그만 하자고 했는데, 양 선생님을 만나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죠. 노랫말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이 되다보니까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는데, 마침 또 만들어 내는 대로 다 반응이 참 좋았어요. 저는 이 사람을 잘 만나서 그런지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 노래 한 곡이 성공하려면 작사나 작곡 모두 좋아야 하는 거겠죠? 비율로 나눌 수가 없는 거죠?
김 : 저는 노랫말은 대충 붙여도 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했었는데, 이 사람을 만나고 노랫말을 써놓은 것을 보면 그렇게 당돌하고 도전적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라는 곡은 제가 좀 민망해서 세상에 숨겨놓았던 곡이거든요. 그래서 앨범을 녹음하고도 편집할 때 'Side 2'의 네 번째 곡으로 숨겨 놓았어요. 그런데 방송국과 매스컴에서 “이 노래가 제일 좋은데, 왜 제일 뒤에다 해놨어?”하는 거예요. 저는 ‘바쁠 때 전화해도 여전히 반갑나요?~’하는 가사가 좀 그렇더라고요.
▶ 저희들은 뒤에서 ‘양인자 작가께서 김희갑 선생님께 했던 고백이다’, ‘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거든요. 이 곡이 나온 것도 결혼하시기 전이었잖아요?
양 : 그렇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웃음) 그런데 작가는 꼭 자기가 처한 상황만 그리는 것이 아니고, 상상으로도 그리는 것인데요. 모든 사랑에 빠진 여자가 다 그런 생각은 하거든요. 그것을 끄집어낸 것이지, 꼭 양인자, 김희갑은 아니예요.
▶ 두 분이 말씀하실 때 보니까, 서로 “김 선생님”, “양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양 : 집에서는 그냥 “여보”, “자기”라고 하고요. 때때로는 “꿀물~”그러기도 하는데요.(웃음) 그래서 김 선생님 핸드폰에는 제 전화번호가 ‘꿀물’이라고 적혀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닭살이라고 막 놀리죠.
▶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따로 있으신가요?
양 : 그런 곡이 있죠. 알려진 곡 중에서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우리가 만든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여러 가지 의미도 있고 그런데요. 또 알려지지 않은 노래 중에서 마음이 가고 애틋한 곡도 많아요.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사랑의 기도’라는 곡도 있고요. 지금 제목은 얼른 생각나지 않는데, 그런 곡들이 많이 있죠.
▶ 대중적인 요인이 덜하거나 방송 빈도가 덜 해서 별로 빛을 보지 못한 건가요?
양 : 글쎄요. 서로 짝꿍이 잘 맞아서 잘 풀려 나가는 곡도 있는데, 반면 곡을 만들어서 누가 부르려고 했는데 그 사람에게 어떤 사연이 생겨서 못 부르게 되어서 그냥 지금까지 20년 세월이 흘러버린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것을 보면 노래도 ‘팔자’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렇게 되어서 사장되어 있는 곡들이 많이 있나요?
양 : 꽤 많죠.
김 : 그런 곡들이 많이 있어요. 싱글앨범이면 모르지만, 한 앨범에 열 곡 정도 들어가면 다 좋아할 수는 없죠. CD에서 한두 곡 정도만 많이 알려지는 경우가 많죠.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인데, 방송을 제대로 못 타다가 한 7~8년 지나서 엽서신청에 의해서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요.
▶ 그렇게 해서 히트한 곡도 있나요?
양 : 그럼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노래가 바로 그런 경우죠.
김 : 그 노래는 만들어진지 7년 만에 알려졌죠.
‘그 겨울의 찻집’은 경복궁의 한 찻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쓰게 되었죠. ▶ 조용필 씨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이라고 하던데요. 조용필 씨와는 인연이 깊으시죠?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시나요?
김 : 그럼요. 한참 후배인데, 언더그라운드에서 노래할 때부터 알죠. 부산뿐만 아니라 무명시절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했었는데 그 때부터 알죠.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가 담긴 앨범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조용필 씨를 악단의 가수로 쓰고 있던 분이 레코드 회사에 가서 간절히 부탁해서 나오게 된 것이죠.
▶ 대한민국의 히트곡인데, 나오기 전에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나요?
김 : 그런 곡들이 많이 있어요. 남진 씨가 부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노래도 그렇고요. 녹음이 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거예요.
▶ 김국환 씨가 부른 ‘타타타’도 원래는 조용필 씨의 곡으로 녹음까지 다 했다면서요?
양 : 그 곡은 조용필 씨가 다 부르고 난 뒤에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부분을 닭살스러워서 못하겠다고 해서 하지 말자고 했죠. 그래서 노래를 다 부르고 뒤에 웃지를 않았어요. 안 웃고 그냥 가면 어떻겠냐고 했는데, 그 웃음이 그 노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이거든요. 그래서 다른 곡도 여유있게 녹음을 했기 때문에 “다른 곡도 여유가 있으니까 그냥 이 곡은 빼자.”고 했죠.
▶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가사에 보면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하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적극적인 곡이었던 것 같아요.
양 : 그 때는 그랬는데, 지금 와서 제가 항의를 좀 들어요. 작가들이 더러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21세기가 와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를 해요.(웃음)
▶ 이 노래는 문학적인 가사 때문에 더욱 히트했던 것 같아요.
양 : 히트요인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히트가 되지는 않아요. 그래서 뭣 때문에 히트를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내 마음이 그것으로 위안을 받으니까 다른 사람도 위안을 받나보다 하고 생각을 하죠.
▶ 김희갑 선생님은 양인자 선생님과 같이 작업하시면서 ‘가사의 역할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하고 느끼게 되신 건가요?
김 : 네. 작곡가가 먼저냐 작사가가 먼저냐 하게 되면, 당연히 나는 작곡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작사는 좀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요. 양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아주 새로운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더라고요. 우리나라 노랫말로 쓰이지 않던 단어들만 모아서도 노래가 되더란 말이죠.
▶ 그런 가사를 쓰기 위해서는 정말 쥐어뜯고 하는 과정이 필요하셨던 건가요?
양 : 저는 편지를 쓸 때도 쥐어뜯어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죠.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끌어 모으려고 애를 쓰죠.
▶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가사 외우기도 힘들 것 같아요. 노래방 가서 부를 때도 가사를 안 보면 못 부르겠더라고요.
양 : 지금도 보고 하잖아요. 조용필 씨도 보고 해요.
김 : 노래할 때 앞에 큰 모니터가 떠요. 조용필 씨가 그렇게 연습을 했어도 한 3~4년 동안은 못 했어요. 그 때는 모니터가 없었나봐요. 그 노래를 하라고 그렇게 난리들인데 못하더라고요.
▶ 최민수 씨가 한계령을 넘어오다가 이 노래를 듣고 너무 좋다면서 전화를 했다고요?
양 : 한계령을 넘어오다가 이 노래를 듣고 차를 ‘삐~익’하고 세웠데요. 그리고는 거기서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저한테 전화를 해서, 지금 한계령에서 그 노래를 들었는데,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곡은 어떤 이야기를 담은 건가요?
양 : 드라마 주제가예요. 드라마에 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것인데, 일반적인 정서와 맞아서 인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 때 써놓은 시들을 정리해서 만들었던 곡이예요.
▶ 대학 때 써 놓으신 것들을 지금도 가지고 계시나요?
양 : 옛날 것들을 지금 읽어보면 다 아무것도 쓰잘데기도 없는데, 그 때 감성이 살아있어서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누더기처럼 되어 있는 옛 원고를 지금도 이사 다닐 때마다 끌고 다녀요.
▶ 열다섯 살 때부터 소설을 쓰셨더군요?
중학교 때 써서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책이 나왔죠.
▶ 양 선생님 이전에는 우리 가요에 그렇게 감각적인 가사들이 없었던가요?
양 : 아니죠. 남인수, 이난영 씨와 같은 분들이 노래를 부르던 그 시절의 가사를 보면, 정말 유장한 시예요. 정말 근사한 시가 많아요.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좀 가사가 휴지조각처럼 되어 버린 것 같고, 그 전까지는 괜찮은 가사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는 제목 자체로도 굉장히 감성적이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하는 가사는 정말 예술적인 것 같아요.
양 : 그 겨울의 찻집이 경복궁 안에 있었어요. 경복궁 안에 ‘다원’이라는 찻집이 있었는데, 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드라마를 구상했죠. 그래서 그 찻집을 배경으로 해서 가사를 쓴 거죠.
▶ 예전에 양인자 선생님이 쓰신 라디오 드라마에 들어가려면, 지금 김수현 선생님이 쓰신 드라마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라디오 드라마를 쓰셨던 때가 언제였죠?
양 : 그 때가 1980년대였는데요. 그 때는 주연을 할 수 있는 성우가 몇 분 안 되었기 때문에, 항상 배한성 씨 아니면 박일 씨 두 분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했었어요.
▶ 제가 지금도 기억하기로는 양인자 작가님이 그리 만만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김 선생님이 사셔 보니까 어떠세요?
김 : 그래요. 정말 만만치가 않아요. 말 한마디 실수했다가는 큰일나요. 그래서 조심해야죠.
음악을 통한 서로간의 믿음, 신뢰, 존중이 사랑으로 변해▶ 두 분이 본격적으로 같이 하신 작품이 어떤 것부터 시작하신 거죠?
양 : 주제가는 더러 알기 전부터 했었고요. 제가 연출자에게 시놉시스와 가사를 주면, 연출자가 작곡가에게 작곡을 의뢰하잖아요. 그러면 저는 작곡가를 모르는 체 드라마가 나가는 식으로 했던 것은 몇 개 있었어요. ‘작은 연인들’도 그렇고, ‘촛불을 꺼야하리’, ‘혼자 사는 여자’ 때는 그랬는데, ‘위기의 연인’이라는 작품을 할 때도 곡을 쓰셨는데, 그 드라마가 약 3분의 1쯤 나갔을 때 전화를 하셔서, 가요 가사인 노랫말을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때 한참 원고 쓸 때니까 정신이 없어서 “예, 알았습니다.”하고 끊고는 원고 쓰느라 바빠서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 또 전화가 왔는데, 좀 죄송하더라고요. 그 때도 저보다는 한참 위였던 분이였는데, 그래서 “죄송합니다.”하고는 부리나케 두 개를 만들어서 갔어요. 그것이 혜은이의 ‘열정’과 박혜령씨가 부른 ‘소녀의 꿈’ 두 꼭지였었죠. 우리는 보통 방송국에서 “한 꼭지, 두 꼭지”라는 말을 잘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오늘 두 꼭지 써왔는데요.”라고 했더니, 김 선생님은 속으로 ‘무슨 여자가 세상에 남자 앞에서 한 꼭지, 두 꼭지 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나?’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꼭지를 생각한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김 : 저한테는 너무 생소한 단어였어요. 우리는 ‘한 곡, 두 곡’이라고 하는데, 난데없이 ‘꼭지’라고 하니까 그 앞에서는 말을 못 했지만, 굉장히 당황했었죠.
▶ 처음 만나신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시나요?
김 : 1970년대에 주제가 때문에 아마 방송국에서 봤을 텐데, 저는 항상 사람 얼굴을 잘 못 외워서 몇 일 전에 본 사람한테도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가 많았어요. 김수현 씨도 제가 볼 때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더니 화가 났는지 그 동안 제가 주제가를 만들어준 김수현 씨 드라마를 쭉 얘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요.”라고 했더니, 이 친구가 “앞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더라고요.처음에 혜은이의 ‘열정’과 박혜령의 ‘소녀의 꿈’이라는 곡의 가사를 써왔을 때, 정동 MBC 부근에 있는 ‘난다랑’이라는 곳에서 처음 만났죠.
▶ 양 선생님은 김 선생님 처음 봤을 때 기억이 나시나요?
양 : 정식으로 제가 노랫말 들고 가서 인사하기 전까지 한 3번 정도 봤을 거예요. 녹음 끝나서 뒷풀이를 하게 되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인사를 하기도 했어요. ‘난다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제가 가사를 드리니까 아주 공손하게 받으시더니 쭉 읽어보고는 “열심히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대가가 어쩌면 저렇게 겸손할 수 있을까?’싶어서 저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작가한테 와서 “열심히 만들어 보겠습니다.”하는 모습이 너무 소년 같아서 제가 그 때 쇼크를 받았었죠.
▶ 양 선생님이 미녀 작가분이시라서, 일부러 매너있게 하신 건 아닌가요?
양 : 김 선생님은 그냥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지, 남녀로 안 보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보면 말이죠.
▶ 김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김 : 제대로 보고 있는 거예요.(웃음)
▶ 그 때는 두 분 다 싱글이던 때는 아니었었죠?
양 : 저는 혼자였고, 김 선생님은 별거 상태였는데요. 선생님을 쭉 보면, 한눈을 판다는 것은 전혀 자기 인생에 있는 단어가 아니더라고요. 그냥 작가이고 사람이지, 또 하나의 여자는 아니예요.
김 : 저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혼자일 거라는 생각은 안했던 거죠.
▶ 그랬다가 두 분이 서로 마음의 의지로 느끼셨던 것은 언제쯤인가요?
양 : 그렇게 작업을 하다가, 가수 ‘옥희’씨의 앨범을 만드는데 가사를 써달라고 해서 제 집으로 찾아왔어요. 그 때 비로소 제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 때부터 곡을 빙자하여 수시로 드나들면서 아이들 데리고 나가서 밥을 먹이고 놀고 했던 것 같아요.
▶ 두 분이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서로의 감성이나 재능에 대해서 좋은 호감 내지는 존경심, 존중에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양 : 그렇죠. 꼭 연애감정이나 사랑보다도 존경심, 믿음, 신뢰가 바탕이 되고, 친구 같고 동지 같은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냥 직장 친구 같아요.
▶ 김희갑 선생님 고희 때 후배들이 50년 음악인생을 기리는 ‘헌정공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흔한 일이 아니죠?
김 : 우리 계통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 같아요.
양 : 그 날 참 감동적이었어요. 많은 가수들이 나와서 선생님 곡으로만 공연을 했는데, 객석과 무대가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참 드물거든요. 그런데 정말 저절로 이루어지면서 아주 전체적으로 감동적인 무대가 되더라고요.
김 : 처음 시작했을 때는 옆 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고개도 돌리다가 10분, 20분쯤 가니까 그런 것이 없이 물뿌린듯이 조용하고 노래 한 곡이 끝나면 박수가 나오고요. 나중에 연출자가 “김 선생님,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점점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 없었어요? 오늘 공연 성공적인데요.”하시더라고요.
▶ 그 때 함께 하신 가수분들은 어떤 분들이 있으셨나요? 다들 김 선생님과 작업을 같이 했던 분들인가요?
양 : 아니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요. 마야 씨와 같은 젊은 가수 분들도 있었어요. 또 박강성 씨, 장사익 씨 등도 김 선생님의 곡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 날 오셔서 불러주셨죠.
김 : 그 날 전부 내 음악만 가지고 공연을 했는데, 다들 노래 연습을 해서 나와 주니까 정말 고맙더라고요.
▶ 그만큼 음악 인생을 잘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드시지는 않았나요?
양 : 우리가 잘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이 받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8군에서의 기타연주로 시작... 가요, 영화음악, 뮤지컬까지 왕성하게 활동▶ 김 선생님도 고향이 평양이시고, 양 작가님도 이북이 고향이시더라고요?
양 : 출생만 이북이예요. 저는 세 살 때 내려온 것으로 알았는데, 어느 날 우리 오빠의 회고에 의하면 제가 6개월 되었을 때 부산으로 내려왔더라고요.
▶ 김희갑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들고 다니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당시는 학생들이 기타를 들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때 아닌가요?
김 : 제가 꼬마 시절에는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여서, 평양에서 중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을 찼었어요. 그런데 1.4후퇴 당시에 월남해서 학교를 못 다니게 되니까 기타를 아주 열심히 쳤죠. 그 때 대구에서 하우스 보이 노릇을 6개월 정도 했는데, 같이 일하던 저하고 동갑이었던 한 친구가 심심하면 뒷주머니에서 꺼내서 하모니카를 부는데 정말 죽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하모니카를 불고 싶다고 했더니, “음악을 하고 싶으면 하모니까 말고 만돌린을 배워라.”라고 하셔서 고물상에 가서 다 깨진 만돌린을 사다가 배웠어요. 그 당시에는 악기점에 가도 만도린 줄을 마음대로 구할 수도 없었어요. 그저 전화선인 까만 강철줄을 끼워서 연습했었어요. 악보 보는 방법이라든가 음악을 접하는 방법은 아버지한테 배웠죠.
▶ 나중에는 미8군 무대에도 진출하셨다면서요?
김 : 2년 동안 밥 수저만 놓으면 만돌린을 하다가 기타로 바꿨는데, 새벽 3시, 4시까지 연습을 하니까 대구 동네에서 유명해 졌어요. 기타치는 학생이 굉장히 열심히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미8군 밴드의 악단장이 찾아왔어요. 기타를 잘 친다는 학생의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미8군 밴드에서 한 번 같이 일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회가 왔다 싶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한 번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당시에 제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머리가 짧아서 모자를 쓰고 했어요. 그렇게 무대에서 2~3년 기타를 치니까 대구에서는 제1인자가 되었었죠.
▶ 그 당시에는 음반 보다는 방송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많이 접하던 때죠?
김 : 그 때 레퍼토리를 선택하고 하는 것은 주로 AFKN을 통해서 많이 들었죠. 24시간 방송이 되니까 신곡에서부터 다양한 곡들을 거기서 카피했죠.
▶ ‘김희갑 악단’을 만드신 것은 언제인가요?
김 : 1957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 김희갑 악단을 하실 때, 그 당시 생활은 어떠셨나요?
김 : 생활은 괜찮았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무대를 나간다는 것은 고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트럭타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가더라도 무대에서 음악을 하는 것을 좋아했죠. 미8군에 있을 때 지금은 목사님인 윤항기, 윤복희 등과 같이 했죠. 윤복희가 아홉 살 때부터 우리 단체에 있었어요.
▶ 어떻게 보면 고민없이 하시는 일을 즐기면서 사신 것 같아요.
양 : 네. 그래서 질투가 나요. 이 분은 할아버지가 한의사셨고, 아버지는 의사셨어요. 그래서 초년도 유복하게 살아왔고, 그 전쟁 중에도 다른 사람의 고생에 비하면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살아왔고, 음악하면서 즐겁게 살아왔고요. 그래서 참 복 많은 인생이고, 축복받은 인생인 것 같아요.
김 : 지금까지도 그래요. 지금까지도 어디 가서 “이것 좀 하고 싶은데, 같이 좀 합시다.”하는 이야기는 안 해요. 부탁이 계속 들어오니까 일을 해도 다 못할 정도예요.
작가 김수현 씨와 젊은 시절 잡지사에서 함께 근무... “선참이 먼저 인사해야 하나요?”▶ 그런 것에 비하면 양인자 작가님은 어릴 때 어떠셨나요?
양 : 돌아보고 싶지도 않아요. 겉보기는 화려해도 본인은 완전히 바위에 눌려버렸죠. 그 때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아이한테 ‘천재’ 소리도 가져다 붙이고요. ‘한국의 사강’이라고 했는데, 사강처럼 대담하고 잘 써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강이 열일곱 살에 데뷔를 했는데, 제가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하니까 그것이 신통방통해서 갖다 붙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저는 바위에 짖눌렸죠. 그래서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었어요.
▶ 그 당시 유명했던 ‘여학생’잡지사에서 김수현 작가님과 같이 근무 하셨다고요?
양 : 제가 근무를 하고 있을 때, 김수현 씨가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 돼서 왔었죠. 그 때 상사분이 “미스 양! 저기 가서 김수현 씨한테 인사드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선참이 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요? 먼저 와서 인사를 해야지.”라고 했더니, 김수현 씨가 나중에 두고두고 “그 때 내가 ‘요것 봐라’ 했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 그러다가 김수현 씨가 잡지사 일보다는 드라마 쓰는 것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양 선생님께 직접 하셨던 건가요?
양 : 김수현 씨가 먼저 드라마를 과감하게 시작했어요. 그 때 당시에 문학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방송은 좀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라고는 생각을 안했어요. 그랬다가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다들 ‘아이쿠’하면서 방송국으로 달려갔죠.
▶ 방송국에 오셔서 히트 작가도 되시고, 오시기를 잘했죠?
양 : 그럼요. 어리석게 몇 년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촌스럽고 생각이 모자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면 김수현 씨가 참 머리가 앞섰던 것 같아요. 그 때 “저쪽으로 빨리 가야해.”라고 했었거든요.
▶ 드라마 작가를 하시면서 TV나 라디오 문화의 색깔도 많이 바꾸어 놓으셨잖아요? 맛깔스러운 대사라든지 단어의 표현에서 말이죠.
양 :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요. 제가 결정적으로 ‘더 이상 쓰지 말자, 내 색깔로 가기 위해서는 그냥 노랫말로 국한하자.’라고 생각하고 드라마를 접었던 이유는, 자꾸 열심히 쓰면 쓸수록 ‘김수현 씨의 아류’라고 해서, 차별화를 둘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접었죠.
▶ 그것을 받아들이실 분인 아니신 것 같은데요.
양 : 사실 일도 너무 힘들었고요.(웃음)
▶ 쉽게 안 쓰시고, 완벽하게 쓰시려고 했던 점도 많으시죠?
양 : 그건 능력인 것 같아요. 능력이 있어야 쉽게도 쓰죠. 항상 쓸 때마다 없는 재주를 끌어 모으느라 애를 써가면서 했었죠.
▶ 김희갑 선생님은 특히 영화음악과 뮤지컬 작업을 하신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명성황후’, ‘몽유도원도’와 같은 작품은 아주 의미있는 작업이셨죠?
김 : ‘명성황후’가 제일 처음으로 접했던 작품이예요. 연출하신 윤호진 씨가 찾아와서 같이 일을 해보자고 하셨어요. 저도 언젠가는 한 번 그런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영화음악도 약 3백편을 했었고, 미8군에서 만 8년 동안 했으니까 ‘쇼’에 대해서도 알고요. 대중음악 하는 사람은 역시 뮤지컬이 최고의 하이라이트예요. 클래식 하는 사람들은 오페라를 최고로 치고요. 또 명성황후는 처음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대사가 없어요. 전부 노래로 연결이 되니까 노랫말 자체가 대본이죠. 그래서 둘이서 작업을 같이 하게 되니까 모든 것이 상당히 쉬웠어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 두 분은 그 동안 많은 것을 이루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두 분은 아직도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있으신가요?
양 : 부족한 것 없어요. 참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고요. 한 10년 전에 제가 어떤 수술에 들어가면서 제 인생을 쭉 돌이켜 보면서 ‘아, 이 정도 살았으면 잘 살았어.’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도 그래요.
▶ 김 선생님도 계속 청년처럼 일을 하시니까 아쉬운 점이 없으시죠?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죠.(웃음)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