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만
1989년 MBC 개그맨으로 데뷔해, ‘웃으면 복이 와요’ ‘오늘은 좋은날’ 등에서 재치 있는 입담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개그맨. ‘바람돌이’ 서승만 씨.
그가 잘 나가던 개그맨 생활을 접고, 공연계에서 인정받는 뮤지컬 연출가로 변신했습니다.
그동안, 서승만 씨는 극단과 소극장을 직접 운영하고, 손수 대본도 써 가며, ‘터널’, ‘친구 친구’ 등의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려 왔는데요. 특히 2005년에 만든 어린이 뮤지컬 ‘노노 이야기’는 전국 50여 개 지역에서 5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승만 씨가 공연 연출가로 인정받기까지 처음엔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과 개그맨 연출가라는 편견, 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는데요. 최근 새로운 뮤지컬 ‘랑이 이야기’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공연 연출가 겸 제작자인 서승만 씨를 2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원조 바람돌이’ 2시간 동안 펼친 원맨쇼
▶ 이제는 개그맨 서승만보다 연출가 서승만이 더 익숙하시겠어요?
자주 들으니까 어색하지는 않은데 개그맨 서승만으로 알아주는 걸 더 좋아해요. 앞으로도 계속 개그맨 서승만입니다. 개그맨 서승만이 뮤지컬 연출도 할 수 있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어요.
▶ 개그, 대본, 연출, 운영까지 뭐든 다 잘하시는 것 같아요.
극단을 운영한지 4년째인데 제가 운영을 잘 한다기보다는 단원들이 잘 버텨주고 열심히 하니까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저는 운영은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이 분야에 뛰어들어보니까 송승환 씨 같은 분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개그맨 데뷔는 언제 했어요?
제가 82년도에 황기순, 김정렬과 같이 시작을 했다가 군대를 다녀오는 바람에 89년도에 데뷔를 했어요. 그 전에는 코미디 대본을 쓰다가 군대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죠. 제가 89년에 데뷔할 때는 애교머리 김종화라고 가끔 리포터로 활동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동기들이 운이 안 좋았는지 희한하게 뜨지 못했어요. 저만 조금 떴어요.
▶ 별명이 바람돌이에요?
요즘도 후배들을 보면 바람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요. 제가 처음 바람돌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녹화 전에 방청객들이 기다리기 지루하니까 앞에 나가서 바람잡이 역할을 했었어요. 지금은 5분, 10분인데 제가 할 때는 혼자서 2시간 동안 원맨쇼를 했어요. 매주 콘서트를 하는 거예요. 그때 그걸 하면서 스탠딩 개그라는 걸 터득한 것 같아요. 방송관계자들은 본방보다 더 재미있다고 할 정도였어요. 1년 반 정도를 했는데 나름대로 실력을 키우는데 큰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 바람돌이를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예를 들어주시겠어요?
지금도 <웃찾사>나 <개그콘서트>에서도 하잖아요. 관객들을 죽 훑어보면서 장난을 치는 거죠. “얼굴이 예쁘신데 특히 눈이 정말 예쁘세요. 눈이 잘 생긴 사람을 태어나서 2명 째 보네요. 한무하고 이 언니하고요.” 그런 거 하면서 웃는 거예요. <서승만입니다>라고 혼자 나와서 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위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위인들처럼 이상을 펼쳐라, 그러면서 앞에는 재미있게 하죠.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찰리 채플린은 어렸을 때부터 밤무대 가수였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감기로 몸져눕자 노래를 하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채플린의 신통한 모습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 팔자지, 뭐’ 그때부터 찰리 채플린은 팔자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찰리 채플린은 비행기 창가에 앉아 멀어지는 고국 땅을 바라보며 감동에 차 소리칩니다. ‘오, 뜬다. 뜬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은 칼을 높이 쳐들며 많은 병사들에게 소리칩니다. ‘이 칼 누구 거니?’” 이런 식의 반전 코미디를 좋아해서 많이 활용했었어요.
▶ 본인이 직접 대본을 쓰는 건가요?
저는 거의 직접 해요. 개그맨들의 90%는 그렇게 하고 있을 거예요. 여러 개그 프로그램들을 보면 거기에 나오는 친구들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그건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디어 회의를 새벽까지 진행해요.
◇ ‘존경하는 인물, 배삼룡’이라고 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기도
▶ 어렸을 때부터 끼가 있었나 봐요?
저도 그랬지만 개그맨 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렸을 때 조용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친구들이 하지는 않아요.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혼나는 친구들이 많이 하죠. 가끔 학창시절에 성적이 우수했던 친구들이 들어오기도 하거든요. 서경석, 이윤석은 공부도 잘 했는데 이런 친구들이 어떻게 개그맨이 되었을까 이야기를 해보면 주체할 수 없는 끼라는 게 있더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 아주 평범하게 컸어요. 수업시간에 말 많이 하고 산만하다고 혼났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안 빠지는 단어가 ‘주위가 산만하다’ ‘품행이 방정맞다’였어요.(웃음) 제가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아요. 감사한 건 어렸을 때부터 떠들다가 혼나고 주위 친구들 웃기고, 이런 걸로 직업을 삼았다는 것 자체가 선택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은 서울이에요. 당산동에 있는 영중초등학교인데 여기에 이용식 선배님, 임채무 선배님들이 계셨어요. 풍수지리상 그런 게 있나 봐요.
▶ 대학교 때 전공은 뭐였어요?
서울예대 한국무용과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 때 마당놀이 공연을 본 적이 있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는데 마당놀이를 보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윤문식 선생님과 김성녀 선생님이 나오시는데 내가 코미디를 하기 위해서는 거쳐 가야겠다, 한국무용도 나오고 소리도 나오는데 그렇다면 거기서 내가 뭘 해야 하나 나름대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무용을 해야겠다 싶어서 무용과를 갔고 지금까지 왔어요. 그런데 무용을 한 건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지금 배는 좀 나왔지만 몸이 아주 유연해요.
▶ 처음부터 개그맨을 목표로 했던 거로군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고 결국은 됐죠. 개그맨 시험을 한 번에 붙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담임선생님이 학급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세요. 에디슨이 되겠다는 아이, 탐험가가 되겠다는 아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아이도 있었는데 저는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했어요.
당시에는 코미디언이 등한시 되었을 때였는데 나오라고 하시더니 따귀를 때리시더라고요. 들어가서 앉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존경하는 사람들 이름을 대라는 거예요. 에디슨, 박정희 그러다가 제가 배삼룡이라고 했다가 약올리냐고, 나오라고 해서 혼난 적이 있어요. 동창회를 나갔는데 어렸을 때 꿈을 이룬 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 이명박 대통령도 울고 간 ‘뮤지컬 터널’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7남매 중에 막내였어요. 어머니가 저를 늦둥이로 43살에 낳으셨는데 저를 가지실 때 큰 누나가 조카를 가졌어요. 딸하고 같이 임신한 게 창피해서 저를 지우려고 약도 드시고 그랬대요. 그래서 지운 줄 알았는데 나온 거예요. 아버님은 중학교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는데 좀 연세가 많으세요. TV에 나오는 것 자체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을 닮고 얼굴은 이명박 대통령하고 닮았다고 해서 한때 포털 사이트에 뜨고 그랬어요. 사실은 닮기는 했어도 얼굴은 제가 좀 더 낫죠.(웃음)이명박 대통령을 뵌 적이 있는데 재치가 있으시더라고요. “안녕하세요. 개그계의 이명박입니다.” 그랬더니 “안녕하세요. 정치계의 서승만입니다.” 하시는 거예요.
또 제가 만든 ‘뮤지컬 터널’을 보러 오셔서 새벽까지 저랑 술 한 잔 드시고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시고 가셨어요. ‘뮤지컬 터널’이 효에 대한 이야기인데 생선장사하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청소년을 그린 거거든요.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나중에는 짠한 감동을 줘요.
그 애가 철이 들면서 어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주무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엄마, 사랑해요 하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정말로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셨더라고요. 본인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 이명박 대통령께서 어떻게 알고 가신 거였어요?
당시에 서울시장하실 때 오셨어요. 임성훈 씨가 진행하는 아침 프로그램에 나오셨는데 제가 초대 손님은 아니었지만 방송 중에 쑥 들어가서 안녕하세요? 했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사모님께 저랑 닮았느냐고 여쭤봤더니 정말 닮았다고, 그러면서 저희 뮤지컬 하는데 보러 오시라고 초청장을 드렸어요. 꼭 오겠다고 하시더니 약속을 지키신 거죠. 가겠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직접 실천하기는 어렵잖아요. 직원들하고 오셔서 표도 직접 사시고 보고 가셨어요.
▶ 개그맨 생활을 몇 년 동안 한 거예요?
89년부터 했으니까 거의 20년 가까이 했죠.
▶ 20년 동안 기억에 남는 역할과 작품을 말씀해 주세요.
코미디를 할 때는 전부 제 이름을 걸고 했어요. 다른 친구들이 꽁트할 때 ‘서승만의 여자 이야기’ ‘서승만의 바람 바람 바람’ ‘서승만입니다’ 이런 식으로요. 저는 스탠딩 개그를 하기 때문에 당연히 혼자 하면서 이름을 걸게 되었고 또 MBC 드라마 중에 <태평천하>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주인공으로 나갔었고 <홍국영>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조연으로 출연도 했었어요.
베스트극장 주인공도 하고 활동을 나름대로 다양하게 했어요. “한 마디로 굿입니다!”로 한동안 유행어를 날렸죠. 스탠딩 개그인 ‘서승만입니다’ 프로그램에서는 항상 교훈적인 이야기로 끝났어요.
예를 들어 채플린을 이야기했다면, “채플린처럼 자기의 재능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 모두의 기분은 한 마디로 굿일 겁니다.” 또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한다면 “김유신 장군처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의 기분은 한마디로 굿일 겁니다.”
꼭 막판에 말하고자 하는 덕목이나 메시지가 있었어요. 19개월 동안 진행을 했는데 방송하면서 모니터에 단 한 번도 댓글이 안 좋게 나온 적이 없었어요. 항상 칭찬받던 코너였죠.
◇ 제 까짓 게? 거봐, 망했지? 질책이 가장 힘들어
▶ 공연계와는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연극을 하고 싶기도 했고 ‘화니지니’라고 기타 치면서 개그를 하는 후배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취하니까 이 친구가 다른 방송국은 선배들이 후배들과 힘을 합쳐서 콘서트도 하고 공연도 하는데 우리는 선배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들이대더라고요. 그래서 술김에 내가 할게, 인마! 이렇게 된 거예요.
저 같은 스타일은 지나가는 말도 꼭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다음날 술이 덜 깨서 머리 아픈데도 가서 공연장 계약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된 거죠. 술김에 공연을 시작했고 술김에 한 이야기라 안 지켜도 상관없겠지만 저도 하고 싶었고 그 전에 마당놀이에 출연하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고 고등학교 때 마당놀이를 보고 나도 언젠가는 마당놀이를 하겠다고 한 것이, 당시 윤문식 선생님과 김성녀 선생님이 하시던 게 다른 방송사와 계약이 되면서 자체방송에서 만들게 된 마당놀이에 제가 캐스팅이 되었어요. 저는 계약조건도 안 물어보고 무조건 하겠다고 해서 마당놀이를 4년 동안 했어요. 제가 마음먹었던 하고 싶은 일은 전부 해봤어요.
▶ 개그맨 출신이라는 편견 같은 건 없었어요?
서승만
사실은 심했어요. 처음에는 개그나 하지 왜 이걸 하냐고 주변에서도 많이 말리고 이걸 하게 되면 금전적인 손해도 많이 볼 거라고 충고도 많았고 배우 허준호가 친구인데 이쪽 뮤지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잖아요. 너 이거 하면 명 재촉한다는 이야기도 했었어요. 해보니까 정말로 그 친구 말이 맞더라고요.
내가 수익을 따지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돈 벌려고 하면 방송하지 왜 이걸 하겠니? 좋아서 하는 거니까 열심히 도와주고 지켜봐 주라고 했는데 그 친구 말대로 정말 힘들었어요. 그동안 빚도 많이 졌는데 지금은 갚기 시작했어요. 수익으로 돌아섰다고 하면 성공한 거죠. 하지만 수익을 떠나서 작품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가는 거예요.
▶ 흥행이 안 돼서 힘들었던 건가요?
흥행이 안 될 때도 그렇지만 사람 마음을 몰라줄 때 가장 힘들어요. 처음 기획하고 제작할 때 각 단계마다 배우들에게 전부 오픈을 했었어요. 그러니까 믿고 따라오는 것 같아요. 힘들었던 건 금전적인 부분도 있었고 주변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제 까짓 게 뭘 해? 이런 게 힘들었어요.
저희는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팔고 잘난 체 하는 걸 좋아하니까 이런 걸 했는데 안 되니까 잘난 체를 할 수 없는 거예요. 거봐, 망했지? 이런 식으로 주변의 격려보다는 질책이 심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들 인정해 주니까요.
▶ 대학에서 연출 공부도 많이 했었다고요?
연출을 해보려고 국민대학교에 편입해서 공연연출 무대전공을 했어요. 저를 보면 집사람과 후배들이 놀래요. 잠 안자느냐고요. 제가 워낙 쏘다니고 다니는 걸 좋아하고 바지런한 편이에요. 잠도 별로 없고 어떤 일을 했는데 마무리가 안 되면 마무리가 될 때까지 아무 것도 못 해요.
▶ 극단을 운영하려면 CEO로서의 마인드도 갖춰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개그맨 마음만 있어서 흥행에 성공한 적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무대를 좋아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다 보니까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요.
◇ 창작 뮤지컬, 작품으로 승부
▶ 첫 작품은 뭐였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뮤지컬 터널인데 이걸 만들고 나서 인정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개그맨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경원시했는데 남경읍 씨라고 굉장히 뮤지컬을 오래 하신 분이 계세요. 뮤지컬계의 최불암 씨에요. 처음에 그분을 섭외하러 갔는데 1년에 한 작품밖에 안 하시는 분이에요.
제가 막 가서 설득을 하는데 개그맨이 뮤지컬을 만든다는 걸 안 믿었었어요. 몇 번을 찾아가서 그럼 대본을 읽어보고 결정하시라고 대본을 주고 왔거든요. 그런데 전화가 왔어요. 대본이 좋다고 같이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하면서 각종 연극협회에서 오셔서 잘했다고 칭찬도 들었어요.
<명성황후> 윤호진 교수님께서도 오셔서 보고 창작뮤지컬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구나 하시면서 칭찬도 해주셨어요. 초청을 했는데 바쁘셔서 잘 안다니세요. 그런데 우연찮게 오셔서 칭찬해주시고 많이 힘이 되었죠.
▶ ‘노노 이야기’로 상도 받으셨어요?
노노는 ‘NO NO, 아니요 아니요’란 뜻이에요.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 뮤지컬인데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이 1위에요. 저도 고만한 아이들이 있어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7살, 6살 아들만 둘인데 미취학 아동들이 가장 사고를 많이 당한다고 해서 이 아이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작품이 너무 좋다고 평가를 받아서 경찰청과 행정자치부, 그리고 모 자동차 회사의 후원을 받아서 전국순회공연을 했죠. 거의 50만 명 정도의 아이들이 봤어요. 2005년부터 3년 동안 했는데 2006년과 2007년에는 행자부장관 상을 타고, 저는 지금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 홍보대사에요. 올해도 전국순회공연 계획을 갖고 있어요.
▶ 창작뮤지컬로는 돈을 벌기가 힘들다는데 서승만 씨는 창작뮤지컬을 고집하고 있어요?
제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요. 저도 역시 수입뮤지컬을 봐요. 정말 화려하고 음악도 좋고 재미있고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기는 한데 우리 정서에 맞는 즐거움이 빠졌다고 할까? 그렇다면 나라도 하자, 어차피 수입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다른 분들도 창작 뮤지컬에 힘을 쏟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 정서에 맞는 걸 하는 게 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창작을 고집하고 있죠.
▶ 지금 공연 중인 <랑이 이야기>는 어떤 거예요?
어린이 뮤지컬인데 요즘은 한 가정에 아이가 많아야 둘, 보통 하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를 너무 귀하게 키워서 엄마한테 말대답하는 것도 많고 엄마의 소중함을 별로 모르는 것 같아요.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작품이 뭘까 고민하다가 랑이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랑이가 호랑이에요.
은혜 갚은 호랑이를 나름대로 각색을 했어요. 약간 뒤에 감동을 주는 내용으로 바꿨죠. 제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지 아동물을 만들면 수준이 맞더라고요.(웃음) 아이들을 위해서 심사숙고해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 극단의 단원이 모두 몇 명이에요?
12명이에요. 제가 그 친구들한테 지키는 게 있어요. 출연료를 주는 날을 절대로 넘기지 않아요. 정확하게 주고, 공연계에서 그렇게 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다른 곳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못 받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계약한 건 정확하게 주고 제가 또 능력이 돼요.
지금까지는 마음먹으면 돈을 벌 수 있잖아요. 만약 공연수익이 발생되지 않으면 행사 가서 사회보고 야간업소를 뛰어서라도 출연료를 채워줬어요. 단원들도 알아요. 공연계가 어려운데 대표가 나를 위해서 책임을 져준다는 걸 알고 믿고 따라오는 부분이 있어요.
◇ ‘고시’로 만난 아내, 마음은 천하일색
▶ 부인이 엄청난 미인이시라면서요?
다른 후배들을 보면 부인이 미인인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저희 집사람은 마음이 예뻐요. 살아보니까 여자는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사실 만난 것도 코미디에요. 집사람이 이대 행정학과를 나왔는데 아내는 고시공부를 하러 오고저는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에 들어갈 코너의 대본을 쓰러 도서관에 갔었어요. 밤에 커피를 마시려고 자판기 앞에 섰는데 당시에는 제법 유명할 때라서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집사람은 못 알아보는 거예요.
자존심이 있어서 누군지 모르겠느냐고 했더니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대요. 나, 개그맨이야 그러기는 창피하고 “여기 총무야” 그랬어요. “너는 뭘 공부하는데 밤늦게까지 하냐?” 물었더니 고시공부한대요. “내가 고시출신이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라” “어머, 그러세요?” 그러고 헤어졌어요.
며칠 있다가 절 보더니 “지난번에 고시 보셨다고 했죠?” “응, 한 방에 됐지” “그럼 이건 뭐예요?” 하면서 책을 내미는데 한문이 더 많은 거예요. 보니까 헌법책이에요. “너 검정고시 아니니?” “아닌데요” 저는 와이프가 굉장히 어려 보여서 검정고시 준비하는 줄 알고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한 건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거기 대충 3번 이상 읽어보면 알 거야” 얼버무리고 자리를 떴어요. 그 이후에는 코너가 없어지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안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6개월 후에 교회에서 만났어요. 친구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갔다가 본 거예요. 그 이후에는 서로 연락하면서 귀여운 동생으로 알고 지내다가 정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오랫동안 같이 있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하자고 했죠. 집사람은 결혼하고 나서 2년 정도 더 고시공부를 하다가 2년 후에 아이를 갖고 살림을 했는데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해서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국문학 박사 코스를 1학기 남겨놓고 있어요. 저는 석사코스로 2학기 남겨놓고 있고요. 집사람이 저랑 7살 차이인데 남들이 부러워해요. 같이 다니면 오누이 같다고요.
▶ 제작자, 연출가 다 접고 개그맨으로 가고 싶은 적은 없으셨어요?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즐겁게 해주는 스타일이고 조용한 적이 별로 없어요. 잘 때도 잠꼬대를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활동을 하던 안 하든 평생 개그맨이니까 개그맨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방송국도 해야죠.
◇ 연기와 공연을 아우른 ‘영원한 개그맨’
▶ 극단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기억이 있다면요?
작년에 <노노 이야기>를 가지고 상을 받았는데 제자 중에 최혜수라는 단원이 상을 받았어요. 그걸 받으면서 저희 단원들이 전부 홍보대사가 됐어요. 공연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인데 출연자들이 행자부 어린이 교통사고 예방 홍보대사로 위촉을 받은 거예요.
그때 너무 기분이 좋았죠. 그리고 제가 공연을 하면서 5,6살 된 아이들의 엄마한테서 꽃다발도 받고 팬레터도 받았거든요. 공연이 끝나면 아이들이 <노노 이야기> 주제가를 흥얼거리면서 나와요. 그런 걸 보면 굉장히 흐뭇하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아이들을 위해서 끝까지 해야겠구나 하는 사명감도 생겨요.
▶ 아동물만 하시는 건 아니시죠?
지금 <친구 친구>라고 노처녀 3명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던 남자친구가 들어가면서 4명이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편의 시트콤처럼 엮어가는 거예요. 이건 젊은 사람들인 20대 중후반의 아가씨들이 너무 좋아해서 7,8번을 본 사람도 있어요. 저녁때는 그 공연을 해요. 성인극과 아동극을 다양하게 하고 있어요.
▶ 10년 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 거 같으세요?
TV에서 멋진 연기도 하고 공연도 병행하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친구>노노>노노>웃으면>랑이>명성황후>홍국영>태평천하>서승만입니다>개그콘서트>웃찾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