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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묻으면 새들은 체온이 떨어져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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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1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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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새 따라 50년 인생, 이정우 삼육대 교수

충남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사고로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갯벌과 바다를 잃은 어민들의 생계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수로 환경이 파괴됐다는 게 큰 걱정인데요. 새까만 기름으로 덮여 죽은 새들 사진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신 분들 많을 겁니다.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를 좇아 평생을 살아온 삼육대 이정우 교수. 동서조류연구소장, 삼육대 응용동물학과 교수, 새 박사, 문화재청 박제사 1호 등 직함은 많지만 이정우 교수는 새들의 아버집니다. 그는 간척지와 갈대숲을 집 삼아 살면서 50년 넘게 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새들을 만나고 관찰했는데요. 인적 없는 섬마저도 그의 발길 안 닿은 데가 없을 정돕니다.

‘환경생태 연구의 첫걸음이 바로 새 연구다’라고 말하는 이정우 교수를 12월 17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고등학교 때 방학 때마다 조류탐사... ‘팔색조’를 발견하기도 해

 

▶ 태안에 다녀오셨다고요.

저는 예전부터 태안반도와 인연이 있는 곳인데요. 제가 100여종의 새를 기르던 것을 그 곳의 아는 농장에 위탁관리를 시켜둔 곳입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다녀왔습니다. 첫째는 이번에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서 그 새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니까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가늠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몇 마리 피해를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지 않고 두고두고 세월이 지나면서 ‘오일볼’이라는 기름덩어리가 다니면서 새 몸에 붙어 버리면 그대로 풀려 버리거든요. 물새를 크게 나눈다면, 지면 위에 떠서 사는 새가 있고, 또 물속으로 들어가서 고기를 잡아먹는 잠수성 조류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것이라고 할지라도 심각한 것은 그 수면 위에 떠 있는 기름입니다. 물 속에서 먹이를 먹고 올라오면 완전히 온 몸에 기름을 뒤집어쓰거든요. 아스팔트를 뒤집어 쓴 것 같은 그런 형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묻으면 체온이 식지 않도록 하면서 빨리 열을 가하면서 새의 몸에 묻은 기름을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류들은 체온이 40도 정도 되는데요. 기름이 묻게 되면 그 체온이 유지되지 않고 자꾸 떨어집니다. 그러면 새들이 죽게 되는 거죠.

▶ 기름유출 사고 당시 사진과 영상들을 보면 ‘뿔논병아리’가 나오던데요.

‘뿔논병아리’도 있고, ‘아비’라는 것도 있습니다. 순전히 물속으로 들어가서 먹이를 먹고 수면으로 올라와서 숨쉬는 새들입니다. 그런데 그 새들이 먹이를 먹고 올라오다가 기름을 완전히 뒤집어쓰게 됩니다. 한 번 묻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요. 아마 지금 말도 못할 겁니다.

제가 학암포 쪽으로 가서 둘러보니까 어민들이나 군인들,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정말 몸을 바쳐서 하고 계시고, 환경단체에서도 애를 많이 쓰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광경을 보고 나왔는데, 정말 한 마리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특히 미안한 것이 한 가지 있어요.

그 곳에 생계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이나 바닷가에 사시는 분들, 사업을 하는 분들, 이 분들에게는 정말 치명타거든요. 그런데 새 문제로 이야기를 하자니, 날보고 미친 놈이라고 해요.(웃음) “지금 새 한 두 마리 죽는 것이 문제냐? 우리는 완전히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이 몰살하는데...”라고 말이죠.

▶ 현재 삼육대학교 응용동물학과 교수로도 계시고, 동서조류연구소장, 문화재청 박제사 1호 등 직함이 많으세요.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네요. 이 일을 오래 하다보니까 조그마한 일들을 여러 개 맡게 되었네요.

▶ 새 연구를 50년 동안이나 하셨는데요. 특별히 ‘새’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사람이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예를 들면 어떤 아이들은 지나가는 차를 딱 보면 알아맞추는 아이들도 있고, 음악 신동들도 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도 있고요. 그런 것을 볼 때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특성과 타고난 특기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실 저도 새를 좋아하게 된 것이, 제 고향이 부산인데요. 부산이 바로 낙동강 하류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쯤 되면 낙동강에 내려왔던 기러기들이 부산 서구 쪽으로 휭하니 도는 비행을 하는 것을 보고 아주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저 새들이 어디서 왔을까?’하는 생각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어요.

▶ 정말 새에 열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는데요. 1958년 7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산 자연생태계 조사반이셨어요.

정말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는 말이 있는데요. 저는 좀 버리기 싫어하는 편이라서 잘 모으는 편입니다. 저는 지금 쓰고 있는 사무실이 지난 10월 23일부로 30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쓰기 편리하고 정들었기 때문에 쓰는데요. 정말 이 사진이 빛바랜 사진인데, 지금까지도 남아서 추억을 주는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자연생태계 조사반'을 하시던 때가 고등학교 때였나요?

네.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어릴 때는 좋았던 것이 사냥꾼 따라 다니던 것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동물을 잡는 것이 불행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동물에 대한 존엄성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모르던 시절입니다.

제가 어릴 때 보면 부산에 검정다리라고 하는 곳에 약초를 파는 곳이 있었어요. 거기에 가보면 족제비나 두루미, 독수리를 달아놓고 파는 곳이 있었어요. 어릴 때는 그런 것을 보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워서 어릴 때도 보면서 ‘저걸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저런 것은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두면 썩으니까 박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다행히 나중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또 부산에는 낙동강이 엄청나게 새가 많이 오던 곳입니다. 지금은 개발되어서 다 떠나고 가창오리 같은 경우도 다 서산으로, 해남의 고천암호로 분산되었죠.

▶ 고등학생 때 ‘팔색조’도 관찰하셨다고요?

고등학교 때 동물원을 해보고 싶어하는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조사가 안 되어 있으니까 자네가 체계적으로 조사를 한 번 해보지.”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갔던 곳이 거제도 해금강에 ‘학동’이라는 좋은 자갈밭이 있습니다. 그 곳의 중간쯤에는 엄청나게 큰 동백나무 숲이 있고요. 그 곳의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서 새를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우연히 팔색조가 잡힌 것을 보게 되었죠.

▶ 팔색조인지 금방 알아보셨나요?

그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책이 있었는데요. 1950년에 발행한 유일하게 한국 사람이 쓴 ‘조류목록’이었어요. 그런데 팔색조라는 그림이 나오고, 실물과 비교해보니까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안 일이지만 팔색조라는 새가 일본의 한 교수가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이것이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 거제도에 살고 있다는 내용으로 바로 제가 발견한 때였죠.

제가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 때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화대학에 계시던 김헌규 교수였는데, 그 당시에 그 분이 코넬대학을 나와서 우리나라의 아주 석학이었는데 그 분을 만나면서부터 제 인생이 많이 달라졌죠.

▶ 그러다 보니 집에서 자는 날이 손꼽을 정도로 새를 찾아서 여러 곳을 다니셨는데요. 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생활을 계속 하신 건가요?

고등학교 때는 공부도 해야 하니까 주로 여름 방학 때 한 달 간 텐트 쳐놓고 밑에 이끼 깔고 지냈죠. 그 때는 지금처럼 좋은 텐트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천막 안에 뱀이 들어온 경우도 있었어요.(웃음) 비를 피해서 개구리가 들어올 때도 있었고요.

▶ 식사를 해결하는 문제도 그렇고, 교통편도 그렇고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그 호기심의 두께는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등대’쪽에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갔죠. 그런데 그 등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거든요. 또 그 때는 어릴 때니까 돈이 없어서 배를 대절할 수도 없었어요. 그 당시는 거제도에서 부산가는 배가 8시간 걸리던 때였습니다. 그런 배를 타고 거제도에 들어가서 팔색조를 찾고, 여수쪽에 나가서 섬마다 찾아다니는데 그 고생이란 말도 못하죠.

어떤 섬에서는 배로 실어다 준 사람이 약속을 안 지켜서 섬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너무 배고프고 정말 춥고 해서 혼난 일도 있어요. 저를 태워다 주고 나갔던 사람이 밖에서 술먹고 저를 다시 태우러 오는 것을 잊어 버린 거죠.옛날에 보면 참 안타까운 것이, 떨어진 섬에 있는 등대에 전화가 하루에 두 번 교신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8시에 돌려서 그 때 잠깐 교신하고 끊어버리고 하던 때였죠. 그러니까 전화가 있어도 아무 때나 통화하기는 힘들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요즘 휴대폰 나오고 난 다음에는 정말 편리하죠.

▶ 그럼 식량같은 것은 어떻게 하셨어요?

요즘은 라면도 있고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도 없어서, 쌀을 가져가서 끓여 먹는 경우가 가장 많았죠. 그 당시에는 코펠도 없어서 군대에서 쓰던 옛날 ‘항고’라는 것을 가져가서 불을 때서 해먹었죠. 제일 좋은 반찬은 시장에 가면 가끔 구할 수 있었던 군대 멸치였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가면 고추나 양파 얻고 된장 좀 얻어다가 먹고 했죠.

◇ 동물을 사랑하시던 부모님, 애완동물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

 

▶ 집에서 어른들은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박제를 시작했는데요. 박제에 쓰는 방부제로 ‘아비산’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제가 다 개발했어요. 그 약이 얼마나 독하냐면, 아주 오래 전에 독약으로 ‘비상’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좁쌀알만큼만 먹어도 얼굴이 창백해집니다. 그것을 처음에 방부제로 썼었는데, 그걸로 작업을 하다보면 얼굴의 땀구멍에 화농이 생깁니다. 코로 마시면 코 안에 흐르고요. 입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헐어버리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것을 잘 몰랐죠. 그래서 그 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옷에 자꾸 묻으니까 어머니가 걱정을 하신 거예요. ‘창병(성병)’이 걸렸다고 말이죠. 정말 나도 모르게 그 약이 묻어서 그랬는데, 어머니는 제게 말도 못하고 걱정을 하신 거죠. 결국 한참 만에 물어보셔서 이유를 말씀드렸더니, 제발 치우라고 하시는 거예요.

또 박제를 할 때는 방부제도 넣고 솜과 철사도 넣는데, 솜을 살 돈이 없으니까 집에 있는 이불속에서 솜을 뜯어다가 넣고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죠. 그런데 어머니가 제가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이불을 다시 꿰매놓고 하셨죠.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찡합니다.

▶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님이 동물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희 집이 좀 여유가 있었을 때는 집 뒤에 텃밭이 1,800평 정도 있었는데, 거기에서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기르고, 오리와 염소도 길렀어요. 토끼와 새도 기르고요. 그런데 삼촌은 동물 기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어요. 항상 저에게 공부 안하고 맨날 그런 것만 한다고 하시면서 제가 만들어 놓은 새장을 발로 차곤 하셨죠. 결국 몇십 년이 지난 요즘에는 그 삼촌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그래서 예전에 새장 부순 이야기 하면 씩 웃고 하시죠.

▶ 그런 환경적이 요인이 이 교수님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네요.

예. 아마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생을 두고 가지 못했을 것 같고, 제가 또 개를 그렇게 좋아해서 개를 가지러 진도에 가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한참 개를 모으다보니까 개가 너무 많아서 이름을 지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어린 소견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수컷은 산의 이름으로 짓고, 암컷은 강의 이름으로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 집 개 이름 중에는 ‘낙동이’도 있었고, ‘섬진이’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름만 들어도 암캐인지 수캐인지 알 수 있었죠. 그런데 어린 개들은 일찍 젖을 떼면 빌빌 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어머니가 그 개에게 직접 젖을 물리시더라고요. 그런 것을 참 잊을 수가 없어요.

▶ 어머니의 생명 사랑이 참 대단하셨네요.

예. 제가 그런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 그럼 대학은 조류학과로 가신 건가요?

그 당시에는 생물학과도 별로 없었고요. 저는 행정학과를 나왔습니다. 그 때는 갈 곳이 없어서 갔죠.

▶ 그러다가 또 새를 찾아 가신 건가요?

네. 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야생조류와 관상조류로 나눕니다. 과거에는 생물학과에서만 새에 대한 연구를 했었는데,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 애완동물학과도 생겼죠. 왜 그런 현상이 생겼냐 하면 산업과 연결이 안 되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문학과 나와야만 소설을 쓰느냐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그래서 모든 분야의 학문이 산업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게 세상은 많이 바뀌어서 기르는 새도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커리큘럼에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야생조류 연구와 기르는 새에 대한 것까지 하다보니까 바쁘게 연결이 되고 있어요.

▶ 1981년도에 피음도에서 ‘괭이갈매기’와 ‘슴새’의 집단 서식지를 발견하셨다고요?

예. 그런데 이 피음도라는 섬이 서해안 장항에서 배타고 2-3시간 정도 나가면 있는 섬인데요. 그 곳이 현재는 미군 팬텀기가 사격연습하는 자리예요. 제가 그 섬에서 새가 번식한다는 얘기를 듣고 가봤어요. 그랬더니 괭이 갈매기와 슴새가 온 섬을 덮고 있는데, 그런 섬에 폭격을 하고 있으니 ‘이건 안 되겠다’하고 생각을 했어요. 슴새가 주로 밤에 많이 나오는 새인데, 슴새가 많이 놀라서 그런지 바위 틈에 박혀서 죽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방송에도 알리고, 신문에도 내고 했는데, 미군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서로 못 본 척 하더라고요. 결국 다른 섬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았는데, 피음도만은 귀중한 섬인데도 아직도 전혀 거론이 없습니다. 제가 그 섬에 두 번 갔습니다. 조사는 했었는데, 아직도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빨리 미군들이 다른 섬을 쓰도록 하고 이 피음도는 보존을 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보면 그런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2차 대전 때 미군들이 쓰던 섬이 있었는데, 그 섬에는 노오구치 딱따구리가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일본이 미군에게 다른 섬으로 바꿔준 경우도 있습니다. 피음도도 그런 식으로 하자는 이야기죠.

▶ 지금 ‘저어새’는 지구상에 몇 마리 남아 있지 않다면서요?

맞습니다. 지금 1백마리에서 몇 천 마리 정도 남아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전혀 안 맞는 소리입니다. 단 하나 이 저어새라는 새는 우리나라에서 현재로서는 번식을 하는 새입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서해안의 섬에서 번식을 한 일이 조사 되어 있지만, 이것을 찾으려고 제가 엄청나게 다녔어요. 그래서 위도라는 섬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 근처를 다 돌아다녔는데도 못 찾았죠.

그러다가 1991년에 신문사에 하던 사업 중에 새를 찾아가는 사업이 있었어요. 그래서 기업에서 지원을 받아서 갔었는데 그 때 우연하게도 영광군 칠산도라는 섬에서 그 저어새가 번식하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찾아냈어요. 그 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를 못했거든요.

그 섬에 갔을 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너무 힘들어서 누웠다가 눈을 딱 떴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저어새가 바로 코앞에 나타나 있는 거예요.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했습니다. 그 때 새끼 한 마리와 부화 직전의 알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죠. 그 때가 한국사람이 번식지를 찾은 첫 케이스였죠. 그리고 1995년에 연평도 앞의 우도라는 섬에 갔어요. 거기는 이북과 바로 보이는 곳이죠. 거기는 원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방송에서 협의를 잘 해서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 박제는 동물 연구를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자료

▶ 그렇게 새 따라 다니시느라고 결혼도 마흔에 하셨다고요.

예. 누가 봐도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을 겁니다. 우선 사람을 볼 때 경제적인 조건을 많이 보는 시대니까요. 그런데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제가 선을 한 50번은 본 것 같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어떻게 중매로 만나서 지금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 새를 찾아 많이 돌아다니시다가 그야말로 새 둥지를 트시니까 어떠셨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돼서 애먹었어요. 이때까지 혼자 살 던 것이 정리가 되고 따뜻한 가정을 갖게 되니까 제 자신이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또 아이가 태어나니까 집을 얼른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는 세를 살고 있었는데 밤에 애 울음소리가 나니까 집주인이 싫어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 낳고 집도 사게 되었죠.

그 당시에 또 어려웠던 것이 방송이나 일이 생기면 안 갈 수가 없었는데, 한동안 집을 떠나서 일하다가 집에 와보면 누워있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앉아 있는 겁니다. 또 어느 때 가보면 기어다니고 있고요. 크는 과정이 새가 자라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과 좀 비슷하다는 것도 느끼면서 그런 인생을 보냈습니다.

▶ 환경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데, 나중에 저어새가 박씨 하나 물어다 주는 것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웃음) 제가 주로 하는 박물관 쪽에 신고가 들어온 폐사한 동물들의 박제 표본들이 있는데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태안에서 기름이 묻은 동물들도 빨리 깨끗하게 씻겨주면 살 수도 있고, 죽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표본으로 가능하거든요. 이런 것을 제가 여러 번 해봤어요. 조류 동아리 학생들이 폐사한 새들을 가져다주면 그것을 처리해서 박제로 만들었을 때 참 보람이 있죠.

▶ 우리나라 박제사 1호시죠?

그 때는 박제하는 사람의 권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밀렵과 박제는 이상스럽게 연관이 되어서 밀렵 단속 나오면 박제를 만들려고 했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천연기념물이라든지 귀한 동물들을 박제할 수 있는 것은 자격을 주어서 면허를 해주어야겠다는 취지에서 그런 면허가 생기게 되었죠. 지금도 현재 1년에 한 두 명씩 배출되고 있습니다.

▶ 2005년에는 대우빌딩에 솔부엉이가 부딪쳐서 뇌진탕으로 부상당한 것을 치료해서 보내신 적도 있으시다고요?

저희 동서조류연구소가 구난당한 야생조류를 돌보는 곳이거든요. 그래서 신고가 많이 들어옵니다. 일반 구청의 녹지과에서 신고가 들어오면 저희한테 연락해주기도 하고, 119에서도 저희에게 연락을 해줍니다.

▶ 좀 저속한 표현으로 ‘새대가리’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새가 정말 아이큐가 낮아서 그런 건가요?

저도 참 그런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새가 아이큐가 낮은 것은 절대 아니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듣기 싫은 소리가 있어요. ‘조류 독감’이라는 소리 듣기 싫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가금류 인플루엔자’이거든요. 닭이나 오리처럼 닭사료를 먹는 것을 가금이라고 하는데요. 거기서 변형된 바이러스가 나오는 것이 인플루엔자이죠.

그런데 이것이 어느 정도로 나쁘게 되어 있냐 하면, 우선 제가 해명을 하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전 세계에 독감 환자 중에 50만에서 60만 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적도권에서 유사 조류독감으로 죽는 경우는 1년에 4-5명 죽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주변 국가에서 조류독감으로 죽는 경우는 1년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1997년도에 조류독감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는데요. 그 때 제가 여의도에서 새 전시를 할 때였어요. 처음에 새 구경을 오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취소가 된 곳이 400여 군데 되었습니다.

▶ 한강에 폐사된 채로 돌고래가 발견된 적도 있었는데요. 돌고래가 한강에 나타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건가요?

일부 부패되긴 했는데 실제로 한강에 나타났습니다. 돌고래가 어떻게 한강을 올라왔는지는 지금도 굉장히 의문스럽습니다. 돌고래가 한강에서 발견된 것도 우리가 기록을 꼭 해둘 필요가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돌고래는 보통 표본을 만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표면이 매끈매끈하기 때문에 굳혀 버리면 표면이 다 터져 버립니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표본이 안 된다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갈라지는 것을 안 갈라지게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표본을 해서 지금은 서울시 한강관리사무소에서 가지고 있을 겁니다. 돌고래가 한강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런 표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 도심에서도 새들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

▶ 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새가 따로 있으신가요?

특별한 것은 없는데요. 그 동안 지켜보면서 조금 더 정이 든 새는 있죠. 어느 새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 중에서도 지금 자꾸만 없어져 가는 새, 현재로서는 천연기념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귀중한 새들이 우리나라에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잘 발굴해서 보존해야겠죠.

그리고 표본들은 대개 자연사박물관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지금 자료가 별로 없으니까 무조건 외국에서 수입해다가 완전히 외국 박물관을 만들고 있어요. ‘부산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한다면, 부산 그 지역의 자연사물을 정리한다는 그런 뜻인데 말이죠. 자료가 없다보니까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해서 외국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이식이나 보관, 혈통연구, 인공증식에 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까?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이 인공증식입니다. 관상조류 중에 앵무새 같은 경우는 지금도 충분히 번식을 시키거든요. 중국은 오래 전부터 사향노루를 인공번식 연구를 해서 지금은 대성공을 했죠. 중국 호랑이도 번식하는 곳이 많습니다.

▶ 새에게서 배우는 인생철학도 많이 느끼셨겠어요. 우리에게 주는 인생의 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새를 보면서 그 정직함을 배우게 되죠.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잖아요. 잘 먹여야 번식하고 잘 먹여야 잘 살거든요. 잘 못 먹이면서 새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어요. 또 새 중에는 말하는 새도 있잖아요. 개들은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말하는 개는 없거든요. 말 잘하는 새들도 참 많습니다. 일본의 연구 자료를 보면 회색앵무가 140단어를 구사했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구관조도 그 당시 유행했던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네 소절 정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시장에 그 새를 내놓으면 사람들이 다 놀랬죠. 새들한테 정확하게 가르치면 잘 하는데, 또 어떤 새들은 잘못 가르쳐서 욕을 배우는 경우도 있어요.

제가 아는 후배 중에 대전의 신학교 기숙사에서 공부를 할 때였어요. 무료하니까 기르던 구관조를 자기 방에 가져다 놓았대요. 그런데 학교에 말하는 새가 있다고 소문이 난거예요. 그래서 학장님이 새소리 좀 듣겠다고 오셨는데, 이 새가 왜 그 순간에 그랬는지 그야말로 희한한 일이 생겼어요. 학장님이 “여보세요?” 라고 하니까 “야, 임마!” 하더랍니다. 그래서 새 주인이 시킨 것도 아닌데 얼굴을 못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 새들의 자식사랑도 엄청나죠?

새들의 그런 본능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죠. 저는 새를 기르면서 새에게 도움을 받은 경우도 있어요. 옛날에는 연탄을 많이 썼잖아요. 그 때 앵무새가 깨워서 일어난 일이 있었어요.

▶ 그 때 혹시 연탄가스를 마셨던 건가요?

잘못해서 가스가 새는데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앵무새가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난거예요. 그래서 눈을 떠보니까 가스 냄새가 나서 창문을 열었었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앵무새가 느낀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앵무새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 당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새에 대한 교훈 얘기를 했는데, 새는 절대 거짓말 하지 않거든요. 정성들인 만큼 꼭 보답을 해주기 때문에 저는 새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새들을 보면 먹이를 가져다주다가도 날 때가 되면 냉정한 것 같던데요?

그럼요. 예를 들어 매 같은 경우는 어느 섬이든지 섬 하나에 한 쌍이 삽니다. 그런데 그 섬은 대개 이동하다가 중간 기착지가 될 만한 섬이 매가 사는 섬이거든요. 우리나라에도 보면 여러 곳에 있어요. 그런데 그 새가 번식을 하면 많이 해봤자 세 마리 정도 합니다. 그 새끼가 크면 멀리 쫓아버려요. 너하고 살다가는 내가 굶어죽겠다고 하면서 사정없이 다른 섬으로 쫓아버려요. 그런 것이 조류의 세계에도 있어요. 냉정할 때는 굉장히 냉정해요.

▶ 지금도 참 신기한 것이 철새들은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그 수만리 망망대해를 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제가 찾아다닌 섬 중에는 칠산도라는 섬도 있고, 칠발도, 가거도 등 섬이 많은데요. 그 섬을 찾아다닌 이유가 그 계절에 따라 철새가 이동을 하는데, 그 섬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다니다 보니까 5월쯤이면 그 섬에 무슨 새가 왔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고, 기록을 보면 틀림없이 맞아요.

그래서 그 섬을 떠나지 못하는데 이것도 나이가 들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제자를 하나 길렀더니, 그 사람이 홍도에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철새 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심심하면 전화해서 “오늘 뭐 왔어?” 하고 물어보면 그 날 참 기분이 좋아요.

▶ 섬 다니시면서 위험했던 적도 많으셨죠.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옛날에는 하고 다니는 행색이 꼭 ‘간첩’같았어요. 배낭에, 콤파스, 카메라 넣고 다니니까 꼭 간첩 같았죠.

▶ 새들이 수만리 허공을 날아 갈 수 있는 지혜는 뭔가요?

세계적으로 실험을 많이 했습니다. 뇌에 자석을 달아서 교란을 시키면 방향설정이 안 되는 실험도 했는데요. 제가 볼 때는 새는 뇌에서 자계가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북쪽을 보는 혹은 남쪽을 보는 자계가 작동하는데 너무 정확해요. 그리고 시기가 일정하고요. 섬에서 자면서 새를 관찰해보면 내일 아침에 새가 올지 안 올지를 제가 알고 있어요. 바람부는 날 많이 옵니다. 바람불어야 빨리 오니까요. 바람이 없는 조용한 날은 그 다음 날 보면 이동 중인 새가 없어요.

▶ 뭐니뭐니해도 환경의 오염으로 개체수도 줄고, 심지어 멸종의 위기에 놓이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시죠?

그렇습니다. 지금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일 중에 하나가 도심에 높은 건물들이 지어지고, 유리창이 큰 빌딩들이 많이 지어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새들이 한없이 내려오다가 그 유리창을 하늘인 줄 알고 들이 받아버리는 경우가 참 많아요. 호랑지빠귀, 소쩍새 같은 경우가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새인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걱정입니다. 도심에 사는 황조롱이도 말할 것도 없고요. 개발을 하더라도 새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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