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유명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면서소위 ‘잘 나가는 의사’로서의 삶이 예정돼 있던 외과의사 장순명 씨! 30년 전, 그는 정부의 의료사절단으로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면서삶의 길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데요. 젊은 외과의사가 본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장순명씨는 귀국 후, 다시 평범한 의사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가난과 질병에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의료봉사를 결심하게 되는데요. 충북 음성군의 꽃동네로 들어가 10년 넘게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잠비아로도 의료봉사를 떠났습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내가 필요한 곳이면 당장 달려가겠다는 외과의사 장순명 씨를 11월 1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어린 시절 읽은 슈바이처의 이야기... 의사의 꿈 갖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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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드라마를 보면, 외과 의사의 모습이 많이 나오던데요. 외과의사 라는 직업이 실제로 그렇게 멋지기만 한 것은 아니죠?
예. 물론이죠. TV에 멋진 면이 부각돼서 그렇지만 그 직업 자체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죠. 하지만 또 그것을 긍정적으로 잘 살려 나가면 참 좋은 경우가 많이 있고요. 드라마에 외과의사가 출연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껴봐도 임상에서 실제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 장 선생님은 어느 분야세요?
제가 공부할 때만 해도 그렇게 분야가 세분화 되어 있지 않아서 일반외과를 공부한 다음에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흉부외과를 공부했습니다.
▶ 의사분들도 직업병이 있으신가요?
많을 겁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해보니까 아주 극도의 정신적인 육체적인 노동자입니다. 환자를 본다는 것이 앉아서 말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까 아주 많은 체력이 필요하거든요. 의사들도 병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니까 아마 나름대로 아픈 분들도 많을 겁니다.
▶ 지금은 어디서 일을 하고 계신 거죠?
저는 지금 경남 밀양에 있는 ‘영남 병원’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하고 있고요. 어느 정도 돈이 축적이 되면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어려운 아이들한테 갈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 단계죠.
▶ 의사로서 몇 년 정도 일하신거죠?
40년째 됩니다.
▶ 올해 ‘인촌상 의료봉사 공로상’을 받으셨는데요. 이 상이 의료봉사상으로는 어떤 전통을 갖고 있는 상인가요?
아마 이 인촌상이 의료봉사상 하나만의 의미는 아닐 겁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옛날 우리나라가 19세기말에 어려울 때에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많은 애를 쓰셨고 국가재건에 공헌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해서 상을 제정했고, 그 분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해서 수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어떻게 그것을 받게 되었는데, 그 중에 봉사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그랬는지 참 고마운 상을 받았습니다.
▶ 2002년 ‘서울 시민대상’도 받으셨죠?
예. 그 상도 어떻게 우연하게 받았습니다. 꽃동네가 인연이 되어서 사람들이 좋게 봐주었고 추천을 해서 상을 받게 되어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 맨 처음 의료봉사를 떠나신 것이 1975년이세요? 그럼 30년 전이네요?
예.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대단히 폐쇄적인 사회가 돼서 일반 서민들이 외국에 나가 보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심을 갖게 되는데요. 저는 그 전에 어릴 때 아버지가 ‘학원’이라는 월간 잡지를 사다 주셨습니다. 그 잡지에 슈바이처의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그 당시에는 슈바이처가 살아 있었습니다.
콩고 랑바레네의 숲과 원시림 사이에서 일하시는 그 분이 나이 서른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의학을 공부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같이 인생을 지낸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느꼈고요. 그래서 저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고, 의사가 된 후에는 그 공부한 분야를 살려야겠는데, 그 때 또 마침 1975년도에 우간다에서 의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의사신문에 났습니다. 그걸 계기로 해서 ‘내가 이번 기회에 뜻을 한 번 이뤄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말이 씨가 된다는 식으로 그 어릴 때 괜히 멋도 모르고 한 얘기가 현실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옛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저는 다 잊어버렸는데 제가 그 때 의사가 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는 거예요. 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하여튼 그 때는 멋도 모르고 아무 의미도 없이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던가봐요.
▶ ‘학원’ 잡지 봤을 때가 몇 살 때 쯤이셨나요?
한 열 대여섯 살쯤 됐을 겁니다. 그 때 새 책은 못 사다봤고 누가 1차로 사다가 읽고 나서 중고서점에 판 것을 아버지가 사다주셔서 그 때 귀하게 읽었죠.
▶ 그러고 보면 부모님이 책 하나 사주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우연히 그 책 하나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말이죠.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어린 아이들을 보면 참 위대하고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저 아이는 지금 어리지만 나중에 자라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저도 그 나이 때 꿈은 위대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오늘 프로그램 제목이 ‘슈바이처를 닮고 싶다, 장순명 외과의사’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 분의 전기를 다시 읽어봐도 그 나이 30에 대학강사도 하고 여러 가지 분야에서 자기 뜻한 바를 이뤄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프랑스의 어떤 월간지에 소개된 아프리카 콩고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모든 음악, 철학, 신학을 뒤로 하고 나이 30에 의학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니까 참 쉽지 않은 거죠. 의학이라는 것이 공부를 하다보면 참 분량이 많습니다.
▶ 청소년기에 인생의 모델을 정하는 것도 참 의미가 있는 일이네요.
의도적으로 정한다기 보다는 살다보면 어릴 때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 꿈이 언젠가는 현실로 이루어질 때가 꼭 있으리라고 생각되거든요. 에디슨의 일화를 읽어봐도 어릴 때 달걀을 자기 품에 품고 있던 것은 참 우리 어른들이 생각한다고 하면 우스운 이야기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이 후에 그러한 것이 바탕이 되어서 위대한 인류 문명의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보면 어릴 때 자라는 애들의 꿈이라는 것은 참 위대하고 훌륭한 것 같아요.
◇ 30년 전 우간다에 파견 근무...가난한 그들의 삶에 마음 아파▶ 특히 아프리카에 가셨을 때 어른 환자 보다는 어린이 환자들한테 더 마음이 가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영양을 잘 섭취하지 못하니까 아프리카 특유의 병들이 생기고, 특히 그것이 어떤 영양분이나 음식물이 조달되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의사로서 뭔가, 의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죠.
▶ 30대 초반에 아프리카에 가신 것은 뽑히신 건가요, 아니면 자원을 하신 건가요?
그 때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 기회에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했던 것이 아프리카에 의사가 없는 동네니까 그것이 쉽게 되더군요. 그래서 1975년도에 우간다에 가서 한 2년 일을 하게 되었죠.
▶ 1975년도이면 결혼은 하셨을 때인가요?
네. 그 때 결혼해서 딸 하나 있을 때였죠.
▶ 그럼 가족들이 같이 가셨나요?
그 때는 아이가 하나였기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있어서 온 가족이 다 움직였습니다. 온 가족이라고 해봤자 셋 밖에 안 되니까요.
▶ 그 때 사모님이 반대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입버릇같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결혼하기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던가봐요. 그래서 어떤 거부감이나 충격 없이 잘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 우간다에 처음 도착하셨을 때는 막막하지 않으셨나요?
오히려 그런 것 보다는 ‘드디어 왔구나. 이제 내 자신의 모든 것을 이곳에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물론 처음 왔으니까 느낌과 생활에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우선 인상적이었던 것 한 가지만 말씀드릴께요.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이른 오후에 내렸습니다. 모든 것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밝은 때였거든요. 그런데 비행장 환영대에 검은 옷들이 쫙 걸려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색깔있는 옷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슨 옷들이 휘황찬란하게 걸려있나 하고 다시 쳐다보니까 그 위로 거무스름한 한 면이 쭉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처음에 내려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얼굴은 안 보였고, 옷들만 보였던 거예요. 그런 기억이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처음에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못보고 옷만 보였던 거죠.
◇ 말라리아로 가족들이 고생한 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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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가서 진료하신 환자는 어떤 환자였나요?
제가 외과의사라고 해서 외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 과별로 의사가 다 없기 때문에 되는대로 다 봐야하거든요. 거기는 또 제도가 영국식 제도라서 일단 메디컬 오피스에서 1차로 환자를 보고 의사에게 보내는 식이거든요.
거기서 제일 많은 병은 ‘탈장’입니다. 이것은 제가 의대 공부할 때 미국 교과서에 탈장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탈장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탈장 이야기가 많은가하고 봤더니 거기 가서 이해를 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참 탈장이 많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배꼽에 아이 머리만한 탈장이 하나 생겨 있습니다. 그리고 양쪽 서혜부(넓적 다리와 치골이 연결되는 부위)에 두 개의 탈장이 있습니다. 거기는 그렇게 탈장이 많구나 하고 미국 교과서를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탈장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그 사람들의 유전적인 이유인 것 같습니다.
▶ 말도 잘 통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물론 제 딴에는 영어를 좀 한다고 해서 영어를 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가능한데, 문제는 외래환자가 왔을 때입니다. 그 부족이 많으니까 그만큼 언어가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끼리도 안 통해요.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신랑신부가 저희 집에 잠시 머무를 때가 있었는데, 신랑신부 두 사람이 자기네 말로는 안 통하니까 영어로 대화하더군요. 따라서 제가 외래를 나갈 때는 간호사가 하나 따라 나옵니다. 이 간호사는 환자 보는 것을 도와주기 보다는 그 환자와 저 사이의 통역을 하기 위해 따라나온 거죠. 제가 간호사에게 이 환자는 왜 왔느냐고 하면 간호사가 환자에게 물어봐서 제게 통역을 해서 설명을 하곤 했습니다.
▶ 지금도 아프리카는 어렵다고 하는데요. 30년 전에는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죠. 그 사람들의 식생활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 60년대와 비슷할 겁니다. 사실 제 자신도 피난 나와서 어릴 때는 미국 사람들 ‘짬밥’이라고 하는 것을 먹고 살았으니까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의료치료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사실 이번에 돌아와서 아프리카를 곧 가려고 계획했는데 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경제적인 힘을 조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이 준비하는 것이니까 양이나 액수로 말하면 얼마 안 되는 거죠.
그러나 그것이 생각보다는 그 곳에서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제 나름대로 그것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조건들이 만족되면 그 때는 여기의 일들을 다 정리하고 맘에 늘 담고 생각했던 곳으로 일을 하기 위해 가야죠. 그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도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요.
풍토병이 참 많습니다. 제가 처음 우간다에 갔을 때 밤에 환자가 왔다고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집에 아이와 집사람 혼자 남으니까 무섭거든요. 그래서 저를 따라서 같이 병원에 가요. 가면 저는 병실에 들어가 환자를 보고 있고, 아이와 집사람은 전등불 밑에 기다리고 있어요. 그 때 모기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제 아이와 집사람은 말라리아로 다 고생을 했습니다.
그 정도로 말라리아는 참 많고 무서운 병이죠. 말라리아는 네 가지 형태의 원충에 의해서 옮겨지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말라리아는 굉장히 무서운 종류의 원충 형태죠. 저는 다행이 안 걸렸습니다만, 아프리카는 말라리아가 우리나라의 감기처럼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예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야 될 겁니다.
▶ 그럼 그 때 따님이 몇 살이었나요?
네 살 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커서 공부하고 자기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만, 그 때는 네 살이었기 때문에 제가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교육이 당장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 사모님이 혹시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하는 적은 없으셨나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집사람 성격이 굉장히 강하고 이지적이어서 그렇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 어른들은 그런대로 견딘다고 하지만, 어린 딸아이가 아프고 하면 정말 힘드셨겠어요.
제가 말라리아는 친숙한 병은 아니었으니까 간호사들에게 물어보면, 간호사들이 당장은 저보다 나아요. 자신들이 늘 경험하고 있는 환자들이니까 알려주는 대로 약을 얻어다가 먹였죠. 그렇게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 적은 급여도 마다않고 꽃동네에서 10여 년간 봉사▶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으시다면요.
제가 외과니까 다행히 흉부외과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때 그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 번은 응급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길이가 30cm정도 되는 쇠창이 오른쪽 겨드랑이를 통과해서 뒤쪽 가슴 척추뼈 옆으로 나왔어요. 이건 정말 여러 능숙한 조수와 마취의사 하에서 엄격히 해야 가장 이상적인 치료일 텐데, 아프리카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거든요.
이걸 뽑긴 뽑아줘야겠는데 오직 운이에요. 죽고 사는 것은 의사의 과실도 아니고, 과실이라 할 수도 없고요. 빼긴 빼야겠는데 어떻게 빼야할지 생각을 해보니 생각이 안나요. 그래서 모든 것을 그저 운에다 맡기고 한 번 해보자고 환자에게 설명을 했죠.
그래서 방법은 없으니 정면돌파하는 방법밖에 없다 생각하고 어떻게 뺐는데, 지금은 어떻게 뺐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요. 잘 빼서 그 환자는 퇴원해서 오래 오래 사는 것을 보고 서로 인사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정말 기적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기적이었습니다.
▶ 그렇게 힘들 때 책에서 봤던 슈바이처 박사님 생각도 나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가기 전에는 그 분이 쓴 글을 상상하며 읽었죠. 그러나 제가 다녀온 다음에는 그 현지의 상황을 좀 이해하고 다시 읽어보니까 이해가 가더라고요. 거기 사람들의 평소 풍습, 습관, 사고방식, 버릇 등도 이해가 되고요. 버릇이라는 것은 약속하고 나서 어떤 신용정도, 약속을 잘 지키나 안 지키나 하는 것을 제가 직접 읽으니까 슈바이처가 경험했던 것과 저의 경험이 대단히 비슷하더라고요. 그러나 그 분이 그런 곳에서 참 어렵게 했던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죠.
▶ 우간다에 2년 계셨습니까? 그리고 다시 종합병원에서 일을 하시다가 충북 음성 ‘꽃동네’로 가셨어요? 좀 편하게 계시지 왜 또 꽃동네로 가셨나요?
거기 계시는 오웅진 신부님을 비롯해서 많은 수도자와 봉사자들이 참 훌륭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손발’이라는 것은 절대 필요한 우리 몸의 한 부분이고 머리가 지시하는 모든 것을 손발이 움직여서 하는 것인데요. 거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손발이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역할을 많이 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손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손으로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오히려 움직이려고 하면 굳어진 손발이 방해가 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하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한 가지 가슴 아픈 것은 거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 의학적인 치료를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인데요. 사실 한국의 종합병원 뿐만 아니라 미국을 가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의학적인 치료 보다는 그들의 정신적인 위로,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이 더 주요하겠죠. 그러나 의학적으로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같이 해주는 거죠.
▶ 10년이나 계셨어요? 그렇게 오래 계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정확하게 얘기하면 10년 조금 더 있었습니다. 거기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까 세월이 그렇게 가더군요. 그러다가 거기를 떠나게 된 것이 라이베리아의 ‘국경없는 의사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 원인이 됐죠. 라이베리아를 가게 되면서 꽃동네 생활은 정리를 했습니다.
▶ 종합병원에서 일하거나 개업의로 일하시면 훨씬 보수도 많으셨을 텐데, 꽃동네는 어땠나요?
제가 갔을 때 거기서 월급을 어떻게 주었으면 좋겠냐고 물어봐서 여기 나와있는 공중보건의의 월급을 달라고 해서 처음부터 상당기간동안 거기서 생활 보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꽃동네가 어려워진다고 해서 제가 당장 굶는 것은 아니니까 무료로 일을 하겠다 해서 2년 전부터 그냥 일을 하다가 왔죠. 그리고는 라이베리아로 간 거죠.
▶ 꽃동네에 계실 때 사모님과 아이들은 어디서 계셨나요?
서울에 있었죠. 제가 왔다갔다 하고요.
▶ 사모님도 불우여성 돕기라든지, 탈북 여성 후원과 같은 사회적 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하시나봐요?
예. 그런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요즘도 성당과 관련해서 굉장히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 내 고향은 ‘함경도 신고산면’... 북한에도 가서 돕고 싶어▶ 고향이 ‘함경도 안변군 신고산면’이시더라고요. 그럼 언제 남한으로 내려오신 건가요?
1.4 후퇴 때 내려왔으니까 제가 여덟 살 때 피난 나왔습니다.
▶ ‘신고산이 우르르르’ 거기네요. 어릴 때인데 고향 생각이 나세요?
그럼요. 생각나죠. 지금도 가령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고속도로가 막혀서 길에서 10시간씩 고생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이 참 좋은 거예요. 저는 고향을 갈 수가 없으니까 마음 한 구석에 항상 가고 싶은 일종의 아픔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고향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평범한 가정주부셨죠. 저희를 기르시기 위해서 애쓰셨고요. 제가 지금 그 빚을 제 자식들에게 갚고 있는 거죠. 어머니가 제게 주신 사랑에 비하면 그 빚은 아직 다 못 갚았습니다. 참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감사한 것이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공부 잘 시키고, 다행히 아이들도 공부를 잘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그렇게 학비가 많이 들지 않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마 학비를 못 당해냈을 겁니다.
▶ 지금 따님들은 의학공부를 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가 의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분자생물학’이라고 최첨단 학문을 미시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고, 셋째 딸이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에서 소아과 트레이닝을 받고 있고요. 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같아요.
▶ 어린 시절 이야기 하실 때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신데요.
정말 저희 부모님이 피난 나와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그 보람으로 지금 이렇게 인생을 유지해 나가고 있고, 또 그것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가르침으로 해나가야죠. 지금까지는 잘 못했더라도 앞으로는 다시 마음먹고 잘 해가도록 노력해야죠.
▶ 피난내려왔을 때면 어린 나이셨을 텐데, 부모님의 생활의 고단함, 어려움을 기억하시나봐요?
저의 아버지가 의사여서 피난 내려와 거제도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에 근무하셨습니다. 그 때 퇴근하고 오실 때 짬밥을 얻어왔어요. 짬밥이라는 것은 꿀꿀이죽을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음식물 먹다 남은 것 버리는 찌꺼기거든요. 그런데 그 때만 해도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프리카 사람들은 또 그것보다 못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것이, 사실 제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 큰돈은 필요없거든요. 그래서 지금 하는 데까지 해보자 해서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혹시 고향이신 북한도 다녀오셨나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기회가 없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어딘들 못 갈 것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이라도 가서 할 수 있죠. 제가 가진 지식과 기술이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 ‘국경없는 의사회’를 통해 라이베리아로 파견되기도▶ 라이베리아로 가신 것이 2004년입니까? 단기 파견이셨다고요?
장기, 단기 파견으로 구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파견된 곳이 라이베리아인데요. 가서 보니까 저더러 4주만 일을 하래요. 그래서 제 마음에 바라는 바에는 모자라고 더 있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걸 응해주질 않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결정권자니까 어쩔 수가 없어서 4주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가만히 상황을 회고해보니까 4주 이상 의사나 누구도 버텨낼 수 없는 여건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요, 제가 거기 왔던 의사들의 수술노트를 보면 왔다간 기간을 알 수 있으니까요. 봤더니 제 앞에 온 의사도 3주, 제 다음에 온 호주 의사도 3주만 배정을 받고 왔어요. 그런데 제가 4주를 주장했던 것은 좀 무모했던 거죠. 전기도 안되고 물도 업고 전화도 안되는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에서는 연락이 안되니까 살았나 죽었나도 모를 정도였다니까요.
라이베리아는 그런 사회적인 여건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달을 버텨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무슨 힘으로 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거기서 두 달 동안 200여 차례의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요. 거기가 수도에 있는 ‘맘바 포인트’라는 병원인데, 응급환자만 취급하는 병원이예요. 따라서 낮이고 밤이고 응급환자가 와서 불려나갔죠. 제가 간 첫 날 밤에도 불려나갔으니까요. 그
곳에서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젊은 아가씨인데 제가 수술을 해주었어요. 수술하고 잘 회복이 되어서 퇴원할 때 쯤 회진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당장 얼굴을 보면 구별이 잘 안 되거든요.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돼서 그 환자에게 “당신, 누가 수술했냐?” 하고 물었더니, “바로 당신이 수술하지 않았느냐.”고 해서 웃었던 일도 있고요.
또 한 번은 어떤 환자가 왔는데요. 좌측 팔에 아기 머리만한 혹이 생겨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혹의 조직이 썩어가면서 냄새가 몹시 나서 본인도 고통스럽고 같이 사는 부인도 고통스러워하는 정도였어요. 다른 병원에서는 암일런지 모르겠다고 했더라고요. 그런데 의사마다 조금씩 판단이 다를 수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선 육안으로 봐서는 암은 아닐 것 같아서 혹시 뼈의 손상이 있을까 싶어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뼈의 손상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암은 아니고 양성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단돼서 제거해보자고 환자에게 설명을 했죠. 그래서 그 환자는 참 기분 좋게 만족스럽게 수술을 하고 갔습니다. 그런 즐거운 추억도 있습니다.
▶ 다 이해해주는 사모님을 보면, 정말 장가를 잘 가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려운 고생 많이 했고 참 감사해요. 어려운 가운데 말없이 참아주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주위의 여러 사람들한테 “장가 잘 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 처음 만나신 것은 어떻게 만나신건가요?
제가 레지던트 때 생활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그 때 일하던 동네 개인 의원에서 소개로 만났죠.
▶ 지방에서 근무하다보면 환자들이 고맙다고 고구마, 옥수수를 주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선생님은 잊지 못할 선물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말씀을 하시니 우간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어느 날 남자 환자가 왼팔이 부러졌다고 아프다면서 병원에 왔어요. 그러면서 팔이 아프니까 팔을 잘라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의학적으로 골절이 오면 아픈 것인데 시간이 가면 통증이 줄어들고 치유된다고 설명을 했죠.
그리고 한 가지 강조한 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 환자가 제 얘기를 이해하고 집에 갔어요. 며칠 지나니까 정말 통증이 사라지면서 살 만 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루는 그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왔어요. 그런 추억도 있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잡수시는 것은 어떻게 하셨어요?
우간다에 있을 때는 시장에서 사다가 그런대로 되는대로 먹었고요. 한국식은 안 되니까 한국식으로 만들기보다는 빨리 그 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며 적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 그러다가 잠비아로 가신 것은 언제인가요?
그것이 어느 해 8월 30일인가 그렇게 갔어요.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시간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 일기를 써두지는 않으셨나요?
일기를 써두었어야 하는데 쓰는 버릇이 안 되서요. 그런 것을 써두었으면 얼마나 귀중한 것이 되었겠습니까? 바빠서라기보다는 아마 제 성격 탓일 거예요. 레지던트 때는 챠팅하는 것도 앞뒤면 가득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 하기 싫으니까 안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다시 가면 기록하는 것을 하려고 해요.
◇ 100달러면 아프리카 어린이 600명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어▶ 언젠가 가시겠다는 말씀을 지금 끝없이 하고 계신데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저의 우선 1차적인 조건이 만족되어야겠어요. 그 조건이라는 것은 의사로서의 조건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머니에 가진 것이 좀 있어야겠다는 겁니다.
▶ 어느 정도면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요. 10달러면 50-60명의 아이들한테 괜찮은 양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해서 열 번 먹인다고 하면 100달러고, 또 100달러면 한 번에 500-600명의 아이들을 먹일 수 있으니까요. 그럴 때 우리 나라 돈으로 몇 천 만원, 미국 돈으로 몇 만 불이면 꽤 많은 힘이 되겠죠.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다다익선이죠. 하지만 개인의 힘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는 안 되니까 그저 열심히 해서 되는대로 해야죠.
▶ 장순명 선생님 같은 분들이 ‘롤 모델’의 역할을 해주시는 것이 참 중요한데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다행히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그 뜻에 따라서 해나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까지 배워서 그렇게 해본 것에 대해서 후회를 안 하고 앞으로도 계속 기회가 주어지면 제 생각 안 하고 어느 곳이나 어느 때나 갈 겁니다.
▶ 선생님의 좌우명은 어떤 걸까요?
저는 살면서 보니까 주위 사람들을 보면 정직과 신뢰가 가장 절박한 우리의 덕이 아닐까 싶어요. 말을 했으면 그 말을 지키고, 농담이지, 그럴 수 있지 하는 식의 표현은 안 되고요. 저는 그 점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 의사란 어떤 세계의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의사는 절대 특별한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고, 가장 힘없는 사람 중의 하나니까요. 서로가 아끼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 앞으로 소망은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아직 갈 곳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에 제가 배운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 사람들한테 대가없이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 장 선생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물론 저도 공부한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과 돈과 젊음을 다 바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힘도 들고 피곤도 하고 빚도 지고 안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나이 먹다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결정만은 아니니까요. 앞으로 많이 나올 것으로 봅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