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천
지존파 사건 기억하십니까? 1994년이죠. 5명의 일당들이 특수 감옥과 소각로까지 만들어놓고 고급 승용차를 탄 사람들을 납치해서 엽기적으로 살해했던 끔찍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이 지존파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 송파경찰서 고병천 수사과장. 31년간 강력계 형사로 잔뼈가 굵은 그는 온보현 택시살인사건, 앙드레김 협박사건, 어린이 납치유괴사건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대형사건들을 속속들이 해결한 인물입니다.
거칠고 험한 직업과는 달리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고,사형당한 지존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등 여린 마음의 소유자 고병천 경정.
31년 간 경찰관으로서, 두 남매의 아버지로서, 한 인간으로서 느꼈던 애환을10월 18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다.
◇ 30여년간의 경찰 생활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출간
▶ 31년 동안 경찰생활을 해오셨는데, 몇 살 때 경찰관이 되신 건가요?
28살에 입문했습니다.
▶ 내년이 정년이라고 들었는데요. 감회가 어떠세요?
감회라기보다는 후회가 더 앞섭니다. 아직 해야될 일도 많고 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유능하신 분들은 더 연장해서 근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그런 것은 없고요. 그 분야에 대해 전공한 분들에게는 약간의 기회를 주기도 하는데 그 문이 좁습니다. 또 별로 원치 않는 사람들도 많고요.
▶ 너무 인상이 온화하신데요. 범죄인들이 수사과장님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닌가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죠. 일반 사회생활과 직업적인 사건을 다루는 업무를 추구할 때는 아무래도 좀 다른 점이 있죠.
▶ 그 바쁘신 가운데 ‘어느 난쟁이의 우측통행’ 이라는 책을 내셨어요. ‘객관적으로 볼 때 뒤돌아 버리면 왼쪽이 오른쪽이 되는 것을 모르고, 내 기준의 방향만 고집하며 살아온 것이다.’ 라는 해설도 있는데요. 어떤 내용이고 어떤 뜻을 가지고 있나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어렵고 힘들 때 쉽고 편한 길을 많이 선택하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정의라고 자위하면서 전혀 수정하려거나 고려치 않는 현대인들에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 위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현 위치에서 내가 돌아서버리면 왼쪽이 오른쪽이 되어버리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의 고집대로만 살아온, 저같이 30년을 살아온 것이 후회스러워서 그렇게 한 번 표현을 해봤고요. ‘난쟁이’라는 것은 저와 또 저같이 살아 온 분들의 자화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후회스럽다’는 말씀을 몇 번 하셨는데요. 아쉽다는 표현인가요?
앞의 부분은 누구나 때가 되면 그만 두어야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이 아쉬운 부분이고요, 두 번째 난쟁이의 우측통행에서 나오는 아쉬움은 삶이 명확한 삶을 걷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죠.
▶ 혹시 다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입장에서 오는 마음의 부담이 있으신 건가요?
그것은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부분이었지만, 실제로 과정에서 조금 반성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 책에 쓰신 것을 보니까 ‘폴리스 스테이션, 경찰서는 정거장이다’ 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어떤 뜻인가요?
‘정거장’이라는 표현은 자동차나 기차를 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을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경찰서도 법적인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찰이라는 차량에 같이 승차해서 민원인들이 목적하는 곳까지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뜻으로 정거장이라는 표현이 ‘경찰서’라는 표현보다 더 가깝고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만 경찰서가 일반 정거장과 다른 점은 경찰서에서 차를 잘못 타면 다음 역이 교도소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만 아니라면 거의 정거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최근의 경찰서비스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서비스를 많이 도입해왔고, 심지어는 명절 때 시골 가시면서 우리 집 좀 봐달라고 키를 맡기면 밖에서 집을 봐준다든지, 면허시험장을 가지 않더라도 경찰서에서 면허증을 교부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코믹하지만 정거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나 해서 표현했습니다.
◇ ‘지존파 사건’은 자칫하면 묻혀져 버릴 뻔 했던 사건
▶ ‘지존파를 잡은 베테랑 형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시는데요. 지존파 사건은 그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던 사건인데요. 1994년 추석 때였나요? 사건이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요?
제가 술을 좋아해서 이 사건이 저한테 연결된 그런 사항입니다. 그 당시에 간단하게 싸게 술 한잔 먹을 수 있는 조그만 카페들이 성행했습니다. 제가 자주 다니던 경찰서 부근의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의 여종업원으로 있던 여인이 지존파들에게 애인과 같이 끌려갔습니다. 그랬다가 지존파 중의 하나가 그 여자를 살려주자고 하는 과정에서 묘한 순간을 만나 도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탈출을 해서 저한테 신고를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수사가 진행되게 된 것이죠.
▶ 처음에는 그렇게 엄청난 사건인지 전혀 모르셨겠죠?
신고자가 물론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너무 사안이 크고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제가 여섯 시간 동안 앉아서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무슨 약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정신적 이상이 왔나 해서요. 그런데 시간이 점점 갈수록 그 분 말이 신빙성이 있고 확인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계속 수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 지존파의 ‘지존’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그들의 조직명은 ‘마스칸’이라는 희랍어였습니다. 희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야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다른 이름을 생각해봤죠. 근데 그 당시에 무협지가 굉장히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무협지 속에는 항상 주인공으로 ‘무림지존’이 나왔고 해서 무림을 뺀 ‘지존’으로 제가 명칭을 바꿔주었습니다. 물론 부적절한 명칭이지만, 그래도 야망이라는 뜻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대부분의 조직 폭력배나 범죄단체 조직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명칭이 정해집니다. 경찰이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죠.
▶ 범행 자체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잔혹했었어요. 사건의 내용은 어떠했나요?
이 사람들이 주로 교육수준이 아주 낮고, 20세에서 26세까지의 나이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시골에서 너무 가난에 찌들려 살아온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의기투합하게 된 겁니다. 사람을 죽이고 돈을 벌자고 생각한 거죠.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은 당시 야타족이나 부자집 아이들을 디스코텍이나 유흥주점에 다니면서 봤나봐요. 그래서 ‘야타족과 그렇게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자들을 증오한다, 그래서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라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 강령 같은 것도 있었죠?
첫 번째 강령이 ‘우리는 부자를 증오한다’였고, 두 번째는 ‘각자 10억씩을 모을 때까지 이 범행을 계속 한다’, 세 번째는 ‘배반자는 처형한다’, 네 번째는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라는 강령이 있었죠.
▶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라는 것은 왜 그랬을까요?
아무래도 그들이 그런 것에서 평소에 경험을 했을 수도 있고요. 실제 그 말이 자기네 조직원들간에 지켜져 있었다면 저한테 알려지는 시기가 늦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두목이 다른 사건으로 인해서 구속이 되어 있는 과정에서 나머지 조직원들이 범행을 일으키고 다니는 상황에서 여자를 살려주고 같은 은신처에 여자를 계속 둔 상태에서 그 여자를 범인 중 한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됐죠. 그래서 그 여자를 죽이자는 사람과 살려주자는 사람 간에 서로 싸움이 일어나서 실제 그 여자를 사랑했던 범인이 많이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주사실이나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 사이 틈을 타서 여자는 탈출을 했죠.
만약에 그 때 그 여자가 탈출하지 못했다면 그 사건은 묻혀져 버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한 수법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들이 범죄를 다양화시키기 위해서 압구정동에 있는 한 백화점의 고객명단을 입수했습니다. 그 고객들을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납치하는 방법과, 또 주유소를 하나 만들려고 했습니다. 주유소에 야간에 고급차가 들어오게 되면 대상을 물색해서 범행을 하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습니다.
▶ 그 동안 저지른 범죄만 몇 건 정도 되나요?
그들이 전부를 고백하고 가지 않았을 가능성을 저희가 예견하고요. 그 당시 죽인 사람만 7명이었습니다. 물론 최근의 유모 씨의 살인사건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독범이었고 한계가 있는 범죄인데, 이 건은 완벽하게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아지트를 가보면 집 색깔도 분홍색으로 칠해 두었습니다. 왜그러냐면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집은 범죄와는 연관이 없는 집이라는 인식을 시키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거죠.
◇ 대부관계를 맺고, 장례를 치러주기도 해
▶ 직접 그들을 만나보시니까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의외로 좀 순수하고요. 조사하는 과정에서 빨리 회개를 하였고, 다만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의 무지함,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긴박감 같은 것들이 쉽게 범죄자로 유도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미워하기 보다는 회개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볼 때 애정을 느낄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 회개하는 과정이 어떠했길래 그렇게 느끼셨나요?
저희한테 검거되었을 때는 상당히 흉폭했습니다. 그런데 검거 이후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들은 바로 회개를 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데 판단 잘못하고 잘못 살았습니다.’ 하는 순수함을 보여 주었고, 모든 수사에 협조를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 장례도 치러주고, 부자(父子)관계도 맺으셨다면서요?
부자 관계는 인간적인 부자관계가 아니라 ‘종교적 부자관계’를 그가 원했습니다. 저도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도 같이 열흘간 생활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고요. 그 때 제가 ‘회개하는 부분이 있으면 종교를 선택하라’ 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고, 장례도 사체를 그 가족이 인수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오도록 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제가 바빠서 저의 집사람이 가서 인수를 받아서 장례를 하였습니다.
▶ 아내한테까지 그런 일을 부탁하시게 되었네요.
뭐, 형사는 아내도 형사를 같이 해야 합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 사형제도가 없어지는 쪽으로 거의 정착이 되는 분위기죠?
1997년도 12월에 마지막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 이후에는 전혀 안되었기 때문에 10년이 경과하면 사형폐지 자격국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 자격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을 했고요. 단지 사형이라는 것의 취지가 중범죄자를 사회에 복귀시키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박탈하는 폭력적 수단인데, 그렇다면 범죄자가 폭력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국가가 폭력을 수반하는 형벌을 가할 때는 문제가 안되는가, 제가 볼 때는 좀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지금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저는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형하지 않는 국가로서 자격을 얻는다면 사형제도를 대신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면과 감형이 인정되지 않는 종신형 제도는 연구 검토되어야 할 것이고요. 다만 피해자나 유족들에게는 심리적이나 물질적으로 보상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온보현 택시 살인사건’도 직접 담당하셨죠?
네. 온보현의 경우는 약간의 정신질환적 증세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저지른 범죄와 지존파가 저지른 범죄 중 어떤 것이 더 중대하고 엽기적인 것인가 비교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신질환적 문제로 봐줘야 했던 부분이 있습니다.온보현 사건은 아주 쉽게 가만히 앉아서 제가 해결했던 사건입니다. 스스로 자수해서요.
▶ ‘앙드레김 협박 사건’은 어떤 것이었죠?
범인이 권총하고 협박편지를 김봉남 씨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억 원을 요구했습니다. 안 주면 해를 가하겠다고 해서 저희에게 신고가 되었고 만 하루 만에 검거를 하였습니다.
▶ 앙드레김 사건은 해결을 어떻게 하셨던거죠?
저희가 가짜 돈을 좀 만들었습니다. 앞뒷면만 실제 돈을 끼고 가운데는 다른 종이를 해서 돈을 갖다 놓으라는 장소에 갖다 두니까 그것을 퀵서비스를 이용해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리 퀵서비스를 열 대 정도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퀵서비스를 쫓아가서 인계하는 것을 보고 다시 쫓기 시작했죠. 그래서 검거를 했습니다.
▶ 동물적인 감각이 있으신 건가요? 현장에 가보시면 누가 죄인인지 보입니까?
제가 사건이 답답할 때는 가끔 사주를 보러 다녔거든요. 근데 어떤 분이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도 있는데요. 수사라는 것은 기본을 지켜야 되고요. 범인보다 머리가 앞서가야 하고, 범인의 입장에서 범행을 계획해 보기도 하고, 범인이 다음에 할 행동에 대한 부분을 예측도 해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범인의 행적은 대부분 한계가 있습니다. 완전한 범죄로 생각되지만 모든 범죄에 대해서는 단서가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야 되거든요. 그런 부분이 동물적 감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건이 나면 저는 저의 생애를 올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그런 경우가 있죠.
고병천
◇ 점차 범죄 수법이 다양화되고 교묘해지는 추세
▶ 식품영양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럼 어떻게 경찰이 되신 건가요?
현재 영양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죠. 그 때는 남자 영양사가 별로 없을 때였는데 제가 관심이 좀 있어서 전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식품영양학과 수사가 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사의 입장에서는 비빔밥이나 잡탕밥에서 건더기를 잘 건져 내는 것을 원하고 있고, 식품영양학도 거의 비슷하게 영양가 있는 것만을 골라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양사나 형사나 다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30년 넘게 일하시는 동안 범죄의 양상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되고 있죠?
지금 현재 우리 시대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범죄자들이 다른 범죄를 배우게 되고, 같은 범죄라고 하더라도 더욱 발달하게 되고, 범죄가 더욱 교묘해지고요. 또 하나 문제가 어느 프랑스 학자가 얘기 한 것처럼 도시생활을 하면 정신이상이 올수 있다는 환경적 요인에서 그런지 몰라도 정신이상성 범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의 70대의 노인이 저지른 범죄 등은 정신이상성 범죄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죠.
▶ 정확히 어떤 사건이었죠?
70대의 어부가 그 배에 관광을 원하는 남녀를 태우고 나갔다가 성폭행 하려다 대항하니까 다 죽였던 사건이죠. 그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정신이상성 범죄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피해자들이 자기가 스스로 범죄의 피해에 노출되고 그것을 막으려고도 하지 않고 피하려고도 노력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범죄가 더욱 늘어나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여자가 밤늦게 술먹고 택시를 타고 하는 것은 범죄에 대해 완벽한 노출이거든요. 그런 범죄 피해 우려를 느끼는 것에 대한 결여성 때문에 범죄가 더 늘어나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래서 범죄의 대상자로서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줄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13일간 잠복근무한 적도 있어
▶ 우리가 가끔 ‘기는 형사 위에 나는 범인’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요.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있죠. 왜냐하면 경찰이 한 사건에만 매달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원은 부족하고 한 사건만 수행하기가 힘드니까 그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 힘든 일이 참 많으실 텐데요. 잠복근무를 하게 되면 몇 일까지 해보셨어요?
가장 길게 한 것은 13일로 생각이 듭니다.
▶ 그럼 양치질이고 세수는 다 어떻게 하신 건가요?
그것은 항상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그냥 적당한 곳에 가서 양치질 하고 밥은 아무데서나 먹거나 빵을 먹고요. 13일 동안 충남 서천에 가서 있었던 적이 있는데요. 그 사건이 청송 교도소 출신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납치 강도를 했던 사건이었거든요. 애인 집에 분명히 올 것을 예상해서 13일을 잠복하다가 어떤 단서를 잡았는데 위에서 철수를 하라고 해서 철수를 안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튿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검거하는데 시간이 더 길어졌죠.
▶ 결혼기념일, 아내의 생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결혼기념일에는 꽃 외에는 별로 보내준 것이 없습니다. 꽃은 전화해도 가능하니까요.
▶ 아직은 처우나 그런 면에서 박봉이죠?
저처럼 오래 한 사람들은 박봉이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지만, 초임자 같은 경우는 박봉으로 볼 수가 있고요. 특히 문제 되는 것은 수사기법이 더 발전해야 하는데 예산 문제가 많이 부족해서요. 수사 기법이 보강될 부분이 있어서 예산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 해결 못한 사건은 거의 없어
▶ 일하시느라 많이 바쁘셨을 텐데 언제 이렇게 문학과 접하는 시간을 가지셨나요?
제가 학창시절에 뜻이 있어서 한동안 문학 전집을 섭렵해보겠다는 생각을 해서 뜻도 모르고 읽은 적이 많습니다. 사실 문학도가 되기 위한 것보다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라는 옛말대로 책들을 많이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것들이 저변에 깔려 있었고 기억에 남는 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어렸을 때 모습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6년 동안 거의 우등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 집안이 기울면서 과수원을 하기 위해 익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저는 학교를 옮길 수가 없어서 혼자 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나중에 이리고등학교에 합류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혼자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를 잘 안 하고 놀다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안 되서 막상 의대를 봤는데 안 되서 차라리 군대를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군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죠. 하사관이기 때문에 야간에 나올 수 있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술과 가깝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사실 스트레스 해소를 하기 위해 내가 술을 먹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했습니다. 단지 처음에는 같이 고생한 동료들과 헤어지면서 간단한 술 한 잔씩 하고, 제가 체력이 좋으니까 혼자서도 먹게 되고 했는데, 그런 것들을 지금 살펴보면 제 저변에 깔린 스트레스를 스스로 술로 해소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사건이 풀릴 때 기분은 어떠시고, 풀리지 않을 때는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제가 그 질문에는 조금 답변이 어려운데요. 제가 해결 못한 사건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의 기분은 별로 느껴보지 못했고, 사건을 해결했을 때 그 성취감은 기가 막힙니다. 그것이 더 어리고 초임일 때는 그 기분이 정말 기가 막히죠. 그런데 조금 경험이 붙으면 이번 일을 끝내고 다음 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기도 합니다.
▶ 그렇게 사건을 해결하셨으면, 완전범죄는 없는 건가요?
완전범죄는 제가 지금까지 단 한 건의 범행을 한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완전한 여행성 범죄 같아서 그 피해자와 그 주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들었고요. 제가 그 한 건, 강도 살인 사건인데 해결을 못했습니다. 아직 미궁이지만 기회가 닿으면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 예전에는 ‘원한 범죄’가 많았다고 하던데요. 요즘은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원한 범죄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이 많다면 저는 살아 있지도 못하죠. 제가 한 때 과천 구치소에 “너도 고형사한테 잡혀왔어?” 할 정도로 구치소에 많은 인원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까지 살아있기 힘들죠. 그런 원한 범죄는 거의 교도소 가 있는 동안 버리고 나옵니다. 단지 아까 말한 지존파들은 절대적 빈곤속에 있으면서 범행을 저질렀지만, 최근에는 있으면서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면서 범행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지금 사회의 진행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범죄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강력범죄의 경우는 60% 이상 해결이 되고, 기타 절도 등도 많이 해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범행 추세가 나이가 많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30-40대가 많았는데, 지금은 10-20대가 많아지고 있죠.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이 중요하고,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그들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국가의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겠죠.
◇ 종교의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 준 아내에게 항상 미안
▶ 그런데 정작 고 경정님은 가정에 충실하기가 쉽지 않으셨겠어요. 자제분들은 어떻게 되시죠?
남매를 뒀습니다. 저는 정말 가정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았고, 오히려 아이들이 저에게 신경을 썼습니다. 제가 일주일씩 집에 못 들어가면 속옷을 가지고 오기도 하고, 지존파 때도 제가 숨어서 수사를 하니까 제 속옷을 가지고 온 아이들을 기자분들이 인터뷰를 하는 정도니까 걔네들은 아주 경찰에 익숙해져 있죠. 정말 고마웠던 것은 애들 엄마가 아이들에게 많은 기도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중요한 것은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잘 커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둘째 같은 경우는 운동을 오래했고, 지금 학교도 단과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현재는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 중입니다.
▶ 어머님께서 24년 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셨다면서요?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도 치매로 5년 가까이 고생하셨고요. 그래서 집에 냉장고도 쇠사슬로 걸어두어야 할 정도였어요. 애들 약까지 다 드시니까요. 그리고 또 어머님이 만 24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 30여년의 노하우가 있는 분이 정년이 되는 것은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 생각에도 나이가 먹으면 더 유능한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하지만, 이 수사라는 부분은 좀 특별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많이 배워도 경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계속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제도를 만들면 역시 또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겠죠.
▶ 내년이 정년이신가요?
내후년 전반부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 가지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어떤 방향을 생각하시는 거죠?
명퇴를 내년쯤에서 할까도 생각하지만, 집에서는 명퇴를 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는 권유도 있고요.
▶ 사모님이 이제는 그만 일하고 여행도 다니고 하자고 하지 않으시나요?
집에서도 따로 하는 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도 바쁜데, 집에 와서 놀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죠. (웃음)
▶ 아이들은 정년퇴직에 대해서 뭐라고 하나요?
그것에 대한 부담이 남매가 다릅니다. 하나는 자기가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결혼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건가 싶고, 또 한 아이는 아빠가 내가 미국에서 오래 생활을 해야 하니까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주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경찰생활을 하시면서 정말 ‘이런 보람이 있다’ 라고 느껴질 때가 더 많으신가요?
봉직(奉職)이라는 것이 힘든 것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특히 형사라는 봉직은 더욱 수반하기 때문에 힘든 일은 당연한 것으로 수사를 하는 사람은 압니다. 수사를 하는 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자체는 내가 거기에 만족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범죄자들이 출소하고 나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 가면 바로 편지를 씁니다. 물론 제가 잘 해준 것도 없는데 어떤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있는 동안 감사하게 지내고 배려에 감사하다고 나가서 꼭 찾아 보겠다는 편지를 많이 받아왔습니다.
▶ 그런 사람들은 나와서 다시 또 재범의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도 거의 그렇게 생각합니다.
▶ 후배 경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죠.
경제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경찰관 특히 우리 형사들은 우리 일에 미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조직과 사회와 개인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경찰관만큼 자기 노력을 해서 빠른 영광을 얻는 직업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노력한만큼 배려가 따르는 직업이니까요. 그래서 미칠 정도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겸손하고 동료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조직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고, 또 우리가 살아갈 길은 국민들이 우리를 좋게 평가해줘야만 우리가 발전하고, 인정을 받을 때 우리 조직이 안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친절하고 겸손하고 동료를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고 겸손하고 사랑을 많이 해도 이것이 잘못 비춰질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경찰은 이것에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친절하고 겸손하고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책의 내용을 보면 ‘고향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으면 범인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렇습니다. 고향은 저도 지금 1년에 한 번도 못 가보는 상황이고 친구들이 올라와서 저를 위로해주는 상황인데요. 고향을 생각하면 고향은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어머니가 나를 낳고 사랑해 주었고, 아버지가 나를 길러준 곳인데, 그 곳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온화하고 뭔가 가정적이고 상황을 이탈하지 않으려는 그런 심리를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에 아무 것도 없고 부모도 안 계시고 친구도 없다고 한들 그것이 고향이 아닌 것이 아니라 고향은 고향일 뿐입니다. 내 추억이 거기에 남아있으니까요. 추억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