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검색
  • 댓글 0

실시간 랭킹 뉴스

[서해성의 인물한국사]장검을 멘 의사-이제마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 2005-01-15 17:11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서해성의 인물한국사-이제마(1837~1900)

◎ 사회/정범구 박사>
오늘은 왜 이제마인가.


◑ 서해성>
세상이 큰 병을 앓고 있다. 옛 말에 전하기를 사람이 병이 나고 고치는 의사를 가장 작은 의사라 했다. 병이 나기 전에 알아보고 막는 의사가 가운데이고, 나라를 고치는 의사가 가장 큰 의사라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小醫가 판을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 치유를 담당하는 일은 그러므로 단지 의사만의 몫은 아니다. 참된 의인의 길을 더듬어 봐서 우리 사회와 세상을 어떻게 치유해나갈 것인가 모색해보자는 뜻으로 이제마를 초청했다. 그렇다고 이제마가 그 온전한 사표가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서양 의학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등 대체의학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의학은 실은 철학의 문제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사상적 토대는 기본적으로 이황이나 이이의 이기2원론이나 이기1원론이라는 성리학에 관한 조선의 주체적인 사유태도와 그에 따른 진척과 깊이 연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허준 이후 사상의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의학체계를 성립시킨 이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질병치료에서 종래와 같은 음양오행설에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체질에 중점을 둔 것은 기존의 전통을 벗어난 획기적인 학설임에 틀림없다. 이를 더듬어 가보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마에 관한 신화라고나 할까 허상을 걷어내고 되도록 실체에 접근해보자는 것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제마 집안이 무인집안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집안인가.


◑ 서해성>
이성계가 영흥사람 아닌가. 이제마는 전주 이씨로 함흥사람이다. 穆祖(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의 둘째인 안원대군이 중시조이다. 대개 조선조 동안 말단 蔭職이나 武人으로 등용되어 함산(함흥) 근동에서 집성하여 살았다. 6대조, 5대조가 무과에 급제했다.


큰아버지 이반린이 목조의 능을 지켰다. 종7품 德陵 直長이었다. 다른 백부 이반구 또한 莊陵令 곧 단종능을 지키다 종6품 연천현감을 지냈다. 이반구의 아들 이섭관도 목조의 妃가 묻힌 능을 지키는 참봉이었다.


이제마의 부친은 이반오로 병약했다. 20세에 생원 진사를 뽑는 司馬 兩試에 동시 합격했으나 38세에 사망했다. 부인은 4명이었다. 요컨대 이제마의 집안은 전주 이씨로 음직으로 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주로 무인으로 활동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제마는 아버지가 정식 혼인을 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고 하던데.


◑ 서해성>
이제마의 모친은 주막집 딸이었다. 신분도 비천했을 뿐 아니라 정신도 온전치 못했다. 함흥 운흥일 문회서원 인근의 주막으로 알려져 있다. 조부는 이러한 이제마에게 태몽에 따라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적자로 입적했다.


나중에 이복동생이 둘 태어났다. 태몽은 조부의 용마몽이었다. 어떤 이가 제주에서 가져온 말이라고 주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 뒤 이제마는 조부의 비호 속에 성장했다. 종내 어머니와 교류했던 것 같지는 않다.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제마에게 이것은 성장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성장기를 개략적으로 말해달라.


◑ 서해성>
北道문장이라 불린 백부에게 배웠다. 이제마는 소싯적 항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항우의 죽음을 책으로 접하고 사나흘 밥을 잊었다고 전한다. 그는 결기가 있었고 성정이 불같았으며, 키가 9척에 호랑이 상이었다고 한다.


1846년 큰아버지 이반린이 목조의 능을 지키게 되어 집안이 솔가하여 신흥군 가평 능리로 이사를 했다. 1849년 아버지 이반오가 사망했다. 그 해 백부가 연 鄕試에 나아가 장원을 차지했다. 12월에 조부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 백부마저 세상을 떴다.


그 무렵 이제마는 가출을 했다. 상심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스무 살을 전후해서는 의주 부호인 홍씨의 집에서 서책을 탐독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21살에 홍원 출신의 김규형의 여식과 혼인을 했다. 그 아내는 22살에 첫 아들 용해를 낳고는 세상을 등졌다. 이로 인해 이제마는 발병을 하게 된다. 자신의 출생, 거듭되는 식구들의 죽음과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병에 대한 깊은 고민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사회/정범구 박사>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 서해성>
이제마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재차 가출해서 蘆沙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노사는 서경덕, 이황, 이철우 의원, 이진상, 임성주와 더불어 성리학 6대가로 불리기도 하는 남도의 대학자였다. 1863년에 또 제수가 사망을 한다. 그가 27살에 계룡산 일대를 구걸하면서 주유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가 김생이란 벗에게 쓴 시 가운데 ''''구걸하다 서로 만나도 반갑단 말은 하지 말라''''는 대목이 있다. 요컨대 이제마는 정식으로 유학을 공부하거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성균관에 들어가거나 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 이제마가 어떻게 당시로서는 새로운 의학인 사상의학을 세울 수 있었는가 궁금하다. 새로운 의학이란 새로운 세계관과 무관할 수 없지 않은가.


◑ 서해성>
전하는 바에 따르면 30살 무렵 함흥에서 정편 가는 객사의 벽지에서 중요한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글은 어느 집안에 전해오던 것인데, 운암(芸庵) 한석지(韓錫池)의 ''''明善錄''''(1789년)이었다. 한석지는 병과 가난과 걸식과 불우를 거듭했던 비운의 유학자였다.


평생 몸이 성치 못해 농사조차 지어보지 못했고, 가난해서 반 년 치 양식을 쌓아둔 적이 없으며, 아들과 동생도 병으로 잃었고, 소싯적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흉년이라고 遊街를 금했으며, 성균관 생활에 적응치 못해 떠나야 했다.


이러한 그는 탈주자학적 태도를 취하며 자신이 쓴 책을 비밀하게 집안에 전하였던 것이다. 이제마는 여기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요컨대 명선록을 통해 주자학적 태도를 벗어 던지게 되는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의사로서 활동은 언제 하게 되는가.


◑ 서해성>
기록에 따르면 이제마는 39살이 되던 1875년 처음 한약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에 앞서 그는 둘째 부인을 맞아들였으며, 35살에 두만강, 연해주 일대를 여행했다. 火龍船(증기선) 유선전신 대화포를 구경하는 등 새로운 문물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 셈이었다.


여행 목적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보면 당시는 조선사람들이 연해주 찌신허 일대로 이주하던 직후였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가 있었다. 1872년 둘째를 얻었다. 그는 이제마 사후 함흥에서 보원약국을 한동안 운영했다.)


의사로서 활동하는 동안 몇몇 일화가 전한다. 특히 새로운 약제조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회의가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盤龍山老人''''이라는 부적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무렵 그가 완벽한 의사로 이름을 드날렸던 것 같지는 않다. 당장 동생의 장남이 죽었고, 동생 또한 이제마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연히 비난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무인으로 활동했다는데 그렇다면 언제부터인가.


◑ 서해성>
바로 그 39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합격했다. 그보다 앞서 장조카 이설규가 21세로 사마시에 합격했던 것도 관직에 나아가라는 주위의 이유 중 하나다. 이듬해 1876년(강화도조약)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어영청대장 김기석의 추천으로 무위별선군관으로 왕실친위대원이 되었다.


그 40살에 동국의 진정한 무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東武라 호를 붙였다. 이능화는 ''''조선인명전''''에서 이제마는 힘이 넉넉히 천근을 들 수 있고, 안목이 충분히 만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무인다운 면과 함께 상당한 지혜를 가졌다고 봐도 될 듯하다.


이어 궁궐수문장군을 거쳐 1881년 통리기무아문(외교부)이 설치되자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참모관은 참령(소령) 이상. 부령(중령) 정령(대령)). 5월에 원산항 일본군을 정탐한 기록에 따르면 수구와 개화에 대한 이해가 일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서남전쟁-큐슈의 녹아도 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관해 상세한 문의를 한 기록도 있다. 또 당연히 당시 국제정세와 군복에 관한 상세한 질문도 나온다. 일본인은 군복이 갑옷과 달리 총알을 뚫지 못한다고 이제마를 속이고 있는 대목도 있다.


1886년 종6품 진해현감 겸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성천간 만세교 건너편 함주 천서면에 가솔들을 이사시킨 후 진해로 떠나 34개월을 목민관으로 재임했다. 당시 전조선에 현감은 138명 안팎이었다. 진해는 군항 진해가 아니라 오늘날 마산시 진동면을 이른다.


현감 생활을 그만 둔 뒤 진주에서 ''''격치고''''를 집필하게 된다. 1891년 상경해서 ''''격치고'''' 집필을 거듭한다. 이는 이제마 사상의 요체가 들어 있는 책이다. 그해 장조카 이설규가 사망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능화의 집에도 살았다는데.


◑ 서해성>
그렇다. 이능화의 부친 이원긍의 집에서 필생의 역작인 ''''동의수세보원''''을 집필 탈고한다.(1893.7-1894.4)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원고를 썼다 한다. 이능화 또한 앞서 말했듯 부친과 가깝게 지내던 이제마가 자신의 집에서 의서를 집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참고로 이원긍은 괴산 사람으로, 동도서기파(어윤중 등)였다. 이제마는 대원군파에 속했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쪽에 친일개화파(박영효)가 있었다. 이능화는 정동영어학당 중국어학당 관립불어학당 등에서 배운 뒤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이제마에게 눈을 치료했다. 이원긍이 군국기무처 위원이 되자 그의 집을 나왔다. 그 해 8월 이제마는 청일전쟁의 격전장인 성환과 평양을 둘러보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제마가 을미의병을 핍박했나.


◑ 서해성>
1895년 셋째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그 해 호열자가 창궐해서 30만 명이 사망했다. 명성황후로 추존된 민왕비가 시해되던 해였다. 그는 시묘중이었다. 이듬해 건양원년으로 양력과 함께 단발령이 전국적으로 강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중들은 단발은 곧 김홍집 내각, 김홍집은 곧 개화, 개화는 일본화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춘천에서 이소응이, 원주 평창 횡성 사람들을 이끌고 민용호가 창의해서 강릉에 들어가 단발한 관찰사와 군수를 살해했다. 이후 민용호는 참봉 최문환을 함경도 의병소모책으로 파견했다. 다른 하나는 그해 대보름 무렵 함흥경찰서 개편을 위해 경찰복과 외투 환도 60여 벌을 원산항에서 가지고 오던 경찰관이 아이들의 투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함흥성내에서 일본인이 살해되기도 했다. 함흥에 온 최문환은 함흥관찰사 서리 등 3인을 만세교에 효수했다.


이제마는 소식을 접하고 시묘 중 기복종사(起復從事)키로 마음먹고 나서서 최문환을 생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을 인정받아 1896년 정3품 북도선유위원으로 임명된다.


그러던 차에 최문환이 관찰사 수청기생 등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해서 9월 재차 함흥 일대를 장악해서 동료들을 탈옥시킨다. 최문환은 이듬해 청국의 변방 비적들과 어울려 다니다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해 가을에 이제마는 고원군수로 임명된다. 당시 총리대신 김병시에게 올린 시무책을 보면 그가 친러시아적 국제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나라를 구할 영웅적 장수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대목도 있다. 그는 집집마다 후당총(구식총은 앞에서 탄환을 재는 전당총) 작동법을 배우자는 말도 하고 있다. 이윽고 함경도 관찰사 서정순의 탄핵으로 군수직에서 물러난다. 적어도 을미의병은 이제마의 마지막 관직 출세를 보장케 했던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렇듯 관직에 있었는데 어떻게 진료를 했을까.


◑ 서해성>
관직에서 물러나 보국원 운영하고 최린 등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묘한 것은 이제마가 진료를 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내내 관직에 있는 등 의사로서 전업으로 매달리기는 어려웠다는 점이다. 다만 관직에 있으면서도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조금씩 있기는 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제마와 사상의학의 의미를 간명하게 정리한다면.


◑ 서해성>
한의학도 또 의학도 잘 모르는지라 여기서 말하는 게 적당한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사상의학은 심신의학으로 알고 있다. 性情의 차이를 이해해서 판단하는 심성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사상의학은 체질감별이 중요한 특징인데 그 대강을 살펴보면, 체형기상론, 용모사기론 성질재간론, 항심욕심론, 체질병증론, 체질약물론 등이다. 증상이 같아도 체질별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는 임상적 요소가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음양-사상-8괘''''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세상의 변화도 급격했지만 이는 이제마가 주자학적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였다, 1821년(순조21) 서울 근동 인구 30% 이상이 사망하는 역병이 돌았으며, 1859년(철종10) 40만 명이 사망하고, 1895년(고종21년) 30만 명이 호열자(콜레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인구의 5%에 해당하는 숫자다. 또 집안사람들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마의 활동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한 사상의학은 북한 연변 중앙아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학문이나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한다. 이제마의 고민과 행동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닌가 싶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고민을 주체적으로 넘어선 그의 공적과 가치를 새롭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또 참된 의료인의 길이 무엇인지 의료행위가 심각하게 상업화된 오늘을 반성하는 계기로도 삼았으면 한다. 참된 의료는 그 사회를 치유한다는 점도 명심했으면 한다.


▶진행:정범구박사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98.1MHz 월~토 오후 7시~9시)

0

0

실시간 랭킹 뉴스

오늘의 기자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