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그야말로 멜로와 사극의 시대. 그 시대를 풍미한 스타 영화배우 1호 최은희. <성춘향>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등 숱한 작품에 출연. 북한에서 출연한 영화까지 합하면 100여편은 족히 넘는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신상옥 감독과의 연애와 결혼은 숱한 화제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78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서 북으로 강제 납치됐다가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86년 극적으로 탈출해서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신상옥, 최은희 부부.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오후 4:05-5:00)에서 고 신상옥 감독 1주기를 맞아 4월 10일(화)에 최은희씨를 만났다.
◇ 50년 결혼생활 동안 24시간 같이 있어, 지금도 어디에선가 전화올 것 같아
최은희1
▶ 고 신상옥 감독님이 돌아가신 지가 벌써 1주기가 되었습니다. 두 분이 늘 같이 계셨는데 얼마 동안 함께 하신 건가요?
=아직도 전화가 어딘가에서 올 것 같고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50년 이상 결혼생활을 했는데 중간에 7년 동안 같이 못 있었던 걸 제외하고는 24시간 같이 일하고, 같이 다니고 앉으나 서나 같이 있었으니까요. 그나마 사는 데까지는 건강해야 하니까 많이 안정을 찾으려고 하고 있고,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 지금 혼자 살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족과 함께 계신가요?
=사촌 여동생이 이전부터 같이 있었는데 둘이 같이 살고 있어요. 아들, 딸은 결혼해서 따로 사는데 며느리가 많이 도와줍니다.
▶ 고 신상옥 감독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보도가 있던데 어떤 영화인가요?
=결국은 우리의 일대기이죠. 우리가 미국에 있을 때, 돌아가시기 전부터 헐리웃에서 영화화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시나리오가 수정을 네 번이나 거쳤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작품을 쓰고 있으니까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 ''''천마 신상옥 청년 영화제''''는 어떤 영화제인가요?
=올해 8월에 공주에서 열리는 영화제인데, 공주가 행정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유치함으로써 홍보도 되니까 많은 도움을 받는 것 같아요. ''''천마 신상옥 청년 영화제'''' 좀 타이틀이 길죠? (웃음) 호를 천마로 한 이유는 신 감독님의 평소 성격이 형식과 격식을 따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호를 붙이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이후에 호가 붙으면 좋겠다고 해서 무엇으로 할까 고심을 했어요. 남편이 청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소학교니까 ''''천마 소학교''''였죠. 그 이름이 좋다고 중론이 모여져서 호를 천마로 붙인 겁니다. 천마가 비슷했던 게 일하는 기질이 제가 야생마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로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날아다니면서 영화를 찍으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웃음)
▶ 청년 영화제를 살펴보니까 안성기씨가 준비위원장인데요. 제 2의 신상옥 감독님을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드셨겠어요?
=그건 우연의 일치인데요, 미국에서도 제작활동을 젊은 제작자와 함께 작업했고 국내에서도 안양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신필름 예술센터''''를 운영했어요. 평소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게 미국에서의 제작은 여건이나 환경이 맞지 않아서 진정한 예술작품을 만들려면 내 나라에 가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국내에 들어와서 물론 제작도 하겠지만 남는 여생을 후진양성을 위해 바치자는 결심을 하고 들어왔는데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잘 되지 않잖아요. 신필름 예술센터에서 국제 청소년 영화제를 하자는 계획도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로 신상옥 감독 청년 영화제로 이름을 붙여서 하자고 감독협회 이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이 왔어요. 신 감독님 평소 지론이 좋은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피부로 느끼고 직접 체험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이 이루어져야 인재를 키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항상 이야기하셨고 신필름 예술센터의 설립취지와도 맞기 때문에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 신상옥 감독, 전혀 오락도 못하고 술 담배도 못해
▶ 1954년에 결혼하셨으니까 중간에 떨어져 계신 기간을 제외하고 50년 동안을 함께 사셨는데, 평소에 두 분이 계시면 말씀을 잘 하시는 편인가요?
=별로 말이 없는 분인데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신들린 사람처럼 이야기를 해요. 가정살림에 관한 이야기가 3분의 1이면 나머지는 작품과 구상과 배우 등 화제가 주로 영화였어요. (웃음) 너무 일에만 파묻혀서 지내니까 나중에는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한 가지 남편에게 탄복한 것은 평소 오락도 안하고 술, 담배도 못해요. 저는 가끔 친구들과 놀러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 분은 평생 놀아본 적이 없어요. 아마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은 없으셨나요?
=무슨 준비나 말씀은 없으셨고 아들한테 수술하러 들어가시기 전에 부르시더래요. ''''앞으로 엄마한테 잘 해 드려라.'''' 그게 아들한테 한 유언이고, 수술 후 치료과정이 잘못 되었는지 다시 병원으로 가시던 날 내 손을 붙잡고 말없이 한참을 계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죠. 워낙 건강하신 분이라 좀 방심하고 있다가 응급실에 들어가시고 난 다음에 달려갔던 게 지금도 아쉬워요.
◇ 북한의 납치 때문에 신상옥 감독 C형 간염에 감염돼 결국 사망 원인 돼
▶ 신 감독님의 병명이 C형 간염이라고 들었는데 그 병에 걸리신 게 납치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관련이 있지요. 납치 이후에 나는 5년 동안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고 얽매이기를 싫어하니까 마치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처럼 몰래 탈출을 세 번, 네 번 시도하다가 붙잡혔고 결국에는 나중에 지독하게 혼이 나셨죠.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는 와중에 8일 동안 단식을 한 적이 있어요. 단식하다가 기절을 했는데 교도관들이 급하니까 의식을 회복시키려고 링거를 꽂았어요. 일제 때 쓰던 알루미늄으로 만든 주사바늘을 소독해서 썼는데 감옥에 있으니 소독이나 제대로 했겠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미국에 와서 종합검진을 하니까 C형 간염이라고 진단을 받았죠. C형 간염이 20년 정도의 잠복기간이 있다고 해도 치료를 계속 받았고 나름대로 건강하셨어요.
다만 국내에 들어오셔서 예술센터 운영과 관련해서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고생을 하셨어요. 정기적으로 감염에 대한 체크도 했는데 갑자기 나빠지시더라고요. 2년 전에 나이가 더 들면 수술이 어려워지니까 지금 하는 게 적기라고 해서 수술을 하고 그동안 괜찮았는데 예술센터 운영 때문에 고생하신 게 아마도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최은희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세요?
=고향은 경기도 광주에요.
▶ 몇 살 때 배우가 되셨나요?
=15세쯤이었을 거예요. 그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갔다가 중퇴를 했어요. 일제 말기니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때라서 젊은 사람들, 학생들 전부 방공연습에 나갔어요. 우리 동네에 배우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방공연습에 나갔는데 누가 옆에서 유명한 배우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극단 아랑의 주연 전문 배우인 문정복씨였는데 그 분을 통해서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배우가 된 거예요. 문정복씨 덕분에 극단 아랑에 입단을 하게 됐어요. 해방 전부터 연극을 했었는데 아버지의 반대로 붙들려서 꾸준히 하지는 못했지만 연기생활은 계속 했어요.
▶ 처음부터 영화를 하셨나요?
=아니에요, 일제 때는 영화라는 게 일본 사람들 밑에서 일본 영화를 만들었지, 한국 영화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결국 일본 사람들 밑에서 만드는 거예요. 해방 후부터 한국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힘으로 우리가 만든 첫 영화가 ''''자유 만세''''인데 이 영화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죠. 나는 ''''새로운 맹세''''라는 영화가 연극출연 중에 교섭이 들어와서 그때부터 영화에 출연하게 됐어요.
▶ 신상옥 감독님과는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내가 영화를 세 작품 정도 하고 6.25사변 때문에 중단되었죠. 신협에서 연극 춘향전을 하고 있었는데 코리아라는 우리문화를 소개하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데 춘향전 한 장면을 넣고 싶다고 해서 다른 분들과 함께 출연한 계기로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예전에 신상옥 감독님이 만든 ''''악야''''라는 영화가 부산에서 시사회를 가졌는데 신협 단원들 전부 초대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젊은 감독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하도 들어서 오히려 나는 반대로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비판을 한 적이 있어요.(웃음) 그러다가 코리아라는 작품으로 만나게 되었죠.
▶ 신 감독님이 프러포즈를 하셨나요?
=윤백남 선생님의 ''''야화''''라는 연극을 대구에서 하고 있을 때 남자 배우하고 액션을 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졌어요.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는데 여자 선배가 신상옥 감독이 쓰러진 나를 업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무대에서 쓰러지니까 객석에서도 웅성거리고 출연진도 놀래고 갈팡질팡하던 와중에 신 감독이 뛰어 올라와서 들쳐 업고 병원으로 간 거래요. 알고 보니 이전 공연이 있을 때부터 따라다니면서 봤더라고요. 그게 인연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상대편 라이벌 극단에서 루머를 퍼트려서 정신적으로 무척 괴로웠지만 오히려 그게 더 신 감독님과 가까워진 계기가 되어서 54년도에 결혼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꿈'''' 작품을 둘이 제작을 하게 됐어요.
◇ 신감독의 외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배신감이 컸어
▶ 정말 두 분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으로 결혼하셨는데 신 감독님의 스캔들이 있으셨죠?
=내가 오히려 신 감독님에게 연애를 하라고 할 정도로 서로간의 애정과 신뢰가 두터웠어요. 그런데 막상 그런 일이 눈앞에 터지니까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너무 크더라고요. 애정이 식어서 이혼한 게 아니고 신 감독도 절대로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너무괘씸해서 결국 이혼했어요. 아이 둘은 양부모라도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양육권은 넘겨주었고요. 그런데 이번에 막상 사별을 하고 보니까 차라리 그때 생이별했던 게 오히려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에는 살아 있고 죽지 않으면 볼 수 있으니까요.
최은희2
▶ 이혼 이후에도 계속 만나셨어요?
=가끔 만났는데 밖에서 만났지 집안에서는 절대 못 들어오게 했어요. (웃음) 한번은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신 감독님이 그림 하나를 쑤욱 내밀더라고요. 신 감독님이 미술대학 출신인데 영화 때문에 그림 그릴 시간이 통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나와 헤어진 이후에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려고 그린 것 같아요. 그런데 그림 색채가 너무 어둡고 받을 상황도 아니어서 거절하고 쫓아 보냈어요. 그때는 심경이 그랬는데 그 그림이 지금 내 손에 있어요. 우리 아이가 보관하고 있다가 갖다 주더라고요. 다시 그림을 보니까 너무 잘 그린 그림이고 당시 남편이 얼마나 고통 속에 있었던가가 다 배어있었어요.
◇ 신 감독 도우러 홍콩 간 것이 아니라 안양 영화 예술학교 확장 건 때문에 갔어
▶ 최은희 선생님이 홍콩에 가신 것도 신 감독님을 도와드리러 가신 건가요?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당시 안양 영화예술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내가 뭘 해도 뒤에는 신상옥 감독이 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 혼자 학교를 살려보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에 학교를 확장해서 대학까지 하려고 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놓고 중도금까지 치른 상태에서 홍콩에서 초청이 왔어요. 어떤 내용이었냐 하면 ''''옥루몽''''이라는 영화를 제작할 텐데 감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는데 외국까지 나가서 감독할 일이 없다고 시나리오만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어요. 또 하나는 홍콩에도 우리처럼 예술학교가 있는데 자매결연 하자는 이야기에 솔깃했어요. 학생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지 않고 외국에 진출시키는데 가교 역할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홍콩에 간 거예요. 납치의 음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때 나 혼자 비행기를 탄 게 처음이었어요.
▶ 신 감독님도 납치를 당하신 거예요?
=항간에서는 나를 찾으러 왔다,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가 무성한데 아무리 이야기를 해 줘도 그대로 듣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 북한에서 신 감독님을 납치를 하셨을 때 선생님도 같이 계셨다면, 왜 5년 동안 못 만나게 하고 신 감독님만 감옥에 가두었던 걸까요?
=탈출을 계속 시도하다가 붙잡히기를 반복한 것도 한 이유에요. 그리고 아마 저를 만나게 해 줬으면 탈출 안 했을 거예요. 최은희씨가 이곳에 와 있을 테니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최은희는 중앙정보부에서 잡아서 죽였다고 대답하고 이게 서로 엇갈리다 보니 만날 수 없었던 거죠.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신 감독이 굉장히 고통을 당했더라고요. 술 마실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매일 밤 위스키 한 잔씩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요. 최은희가 여기에 없다면 나도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계속 탈출을 한 거예요. 탈출이 반복되니까 나중에 급기야는 감옥에 갔는데 감옥생활을 했다는 게 가슴이 무척 아파요.
▶ 그러다가 5년 후에 다시 두 분이 재회하셨는데 그쪽에서도 영화를 만드셨죠. 북한의 영화배우들 실상은 어떤가요?
=그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기를 책으로 썼는데 그 책을 보고 북한을 너무 헐뜯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조국은 저 하늘 저 멀리''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먼저 출판을 했는데 그런 나라가 어디 있냐고 해서 웃고만 말았어요. 우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을 못 해요. 우리한테는 어느 정도 자유를 주면서 작품 활동을 위한 여러 가지 투자를 했지만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어요. 진정한 예술은 진정한 자유 속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곳에서 나온 거죠.
▶ 소문으로는 김정일 위원장이 영화에 대단한 관심과 자료도 많이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에 관심도 많고 자료는 국내외 작품 1만 5천여 편을 소장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영화, 상록수를 그쪽 배우들한테 교재로 썼다고 해요. 순수하고 훌륭한 배우들이 많기는 하지만 외골수이고 창작범위도 너무 작고 작품마다 혁명일변도, 사상일변도 그런 것들밖에 없었거든요. 작품마다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이 열 번 이상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 탈출 할 때 신상옥 감독 내 어깨를 밀치면서 먼저 들어가려 했어
▶ 북한에서 탈출하신 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한데 미국대사관까지 뛰신 그 부분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를 타고 될 수 있는 대로 대사관 앞까지 가 달라고 얘기했는데 미국대사관으로 가는 길이 일방통행이고 정차한 차들이 많아서 30m앞에 정차하게 됐어요. 거기서 내려서 택시를 같이 탄 일본 기자한테 인사도 못 하고 우리가 대사관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지켜봐 달라는 이야기만 하고 뛰어 들어갔죠.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처럼 뒤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그 위기의 순간에 신상옥 감독이 내 어깨를 밀치고 먼저 뛰어 들어가는거에요. 나중에 한숨 돌리고 생각해 보니까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자기 먼저 살려고 어떻게 나를 밀쳐낼 수 있느냐 얘기를 했더니 '''' 내가 그랬어?'''' 하면서 전혀 기억이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수속을 밟고 어느 방으로 안내되어서 차를 마시면서 안정을 취하고 나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죠.
◇ 미국 망명 생활 3년이 여자로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어
▶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어떤 때였나요?
=행복했던 순간은 많죠. 둘이 고생하면서 작품 만들고 그게 대중들에게 환영을 받고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했어요. 또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소금''''이라는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탔을 때 국내 최초로 기립박수를 받은 기억도 행복해요. 여성으로서의 인생은 미국에 망명해서 아이들 데려다가 단란한 가정을 꾸려본 게 참 행복했어요. 그때는 신 감독도 영화인보다는 가장으로서 3년 동안 생활했으니까요.
최은희3
▶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기립박수를 받으시고 북한으로 돌아가시니까 반응이 어떻던가요?
=김정일 위원장도 만나고 대환영이었죠. 통일된 우리나라에서 이런 상을 받았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가슴 한 쪽의 허전함이 있었어요. 내가 여배우로서 상복이 많은데 상복이 없기도 해요. 국내외에 많은 상을 탔지만 트로피가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6.25사변 때 전에 받은 트로피는 전쟁 때문에 없어졌고 이후에 받은 트로피는 장충동에 살 때 집을 다시 지으려고 이사를 가면서 두 궤짝에 넣어서 차고에 두고 갔어요. 지금은 없지만 그 당시 넝마주이들이 궤짝을 뜯고 금덩어리, 은덩어리인 줄 알고 다 가져가 버렸어요. 또 내가 납북되는 바람에 그나마도 다 없어지고 이북에서 받은 두 개는 국가소유라서 헌납하고 그러니까 내 손에는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사진만 있어요. (웃음)
◇ 수녀 역할 한번 꼭 연기하고 싶어
▶ 남은 인생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역할 중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다 해봤는데 수녀 역할은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수녀복을 입고 연기를 하는 소망이 있는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웃음) 외국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여배우가 나이를 타거든요. 캐서린 헵번이 연기한 ''''황금연못''''은 우리나라에서 영화와 연극으로도 상영되었는데 그런 연기를 해 보고 싶어요.
▶ 말씀처럼 늘 건강하셔서 좋은 작품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벙어리>빨간>사랑방>상록수>성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