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은 참 멋진 일이지요. 사람을 젊게 만들고, 기분을 업 시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움직이는 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지요."
이 말은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미용업계의 일인자로 우뚝 선 박준 헤어 디자이너가 한 말이다.
전남 해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입시에 낙방하자, 어머니 몰래 달걀 판돈 5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가출했다. 그 후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장사, 공사장 인부, 유흥업소 종업원…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발견한 미용 일……. 우연히 종로 YMCA 사무실로 지나는 길을 가다가 발견한 미용실,'' 어! 저 일 한번 해봐도 괜찮겠구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생각 하나!
당시 미용은 금남의 구역이었지만, 남들이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마침내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한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뻗어나간 박준 뷰티랩 대표이고,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오른손에는 미용 가위를 들고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헤어 디자이너 박준을 3월 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내 머리는 실험용 마루타▶ 원장님은 늙지도 않나 봐요?- 구정이 지난 지 좀 됐지만 구정 때 한 살 먹어서 없앴어요. 잘 소화시키니까.. (웃음)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래서 더 그런 것 같아요.
▶ 원장님의 헤어디자인은 누가 해주나요?- 실험용 마루타도 하죠. (웃음) 그런데 직원들이 좀 두려워해요. 하고 싶은 스타일이 있으면 이야기도 하지만 자율적으로 맡기는 편이에요.
▶ 요즘은 어떤 스타일의 머리가 유행을 하나요?- 스타일이 많이 다양해 졌어요. 옛날의 획일화된 이발소 문화에서 미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다변화된 것 같아요.
▶ 사람에게 헤어스타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이미지의 70%라고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의상보다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저희들도 생각을 해요.
▶ 고향이 해남, 땅끝 마을이세요?- 저는 땅 시작 마을이라고 한다. (웃음) 자연환경이 좋고 개발이 더디 되어서 친환경적인 모습을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참 아름답습니다.
◇ ''길 나발''의 무작정 서울상경▶ 해남에선 어떠셨어요?- 14살까지는 해남에서 살았고 42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거의 서울사람이죠.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 낙방하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군에 중학교가 딱 하나라 4:1 정도의 경쟁률이었는데 재수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는 서울 가서 독학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 학생 때 어떤 학생이셨어요?- 농사일을 많이 도왔어요. 제가 7남매 중에 셋째이다., 나무도 하고, 소도 키우고, 어렸지만 어른들이 하는 일을 거의 다 했어요. 그러다 시골생활도 싫고 앞으로 꿈도 시골생활은 아니어서 야반도주를 했지요.
▶ 초등학교 때도 스타일에 관심이 있었어요?- 자유분방한 편이었어요. 산에서 노래도 부르고 동네에서 ''''길 나발''''이라고 부를 정도로 제가 가는 곳에는 항상 제 노랫소리가 따라왔죠. 노래를 좋아했고 부르는 것도 좋아해서 원래 꿈은 가수였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도 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 ''''길 나발''''이라는 별명이 너무 재미있네요. 요즘도 동네 친구들은 만나기도 하시나요?- 자주 본다. 동창회도 가고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전통적인 농사일 하시다가 제가 모시고 서울에 오셔서 20년 정도 사시고 돌아가셨어요.
▶ 14살에 무슨 꿈을 안고 가출을 하셔서 서울에 오셨어요?- 그때 당시에는 저처럼 서울로 가출한 사람이 참 많았어요. 말은 제주도, 사람은 서울이라고 무작정 상경이 많았는데 저도 무작정 올라와서 고생을 참 많이 했죠.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많이 해 봤는데 그런 체험이 정신무장을 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었어요. 사람은 어떤 고생이나 어려움도 긍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면 발전을 할 수 있는데 만약, 역으로 잘못 풀렸으면 안 좋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 ''''저거 남자가 하면 어떨까''''▶ 계란 판돈 500원으로 가출을 감행하셨는데 가정형편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아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 없이 살았어요. 옛날에 500원이면 작은 돈은 아닌데 가축을 많이 키워서 몇 개 정도는 없어져도 모르니까 매일 하나 둘 모아서 팔아가지고 경비를 마련했죠. 형제가 많아서 저 하나 떠나는 건 큰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서울에 가자마자 편지를 보냈어요. 명절 때는 꼭 내려갔고 떠날 때만 안 보내 주시니까 몰래 올라왔지 와서는 걱정하시지 않게 자주 내려갔어요.
▶ 14살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요.- 가수보다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꿈이 컸어요. 처음에는 갈 데도 없고 외곽 지역의 작은 공장에서조차도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고 안받아주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사람행세 하려고 사투리를 없애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완전히 사투리를 없애고 취직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 동대문시장 신발가게 도매상에서 장사의 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여러 사람 중에 한 사람과 싸워서 고민을 하게 됐죠. 그런데 종로2가 YMCA커피숍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미용실 앞을 지나는데 문득 ''''저거 남자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드는 거예요. 원장님도 외국에는 남자도 많은데 해보면 괜찮을 거라고 선뜻 저를 받아주셨어요.
▶ 아무 연고도 없이 그냥 미용실에 들어가셔서 하겠다고 하신 거예요?- 아는 것도 본 적도 없고 가족 중에 누구도 하는 사람이 없었죠. 우연히 생각나서 용기를 낸 거예요. 반항적인 끼가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첫날 문 앞에서 도저히 들어가기가 어려워 몇 바퀴 돌다가 출근했어요.
▶ 그럼 처음에 어떤 일부터 하셨어요?- 처음엔 청소부터 했죠. 알고 보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미용실이었더라고요. 30명 미용사 중에 남자가 저 하나라 허드렛일은 다 했어요. 청소로 ''''박 오빠'''' 시절이 오래갔죠. 청소하면서 직원들과 마네킹 샴푸 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 그때는 남자 미용사가 전무후무해서 사람들 반응이 별로 좋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고객님 중에 남자 싫다는 사람 많았죠. 담배를 심하게 피워서 더 싫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담배를 끊어서 지금까지 안 피우고 있어요. 고객의 한마디가 담배를 끊게 했지요. 이것을 하려면 당연히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바로 끊었어요. 금연은 의지가 문제라고들 하는데 어떤 환경이 되면 누구나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착해보였는지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고객도 있었어요.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어요.
◇ ''''박 오빠'''' 시절에 부르는 노래▶ 남자미용사가 있기는 했었나요?- 유지승 씨처럼 더 빨리 시작한 분도 있었지만 그때는 잘 몰랐고 남자 미용사가 흔치는 않았지요. 그리고 아주 어려서 시작한 게 아니라 22살 성인이 돼서 시작한 것이라 더 어려웠죠. 열심히 노력했고 기술을 배우려고 야간학교 1년을 다녀서 자격증을 땄어요. 총학생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30-40%가 넘을 정도로 남학생이 많지만 그때는 남자가 저 혼자였어요.
▶ 그 미용실에는 얼마나 근무하셨어요?- 4년을 있다가 명동에 조이미용실이 새로 오픈을 하면서 스카우트되었어요. 김옥진 회장님이 배려를 참 많이 해주셨어요. 지금도 어머니로 모시는데 소위 배신을 하고 떠났지만 늘 잘해 주셨고 요즘도 행사 때 꼭 오셔서 격려해 주세요. 조이에서는 3년을 있었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서 신경을 쓰다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어요. 남들 일할 때 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손님이 없으면 인정을 못 받는 거잖아요. 명암을 돌리면서 호객행위도 많이 하고 밥을 먹거나 물건을 살 때도 고객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죠. 거리세일즈로 고객확보도 많이 하고 짧은 시간 동안 단골확보를 많이 했어요.
▶ 미용을 시작하고 7년 만인 80년에 세계대회를 나가신 건가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세계대회를 나갈 수 있는 등용문인 IBS(International Beauty Show)라는 예선대회에서 79년에 준우승을 하면서 태평양화학에서 경비를 지원해서 80년에 뉴욕에 갔지요. 여건이 너무 열악해서 퍼머넌트부문에 3위를 밖에 못 했어요. 외국을 나가는데도 남자 미용사가 외국에 나간 경우가 없어서 당시 보사부에서 추천서가 있어야 가는데 추천을 안 해줘서 1차로 가지 못했어요. 정부지원자격증이 있는데 남자라고 왜 안주냐고 따지고 결국은 받아서 갔지만 대회 직전에야 겨우 가서 현지적응훈련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 세계대회를 나가보니 남자 미용사들이 많이 오셨나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큰 대회장이나 유명한 사람이 전부 남자였어요. 우리나라 대회장만 여자가 왔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리더는 남자더라고요. 수만 명의 미용인이 삼일 동안 모여서 쇼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콘테스트도 하고 그랬는데 미용세계에 너무 빠져서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강한 충동에 팀에서 잠시 이탈해서 LA의 비달사순학교에 일단 들어갔어요. 2주 정도 교육을 배우면서 커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 이후로 제가 가위손 커트, 전문가 커트에 대한 매력을 느껴서 지금도 빠져들고 있는데 예술 그 자체더라고요. 디자이너라는 개념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제 나름대로의 느낌으로 돈만 모아지면 미국이든 유럽이든 다 찾아다니면서 미용에 대한 경험을 했어요.
◇ LA 야반도주, 가위손의 꿈▶ 수입이 좋으셨나 봐요?- 그 당시 대기업 월급이 20만 원이었는데 200-300만 원을 벌었으니까요. 돈만 생기면 외국 나가서 미용인 만나고 보고 느끼고.... 돈을 모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쏟아 부으면서 미용에 대한 매력을 느꼈죠.
▶ 다녀오신 후 다른 곳으로 옮기셨지요?- 갔다 와서 마샬 미용실에 스카우트 됐어요. 탑 헤어스타일리스트로 우리나라의 미스유니버시티 책임을 맡으면서 3년 동안 그곳에서 최고의 경영전략도 배울 수 있었어요. 최고 유명한 미용실은 제가 섭렵을 한 거예요.
▶ 그럼, 샵은 언제 내신 건가요?- 미용을 시작하고 10년 만인 82년에 충무로의 태극당 맞은편에 30평 정도로 차렸어요. 하자마자 성시를 이뤘는데 첫 번째 시련이,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저희 직원들을 대거 데려간 거예요. 가서 담판을 짓고 다시 데려와서 배신을 했으니 점진적으로 내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재정비를 했죠. 그때부터 전국미용세미나를 많이 다녔어요. 평일은 일하고 일요일은 세미나에 강의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했지요. 쉬는 날 없이 일하다 보니 빚도 빨리 갚았어요. 강남으로 넘어오면서 크게 발전했던 게 제가 아이디어가 많아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려서 커트를 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벤트는 남성전용미용실을 최초로 만든 것이었어요. 안성기, 이영하, 조용필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연예인을 비롯해서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부인은 남편을, 여자 친구는 남자친구를, 어머니는 아들을... 3년 동안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손님이 많았어요. 그것이 주춧돌이 되어서 돈을 좀 모아서 강남에 사옥을 지으려고 땅을 사논 것이 지금 현재 청담동이지요. 부동산 투자도 몰랐고 필요해서 산 건데 그 당시 땅을 사 놓지 않았다면 돈을 모아서 건물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 이렇게 그야말로 승승장구하셨는데 그래도 고향에 가시면 남자가 미용을 한다고 다른 눈으로 보기도 했을 것이고 14세에 올라왔기 때문에 ''''초졸''''인데 그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으신지요?
- 야간으로 공부도 하고 영어도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도 봤어요. 학교 다닐 때도 생각이 많아서 여러 가지를 하다가 결국은 못했지만 주위에서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꽃밭에 있어서 좋겠다는 말도 하지요. 처음에는 집에 얘기도 못 했지만 나중에는 부모님도 인정해 주셨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나중에는 가족 모두가 서울에 다 올라왔지요. 그리고 지금은 모든 형제가 미용을 하고 있어요.
◇ 새로운 길은 또 다른 길을 낳고▶ 원장님 밑에서 다 배우신 거예요?- 물론 제 밑에 있었는데 형님은 자격증 없이 경영만 하고 동생들은 전부 자격증을 따서 미용실을 오픈시켜서 우리 브랜드로 여기저기서 운영을 하고 있지요.
▶ 한 사람이 개척을 한다는 것이 외롭고 어렵지만 그것이 잘 되면 온 가족들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건데 정말 놀랍네요.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명동에서 오픈하고 메이크업아티스트를 찾는데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온 저희 집사람을 뽑았어요. 한마디로 눈이 맞았지요. (웃음) 두 부부가 열심히 하니까 그 후로는 부부 미용하는 커플들이 많이 생겼어요. 메이크업 쪽으로 우리 샵이 굉장히 유명했고 연예인, 방송, 잡지 일을 많이 할 정도로 집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 아드님도 미용공부를 한다면서요? - 영국에서 지금 경영공부를 하고 있는데 공부 끝나면 뭐 할래 하고 물었더니 스스럼없이 미용을 하겠다고 해서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어요. 경영학공부가 끝나면 영국의 1년 코스 미용학교에서 배우고, 일본에 가서 배운 뒤에 경영과 미용을 겸비한 일을 할 것 같아요.
▶ 박준 이라는 이름이 미용계에 우뚝 섰는데 영국은 갑자기 왜 가신 거예요?- 2000년에 잠깐 나간 계기가 제가 서울대 경영대학원도 1년 다니고, 고려대 등 경영대학원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의학도 발달하고 시대가 최첨단으로 자꾸 바뀌다 보니 수명은 자꾸 늘고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 2000년이 오십이 되는 해였는데 앞으로 오십 년 더 살려면 투자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유학을 결심했죠. 저는 무엇인가를 하려면 실천하기 위해서 얘기를 먼저 하는데 2000년에 떠날 거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2000년 1월 7일에 영국으로 떠났지요. 사실은 말이야 유학 간다고 했지만 어학코스를 밟으면서 느낀 것이 영어로 먹고살 것도 아니고 기초적인 것만 할 줄 알면 되지 하는 생각에 현장체험으로 바꿔서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것만 샅샅이 찾아보면서 여행 다녔어요. 그리고 유럽을 여행 다니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지요.
▶ 여기의 미용실은 어떻게 하셨어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낀 게 여기서 너무 바쁠 때 나갔는데 제가 안 해도 돌아간다는 것이었어요. 모든 걸 버리고 갔는데 루머는 많았어요. 이혼 도박 부도 갖가지 악성루머가 많았죠.
◇ 영국미용실에서 동양인 마술사를 찾아주세요 ▶ 문화생활과 여행을 하시면서 좋은 경험들을 많이 했겠어요.- 마지막 6개월 남은 동안은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영국에 있는 미용실에 취직을 했어요. 바닥청소하고, 샴푸 해주면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체험하고 왔지요.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잘한 결정은 영국에 2년 6개월 동안 갔다 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요. 갔다 와서 모든 것을 새롭게 계획하고 기업형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로 회사를 키우고 투자를 하고 제품을 만드는 하나의 사업가의 개념을 배웠어요.
▶ 영국에서 취직해서 한국 제일의 헤어디자이너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셨어요?- 했어요. 그런데 그곳은 디자이너가 머리만 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다 해야 해요. 그 미용실에서 잡지에 동양인의 마술사라고 광고도 내줘서 한국교포도 많이 찾아오고 현지인들도 많이 왔지요. 선진국임에도 미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인상적이었고 늦게까지 일해도 불평 없이 일하더라고요. 오랫동안 근무해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라 즐기면서 즐겁게 하더군요. 제일 부러운 건 주5일제였어요. 돌아와서 적용했는데 결국 무리가 돼서 일 년 만에 접었어요. 고객위주로 바뀌면서 365일 오픈을 하고 로테이션 근무를 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헤어디자이너들도 삶의 질이 좋아야 된다고 강조하고 휴가를 더 주고 있어요. 노력하는 사람에게 프로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제 목표인데 노력하면 결과가 좋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직원들에게 즐기는 것의 느낌을 많이 주려고 해요.
▶ ''''박준'''' 이름으로 나가 있는 미용실이 몇 개가 되나요?- 외국까지 합치면 100여 개 되는데 이름만 주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심는데 주력을 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교육을 꼭 받아야 하고 규율이 엄격합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고 교육적인 것이 뒤따르지 않아서 문제도 많았는데 프랜차이즈를 한지 십여 년 되다 보니까 이제는 노하우가 쌓이고 외국에도 교류가 좋아요. 특히, 영국에 교육프로그램으로 교육시키기도 하고, 거기에 친구들이 많으니까 언제든지 프로그램을 쓸 수 있고, 와서도 교육을 하기도 하고, 우리가 연수 갈 때 도움을 받기도 하죠.
▶ 코스닥상장도 준비 중이라고요?
- 그래서 투명하게 경영을 하고, 새로운 CEO도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하고, 경영마인드가 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시스템화 작업을 준비 중이에요.
◇ 출결사항 좋으면 무조건 최하 ''''A''''▶ 학교도 나가야 하고 그 바쁜 하루일과를 어떻게 보내세요?- 사람들이 정말 바쁘게 산다고 하는데 그래도 할 건 다 해요.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지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만들면 되는 거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과감하게 제가 없어져 보기도 하고, 시스템화 작업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모든 게 인터넷으로 다 해결이 되잖아요. 전문가로서의 생활이 여유로워야 작품이 나오지 너무 일만 빠져들면 오히려 스트레스도 받고 내용도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는 직원들 보러 잘 놀라고 해요. 그래야 아이디어도 나오고 신이 난다고요.
▶ 잘하시던 노래는 어떻게 되셨나요?- 지금도 잘합니다. 감초처럼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노래도 하고 요즘은 이루의 ''''까만 안경''''을 즐겨 부릅니다. (한 소절만 부탁했더니 목청껏 ''''미안해요 잘해 주지 못 한 나지만...'''' 불러주셨습니다.)
▶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성공 포인트''''를 한마디로 정의 한다 면요?- 저는 물론 정신력이라고 얘기를 해요. 사람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정신력이 살아있으면 분명히 된다고 생각을 해요. 기술이 선천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아예 첫 강의시간에 출결사항 좋으면 무조건 최하 ''''A''''라고, 어떠한 경우라도 결석만 없으면 ''''A'''' 이상은 된다고 못을 박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