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음 (사진=이미지비트 제공/자료사진)
옷 안쪽에 감춰놨던 망치가 김정민(23·가명) 씨의 머리를 내리쳤을 때, 김 씨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살려주세요!"
피범벅이 돼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 도망쳤다. 망치가 다시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 순간, 김 씨는 소리를 지르며 가까스로 꿈에서 깼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김 씨는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꿈인 걸 깨달았다. 그가 입고 있던 환자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머리의 상처에 손을 댔다. 우툴두툴한 수술 자국이 만져졌다.
수원시 한 구청 민원실에서 공익 요원으로 근무하던 김 씨는 지난해 12월 27일 함께 근무하던 고참 황모(26) 씨가 휘두른 망치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간신히 몸을 피해 목숨을 구했지만 사고 당시의 기억은 매일 밤 악몽으로 되살아나 김 씨를 괴롭혔다.
불안 증상에 대인 기피증까지 보였던 김 씨. 수면제와 안정제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그를 변화시킨 건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사고를 당한 뒤 병실에만 누워있던 그에게 경기경찰청의 'CARE팀' 경찰관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피해자 심리전문요원 홍승일 경사입니다. 범죄 피해를 당하신 분들께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어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홍 경사는 김 씨의 심리 상태와 범죄 피해 정도를 살핀 뒤 법무부 산하 범죄피해자전문센터에 김 씨에 대한 10주 과정의 심리 치료를 요청했다.
석 달 간의 심리 상담과 치료가 모두 끝난 뒤, 김 씨는 상담사로부터 "눈빛이 달라졌다"는 말을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매일 밤 김 씨를 괴롭히던 악몽은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횟수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김 씨 스스로 "신경안정제를 줄이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곁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들을 지켜보던 김 씨의 아버지(56)는 "이제야 숨 좀 돌리겠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고 이후 아들이 보복을 당할까 무섭다며 매일을 불안에 떨며 살았어요. 이름을 바꿔 달라, 이사 가자고 조를 때마다 억장이 무너졌는데 이제는 아들이 다시 살아난 기분으로 열심히 착하게 살겠다고 말해 너무 기뻐요."
◈ 웅크린 가정폭력 피해자도 CARE 서비스에 '활짝'"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너랑 니 애들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지난 2월 부엌칼을 휘두르며 협박하던 동거남 때문에 한 달 넘게 찜질방을 전전했던 정미경(43·여·가명) 씨도 경찰의 CARE 서비스를 받고 난 뒤 삶이 달라졌다.
동거남이 다시 찾아와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경찰의 끈질긴 설득과 상담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에는 내가 이래도 되나 생각에 겁이 났죠. 하지만 경사님이 상대가 협박할수록 더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어요. 그전에는 크게만 보였던 그 남자가 이젠 거짓말처럼 꼬리를 내리더군요. 저한테 이런 용기가 있는지 몰랐어요.(웃음)"
범죄에만 수사력을 모아온 경찰이 이젠 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나서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 충격에 시달려 자살까지 시도하는 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경찰은 피해자 심리전문요원, 즉 'CARE 팀'을 꾸려 피해자들이 일상 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지원하고 있다.
전국 16개 지방청에서 활동하고 있는 CARE 팀 요원은 모두 29명. 심리학 전공자와 병원, 심리 상담소 경력자 위주로 구성된 CARE 팀은 현장에 출동해 피해 정도와 심리적 상태, 피해자의 주변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가장 필요한 지원책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경기경찰청의 경우, 1청과 2청에 4명의 요원이 활동중이다.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538건의 사건에서 발생한 601명의 범죄 피해자에 대해 현장 활동과 심리 상담 등 1711건의 지원 활동을 폈다.
CARE 팀은 법무부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연계해 피해자가 무료로 심리 치료와 상담을 받게 하거나 유족 구조금 등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는 4월부터는 살인이나 방화 등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경찰에서 임시 숙소를 제공하는 '임시 피해자 숙소 서비스'도 펼 예정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올해부터 예산 2억 원을 지원받아 여성가족부 긴급 쉼터와 별도로 경찰 차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CARE 서비스 시행 8년째지만 예산은 올해 첫 '시행' CARE 서비스는 지난 2007년 도입돼 시행된 지 올해로 8년째를 맞는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정책이지만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경찰 자체 예산이 올해 처음 시행되는 등 아쉬운 부분도 있다.
법무부의 경우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에 따라 범죄 피해자의 의료 제공과 상담, 취업 지원 등을 위한 예산이 지원된다. 올해 책정된 범죄피해자 지원 예산은 총 594억 2100만 원. 이 중 성폭력과 아동폭력 피해자들에 지원되는 361억원을 제외하고 법무부는 209억 원을 강력범죄 피해자에게 사용한다.
그러나 경찰청은 올해 시행되는 쉼터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예산이 전무한 실정이다. 법무부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연계해 피해자 심리 치료와 경제적 지원을 돕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범죄피해자 지원 예산과 관련한 법무부 회의에 여러 차례 참석해 CARE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예산 확보에 노력해 왔다"며 "이번에 시작하는 피해자 쉼터 사업이 잘 진행된다면 예산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나타냈다.
경기청 케어팀 홍승일 경사는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해 한다고 뛰어다니지만 자체 예산도 없고 부족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일선의 경찰을 중심으로 피해자들이 지원을 받을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서비스를 펼 예정"이라고 말했다.
"CARE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일선의 형사들이 귀찮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피해자를 도와줄 수 있냐'고 먼저 전화가 와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가정 폭력과 같은 음지의 피해자들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돕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