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혁(54)씨는 서울 봉천동에서 시작해 동대문과 종로 등지에서 25년간 돼지곱창 요리만 전문으로 해온 '곱창의 달인'이다.
2011년 3월 최씨는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 자신의 이름을 건 곱창집인 '최준혁 원조곱창포차' 본점을 내기로 하고 2층짜리 건물을 2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했다.
계약 조건은 보증금 1억원에 월 임대료 700만원. 2억여원을 들여 내부 수리를 마쳤고, 중심 상권인 만큼 전 세입자에게 권리금 1억5천만원도 내야 했다.
최씨의 곱창 요리는 개시 1년도 되지 않아 많은 단골을 만들어내며 자리 잡아갔다.
하지만 "걱정 말고 장사만 하라"던 건물주는 최씨 몰래 2012년 11월 이 건물을 인근 술집 주인에게 팔아넘겼고, 이때부터 최씨의 꿈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건물주는 최씨에게 당장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했다. 월 임대료를 1천100만원으로 400만원 올려준다면 1년 더 영업을 해도 괜찮다는 내용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도 곁들였다.
최씨는 결국 전 재산을 털어 투자한 권리금 1억5천만원과 시설보수비 2억여원을 고스란히 날릴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종로구청 인근 중국집 '신신원'은 1995년 5월 전 세입자에게 권리금으로 1억3천500만원을 주고 가게를 열었다. 계약 조건은 보증금 6천500만원에 월 임대료 320만원이었다.
사장 부부가 억척같이 일하며 꿈을 키워가던 어느 날 건물주가 갑자기 제소 전 화해조서를 만들어 이들에게 내밀었다.
조서 내용은 보증금 1억원에 월 임대료 650만원으로 값을 대폭 올려서 계약하든지 아니면 지금과 같은 계약 조건으로 1년만 더 영업하고 조건 없이 가게를 비우라는 것이었다.
신신원 사장은 어쩔 방도가 없어 1년만 영업을 더하고 가게를 비우기로 화해조서에 서명했다. 제소 전 화해조서는 재판 없이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 효력을 지닌다.
신 사장은 이후 가게를 양도양수한 뒤 권리금을 되찾으려 했지만 건물주는 월 임대료 700만원에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고 가게를 빼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결국 신신원은 18년간 지켜온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가 됐다.
최씨와 신신원의 사례는 도심 재개발이 한창이던 5년 전 용산 재개발 보상 대책에 반발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숨지거나 다친 철거민들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이 구역에서 식당을 하던 한 철거민은 권리금 4천500만원, 내부수리 비용 3천690만원을 투자했지만 서울시가 퇴거를 요구하며 쥐여준 보상액은 2천900만원 뿐이었다.
결국 이들은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하며 경찰과 극한 대치를 벌이다 6명이 목숨을 잃는 '용사참사'라는 비극을 맞고 말았지만, 정작 그곳은 부동산 광풍이 지나간 뒤 황량한 주차장이 돼 버렸다.
용산참사 이후에도 세입자 권리금 보호를 위한 입법은 전무한 상태다.
이원호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 제도개선위원회' 사무국장은 14일 용산 참사 5주기 추모위원회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 등이 국회에서 연 '상가권리금 약탈 피해 사례 발표회'에서 "보상 문제는 개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가세입자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국장은 "현행 제도는 개발 이익과 관련해 건물주에 대해서만 무형의 자산가치를 인정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세입자들이 영업을 통해 형성한 상권 자체의 가치도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따라서 권리금을 감정평가의 항목에 포함시켜 보상하는 것이 합리적인 안"이라고 말했다.
발표회에 참석한 김철호 변호사는 "용산 참사 이후 휴업보상비를 3개월분에서 4개월분으로 늘리긴 했지만 이는 실제 수수되는 권리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개선"이라며 "권리금 약탈을 막기 위한 더 현실적인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른 시일 내 특별법 제정이 어렵다면 상가임대차 기간을 더욱 장기로 보장하고, 그 기간 내 어쩔 수 없이 퇴거할 때는 퇴거료를 보상하는 방안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상가세입자의 권리금 피해를 막기 위한 '상가권리금 보호에 관한 특별법' 안을 이번 주중에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