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은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대선 결과 박근혜정부가 출범했지만 우리사회는 민주헌정이 자리를 잡은 1988년 이래 유례없는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 요즘 대학가에 유행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답답한 현실을 반영하는 한 단면이다.
CBS는 대선 1주년을 맞아 아직도 대선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짚어 보고 대안을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사건으로 한 걸음도 내걷지 못한 대한민국의 지난 1년을 정리해봤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파면 덮고...정보기관에 만신창이 된 대한민국의 1년
②고착된 이념 논쟁, 멀어진 국민통합
③대선 최대 이슈 경제민주화,복지...빛좋은 개살구였나?
④ 박근혜 스타~일, 유신회귀? 창조리더십?
지난해 12월 13일 오후 여직원 김모씨가 역삼동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증거자료를 수집을 지켜보고 있다. 황진환기자
16일은 지난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대한민국을 흔들어온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경찰이 ‘중간수사결과’ 라는 걸 발표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다.
경찰은 의혹을 하루 빨리 해소하기 위한 밤샘 수사의 결과물이었다고 했지만 ‘대선 댓글 흔적을 발견 못했다’는 발표 내용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옳지 않았다.
국정원이 한 두 건도 아닌 121만건의 정치개입 글을 유포한 사실이 검찰의 수사로 훗날 밝혀진 것을 놓고 보면 그랬다는 얘기다.
경찰 수사팀 역시 올해 1월 3일, 31일 두 차례에 걸쳐 국정원 여직원이 각각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99차례 찬반표시와 120개의 정치 관련 글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경찰 수뇌부의 지시로 수사 개시 5일 만에 서둘러 발표한 수사결과를 보름 여 만에 바로잡은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 뒤 수사팀장이던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다른 자리로 인사조치 됐다.
이는 김용판 서울 경찰청장의 또 다른 사건 은폐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사흘 후 민주당의 김 전 청장에 대한 고발은 그에 대한 응전으로 기록된다.
국정원이 여직원의 존재를 민주당에 제보한 전현직 국정원 직원 2명을 2월 20일 내부 기밀 유출 혐의로 고발한 것은 대선개입 사건 여론의 초점을 흐려놓기 위한 국정원의 방해 공작으로 읽힌다.
실제 여권이 2명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의 제보를 매직 매관이라는 범죄로 포장해 여론몰이에 나선 것도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는 ‘물타기’ 수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의 대선개입 활동이 양파껍질 벗겨지듯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사건에 대해 질타하는 여론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에 힘입어 경찰은 4월 18일 일부 국정원 직원이 사실상 정치개입을 했다는 내용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다.
국정원이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기 위해 사전 법률검토에 들어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훗날 대한민국에 또 다른 충격파를 던졌던 사실을 상기해 보면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을 덮기 위한 모종의 전략이 가동됐던 것으로 관측된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7월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올라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송은석기자
경찰의 바통을 이어받은 서울중앙지검 윤석열 수사팀의 수사는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의 경찰 수사팀에 대한 수사 축소 외압을 대상으로 두 갈래로 진행됐다.
검찰 수사팀은 4월 30일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과 5월 20일 서울경찰청에 대한 압수수색 등으로 당초 우려와는 달리 사건에 대한 수사를 착실히 진행했다.
그 결과 6월 14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등 5명을 기소한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검찰의 수사 발표는 학생, 교수, 농민, 여성, 예술, 종교, 해외 동포 등 국내외 각계에 시국선언을 몰고 왔고 2008년 5,6월을 달구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를 연상시키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검찰 수사를 지휘한 채동욱 검찰총장을 끌어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 채 총장의 혼외 아들로 지목된 채 모군의 가족부를 몰래 들춰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국정원이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인 6월 24일이었다.
문제의 대화록 공개는 끝도없는 NLL공방과 뜬금없는 사초폐기 공방을 대한민국 사회에 잇따라 지피면서 우리 사회를 또 다시 대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대화록 공개라는 국정원의 돌발 행위로 인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은 망각의 강물 속에 가라앉는 듯 해 보였다.
이어 전개된 국정원 댓글 사건 등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국면.
새누리당은 검찰이 확인해 기소한 73건의 선거개입 댓글만을 근거로 들며 “국정원 심리전단 70여명이 100일 동안 겨우 73개의 댓글을 썼다면 선거개입 목적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국정원을 비호하기에 급급했다.
따라서 새누리당은 원세훈, 김용판 등 핵심 증인들에 대한 청문회 증인채택 불가를 고수했고 이에 맞선 민주당은 8월 1일 국회를 뒤로 하고 장외로 나갔다.
한 낱 여야간 정쟁 정도로 끝나가던 국조 특위 청문회가 그나마 열기를 더한 것은 권은희 전 수사팀장의 증언이었다.
권 전 팀장의 폭로로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여론은 또 다시 비등하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내란음모 등 혐의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황진환기자
그러나 불과 열흘 뒤 국정원은 이번에는 현역의원이 가담한 무시무시한 내란음모 사건을 꺼내들고 나왔다.
사건 자체의 충격과는 별도로 이 사건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을 물타기 하기 위한 국정원의 기획이었다는 의심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인 9월 6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의 트라우마가 채 가시기도 전 이번에는 난데없이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를 숨겼다는 조선일보 기사가 돌발했다.
3개월 전 원세훈 전 원장의 기소 무렵 움직였던 보이지 않는 손이 대선개입 사건의 숨통을 움켜 쥔 것이다.
현직 검찰총장의 사생활은 유래 없는 법무부 감찰로 이어지더니 보도가 나온 지 열흘 만에 총장 사퇴로 귀결됐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수사를 불편부당하게 지휘해오던 총장의 낙마 사태의 후과는 예상대로 윤석열 수사팀장과 조영곤 서울지검장의 갈등으로 표출됐다.
윤석열 수사팀장은 10월 18일 국정원이 트위터를 통해 선거에 개입한 사실을 5만 5천건의 트위터글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공소장에 추가하는 개가를 올렸음에도 수사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얼마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73건의 선거개입 댓글이 5만 5천건의 트위터 글로 불어났지만 여권은 여전히 “한강 물에 물 한바가지 부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로 범행 자체보다는 범행의 정도만을 문제 삼았다.
이 와중에 진행된 10월 정기국회 국정감사는 대선개입 감사라 할 만큼 국정원 외에도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및 국가보훈처 중심의 이념교육 등이 고구마 줄기처럼 터져 나왔다.
이어 11월 20일 국정원의 정치 트위터글이 121만건에 이른다는 또 다른 사실이 검찰 수사팀에 의해 확인됐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사제단이 지난달 22일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연 시국미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121만 건의 위력 앞에 그 동안 숨을 죽여온 ‘대선 불복’ 선언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강론을 필두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제도권에서도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현역 의원으로는 처음으로 역시 ‘대선불복’을 선언하며 정치권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리고 경찰이 헛된 댓글 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지 1년이 되는 이날 국회에서는 국정원 개혁을 위한 첫 공청회가 열린다.
국정원의 꼬리가 밟힌 지 1년만에 국회 주도의 국정원 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사건 발발 1년이 다 되어 감에도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여권의 이 사건에 대한 불변의 인식 때문이다.
121만건의 불법 트위터 글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은 여전히 그 글이 108만표의 차이로 나온 대선결과에 과연 영향을 미칠 정도였겠느냐는 인식에 머물러있다.
그러면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증폭시키는 행위는 박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선불복 세력의 나쁜 의도가 개입된 짓이라고 보고 있다.
7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규탄 비상시국대회' 참가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황진환기자
그러나 야당은 대선불복의 함정을 경계하면서도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며 판단을 유보한다.
실제로 지난 10월 27일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의 여론조사를 보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 투표한 사람 가운데 8.3%가 대선 직전 경찰이 국정원 사건에 대해 수사결과를 사실대로 밝혔을 경우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으로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박근혜 후보가 얻은 표가 1577만 3128표였기 때문에 8.3%는 130만 표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 여론조사대로라면 대선 결과는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당 문재인 의원은 지난 14일 자신의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 북 콘서트에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 대선 개입을 덮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지난 1년간 하고 싶었던 개혁 과제들을 거의 못했다"며 "시민들의 염원들을 2017년에는 반드시 이뤄낼 수 있도록 함께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