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한 장이 그동안 시국에 무관심했던 대학가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한 고려대생이 지난 10일 붙인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전국 각 대학교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
대자보들이 붙은 고려대 정경대 후문. (페이스북 캡처)
처음 대자보가 붙은 고려대 정경대 후문 벽은 13일 현재 20장의 대자보로 가득 메워졌다.
고려대 대자보를 계기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도 제작됐다.
이곳에는 고대생뿐 아니라 다른 대학교 학생들이 작성한 대자보들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대학생들이 자필로 작성한 이 대자보들은 세상을 외면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상한 시절'을 꼬집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최모 군은 시험공부를 하다가 860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직위해제됐다는 속보를 듣고 펜대를 내려 놓았다.
최 군이 12일에 작성해 교내 게시판에 붙인 대자보는 "저는 오늘부터 안녕하지 않습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최 군은 "한 때 세상의 변화를 꿈꾸기도 했지만 현실에 번번이 좌절했고, 군 복무 이후에는 그저 '안녕하고자'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전교조 법외노조 논란, 철도 민영화와 철도노조 파업과 조합원 직위해제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정작 세상은 안녕하지 않은가 봅니다. 상식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지고 있는 시절입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안녕하지 못한 세상을 보면서 안녕하고자 했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라면서 "저는 오늘부터 다시 안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안녕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에서 포토서명 이벤트 중인 대학생과 14일 모임을 알리는 공지글. (페이스북 캡처)
용인대학교의 홍모 군은 마틴 니뮐러 목사의 '나는 침묵했었습니다'를 인용해 대자보를 적었다.
그는 철도노동자 파업과 그에 따른 직위해제에 대해 "국민을 위해, 대의를 위해 시작한 파업에 정부는 불법파업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또 지금의 한국 사회를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때 용기가 필요한 사회' ,'그에 따른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회',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때 일자리와 신변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로 규정하면서 "(대한민국은) 안녕치 못합니다. 우리가 계속 무관심하고 모르는 척 한다면 우리 또한 안녕치 못할 날이 올 겁니다"라고 경고했다.
중앙대학교의 표모 군도 대자보에서 "정치적인 공간의 복원을 염원합니다"라며 학우들에게 당부의 글을 남겼다.
표 군은 "오늘날, 타인은 언제든지 발전을 위해 '희생'돼야 할 객체로 존재합니다"라면서 "학점을 위해 타인은 희생돼야 하고, 대학을 위해 학과는 희생돼야 하고, 기업을 위해 노동자는 희생돼야 하고, 국가를 위해 국민은 희생돼야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또 "지금도 33년 전 청계천에서 죽어간 한 노동자처럼, 죽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탄압받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가톨릭대학교 김모 군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인용해 대자보를 작성했다.
김 군도 마찬가지로 철도 민영화와 파업 철도노동자의 직위해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등을 지적하며 "18대 대선으로부터 1년, 무관심으로 인해 세상의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는 지성인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인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지성인의 몫이며 의무입니다"라고 대학생들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밖에 인천대, 상명대, 연세대 등에서도 온·오프라인으로 대자보가 작성됐다.
'안녕하들하십니까' 페이지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는 14일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에서 모여 서울역으로 가는 것을 계획 중이다.
공지글은 "부당함을 지적하는 모든 저항이 불법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도, 외면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라고 대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대학가의 이 작은 변화의 몸짓이 어디까지 확산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