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주부만 할 줄 알았지만, 꿈을 잃지 않고 준비를 해왔더니 기회가 생겼어요. CJ그룹의 경력단절여성 채용 프로그램 '리턴십(Returnship)'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지금 CJ푸드빌에서 커피전문점 투썸플레이스 온라인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내 여건에 맞게 하루 4시간만 일하니 육아와 가사에도 도움이 되네요. 앞으로 온라인 마케팅 분야에서 많은 경력을 쌓고 싶습니다." 이날 행사장에 마련된 홍보 책자에 적혀있는 최수진 씨의 생생한 사례다.
8년 전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둔 주부 서모 씨도 최수진 씨처럼 되기 위해 찬바람을 뚫고 시간선택제 일자리 박람회장을 찾았다.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해서 아이 학원비라도 보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고민을 하던 서씨에게 이번 행사는 희소식이었다. 무려 1만명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씨는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이곳저곳 부스를 돌았다.
새 정부의 국정 최대 목표인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방안으로 '시간 선택제 일자리'가 주목받고 있다.
정부는 오는 2017년까지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총 1만6500명을 채용하겠다고 했다. 특히 정부는 1990년대 서비스 산업 및 여성근로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시간제 일자리가 증가해 일자리 기적의 촉매제 역할을 해던 네덜란드의 사례를 들며 그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는 삼성, LG 등 10개 그룹 82개 기업들이 참여해 경력단절 여성, 은퇴 중장년층, 청년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대한 설명회· 원서접수·현장면접 등이 진행됐다. 이날 박람회에는 4만여 명이 몰려 취업난과 이에따른 구직자들의 뜨거운 취업 열기를 짐작게 했다.
■ 약사·간호사 등 특수 전문직 채용 '눈길' 이번 10개 그룹에서 채용예정인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기업별 수요에 따라 직무분석 등을 통해 적정 규모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발굴해 창출한 것으로 상당수의 전문직종을 포함해 150여 개의 다양한 직무분야에서 근로자를 채용하기로 하고 관련 상담이 진행됐다.
이날 채용박람회에 참가한 기업들의 채용예정 및 자격요건 등을 살펴보면 고객상담·판매·매장관리·텔러, 승무원 등 서비스 직종의 모집과 경력직 채용이 주를 이뤄 경력단절여성이나 중장년층에 적합한 직무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뿐만 아니라 통·번역사, 심리상담사, 보육교사, 간호사, 약사 등 특수 전문직에 대한 채용도 함께 이뤄져 눈길을 끌었다.
김양우 CJ제일제당 채용담당자는 "정부의 정책에 부응하고 그저 트렌드를 좇기 위함이 아닌, 능력을 갖춘 경력단절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이끌어냄으로써 경직된 고용시장 분위기를 전환해보기 위함"이라고 그 취지를 설명한 뒤 "이러한 여성들의 경우 신입직원보다 직업훈련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라고 경력단절 여성 고용에 대한 이점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신세계 스타벅스 코리아 부스에는 '바리스타'에 도전하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주부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국 커피전문점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상당수가 대학생 혹은 휴학생으로 연령대가 젊은 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대한 주부들의 높은 관심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와 관련해 스타벅스 코리아 인사 채용 담당자는 "30~40대 주부 바리스타들의 경우 젊은 친구들보다 체력적인 부분이 아쉽기는 하지만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애사심이 강해 젊은 친구들 보다 근속기간이 길다. 무엇보다 현재가 우리가 모집하고 있는 분야가 서비스 직종이니만큼 이런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 다양한 부대행사 마련 엄마들 북적 이날 채용박람회에는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관한 정보 및 구직자의 취업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됐다.
기업정보관에서는 시간선택제일자리 도입에 관심이 있는 대기업과 중견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기업 우수사례 발표 및 정부의 지원제도 등에 대한 설명회가 열렸으며 '취업정보관'에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면접화술, 자기소개서 작성에 관한 특강은 물론 시간선택제 일자리 취업 우수사례 발표, 멘토와의 대화 프로그랩 등이 진행됐다. 특히 오후 1시부터 약 한시간가량 진행된 윤영미 전 SBS 아나운서의 '여성 커리어 멘토링'에 관한 특강에는 많은 여성 참가자들이 몰리기도 했다.
또한, 경력단절여성 구직자를 대상으로 재취업컨설팅 프로그램이 운영됐으며 입사지원서 클리닉, 면접 컨설팅, 메이크업 및 이력서 사진 촬영 부스에서는 이들 참가자를 대상으로 무료 시연이 열려 높은 참가율을 이끌어 냈다.
행사장 한 켠에는 전문 육아교육사가 딸린 '놀이방'을 마련, 아이와 함께 행사장을 찾은 구직자들이 안심하고 박람회를 둘러볼 수 있도록한 주최측의 배려 또한 돋보였다.
■ "현장채용 진행한다더니…" 헛걸음 속출도 당초 고용노동부는 행사 전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들의 현장채용도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공고 덕분인지 이날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중장년층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이 채용에 관한 상담만 진행했을 뿐 현장면접을 통해 채용을 진행하는 기업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러한 기업들 조차도 일부는 1차적으로 상담부스에서 추천된 사람만 인터뷰를 할 기회를 주는 등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3년 전 정년 퇴임한 조성기(58) 씨도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이날 현장을 찾았지만 "솔직히 헛걸음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장채용이 이뤄진다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면접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별 소득없이 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며 허탈해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일자리를 나누면서 근로자들의 과로를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둔 유럽국가들과 비교해 우리는 신규 일자리 창출이라기보다 기존의 일자리를 나누는, 양적 확대에만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다른 비정규직으로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앞으로 기업들의 시간제 일자리 채용문화 확산과 함께 시간제 일자리가 단순 아르바이트 개념이 아닌 질 좋은 일자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