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전 삼성동 아이파크 아파트에서 발생한 헬기 충돌 사고와 관련, 당국의 발표와 LG전자 측의 설명에도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안개가 짙게 낀 상황에서 항공 당국이 비행을 허가한 것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또 사고 헬기를 몰았던 '베테랑' 기장이 안개로 인한 사고 위험을 경고했음에도 굳이 잠실을 경유하는 일정을 강행한 배경은 무엇이었느냐도 석연치 않다.
사고 직전 정해진 항로를 크게 벗어나 헬기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 것이 기체 이상 때문이었는지 조종사 과실 탓이었는지 등은 헬기에 장착된 블랙박스 분석 결과에 따라 풀어야 할 과제이다.
김재영 서울지방항공청장은 17일 오후 브리핑에서 "블랙박스를 확인해 사고 당시 비행경로와 고도, 속도, 조종실 대화 내용 등을 분석하는데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안개 속 비행 허가 적절했나헬기가 이륙하려면 서울지방항공청(서항청)으로부터 운항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항공청은 항공기 상태를 보고받고 이륙 시간과 시정(visibility) 등을 공항 관제탑에서 확인하고 나서 최종 이륙 허가를 내린다.
김포공항에 따르면 헬기가 이륙할 수 있는 시정 조건은 175m이다. 사고 헬기가 이륙할 당시의 시정은 1천200m까지 나와 운항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이륙 허가를 내렸다는 게 항공 당국의 설명이다.
김포공항 관계자는 "사고 당일 안개 때문에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결항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기상청이 관측한 사고 당일 오전 9시 서울 지역 가시거리는 1.1㎞로 김포공항 측 발표와 거의 일치한다. 기상청의 관측 기준점은 종로구 송월동 기상관측소이다.
그러나 공군이 관측한 같은 시간 사고 지점과 가장 가까운 성남기지(서울공항)의 가시거리는 800m였다.
안개 관측은 무인자동기상관측장비(AWS)가 아닌 사람에 의존하고 있고 국지적·일시적 특성 때문에 지역별로 세밀하게 관측해 예보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사고가 난 삼성동 주변의 정확한 가시거리를 관측할 수는 없다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다.
안개 관측의 정확도에 대한 문제는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새누리당 주영순 의원은 "2010년 56.9%였던 안개특보의 정확도는 2011년 36.1%, 지난해 36.7%에 이어 올 상반기에는 34.7%까지 떨어졌다"며 정확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고 직후 아파트 주민들은 옆 동이 안 보이고 10층 위에 있는 층들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는데 어떻게 비행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잠실 지역에 관한 정확한 기상 정보 없이 항공 당국이 사고 헬기에 운행 허가를 내린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사고 직전 헬기장에 나온 LG전자 직원들에게 시계가 너무 흐려 헬기가 착륙하기 위험한 상황이라고 잠실헬기장 관계자가 경고했다는 주장도 나와 애초부터 무리한 비행이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 잠실 경유 일정 선택 이유는 LG전자 소속인 사고 헬기는 사고 당일 LG 임직원 3명을 태우고 전주에 있는 칠러(Chiller) 공장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사고 헬기의 기장인 박인규(58)씨는 당일 오전 안개가 심하게 끼자 잠실 선착장에서 임직원을 태우는 일정을 변경해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게 안전할 것 같다고 회사에 보고했다.
박씨의 아들은 지난 16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아버지가 '안개가 많이 끼어 위험하니 김포에서 직접 출발하는 게 어떠냐고 회사와 전화로 상의한 것을 들었다"면서 "그래도 회사에서는 계속 잠실로 와서 사람을 태우고 내려가라고 한 것 같다"고 전했다.
LG 전자 측도 이를 인정했다. LG전자는 그런 보고가 있어서 임직원을 김포공항으로 이동하려고 준비했다고 밝혔다.
LG 전자 측은 하지만 박씨가 출발 한 시간 전 시정이 좋아져 잠실을 경유할 수 있다고 알려와 예정대로 잠실에서 헬기를 타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임원들의 편의를 위해 기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항 지시를 내린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대통령전용기 운항 경력 15년에 비행시간 약 7천 시간에 달하는 베테랑 기장의 '판단'을 무시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 비행 항로 크게 이탈한 경위 '관건'
서울지방항공청은 사고 헬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해 시계비행으로 한강변을 따라 운항하다 잠실헬기장에 내리기 직전에 마지막 단계에서 경로를 이탈한 것으로 추정했다.
정확한 경로는 블랙박스를 분석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통상의 비행경로를 벗어나 발생한 사고라는 게 항공당국의 설명이다.
항공 당국에 따르면 인구 밀집지역으로는 가능한 한 비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인구 밀집지역 상공에서는 장애물에서 1천피트, 즉 300m가량 떨어져 비행하게 돼 있다.
'베테랑' 조종사들이 이 같은 기본 원칙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왜 항로를 벗어나 아파트에 충돌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에 대해 항공 당국은 사고 헬기가 목적지인 잠실헬기장에 가까이 와서 착륙하려고 고도를 좀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변영환 건국대 항공우주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착륙 지점이 가까워지자 준비하려고 방향을 조정하면서 너무 빨리 고도를 낮추거나 방향을 틀다가 항로에서 벗어났을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정성남 건국대 항공우주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유리로 된 아파트 외벽에 한강이 비쳐 물 위를 나는 듯 착각할 수 있다"며 "안개 등 기상 상황에 따른 시정 불량과 건물 특성에 따른 착시 현상이 사고 원인일 개연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착륙장이 보이지 않아 착륙을 포기하고 선회하려 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나왔다.
아시아나항공 기장 출신 정윤식 중원대 교수는 "안개로 착륙장이 안 보여 잠실에 착륙하지 못할 것 같다고 판단해 김포공항으로 돌아가려한 것 같다"며 "영동대교 근처까지 와서 청와대 금지구역 때문에 북쪽으로는 선회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남쪽으로 틀어 남쪽 항로인 대치교, 양재나들목 쪽으로 가는 길에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다. 헬기가 아파트 북서면에 부딪쳤는데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