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에 안맞은 운동화를 신은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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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편지]

 

출발선에 서서 앞을 내다보니 긴장이 되었다. 구겨 신은 신발이 자꾸 신경 쓰였다. 헐거워지지 않도록 운동화에 발을 더 밀어 넣고 힘을 꽉 주었다. 드디어 선생님 손이 땅을 향해 선을 그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마음만은 벌써 저 앞으로 훌쩍 가 있었다. 운동화가 이내 헐렁거렸지만 속도를 내 보려 힘을 냈다. 하지만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발은 운동장 모래 위에서 헛돌았고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순간 바보가 된 것 같았다. 100미터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운동화를 구겨 신은 나 자신이 불쌍해졌다. 함께 뛰는 짝이 없어서 서글프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면서 급기야 내가 아빠 없는 아이라는 생각에 서러워졌다.

'아빠가 있었으면 안 맞는 운동화를 신고 뛰는 일은 없었겠지?' 그때였다. 몸이 기우뚱 앞쪽으로 쏠리면서 중심이 흔들리더니 그만 꼬꾸라지듯 넘어지고 말았다. 결승선에서 쉬고 있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달려 나왔다.

"괜찮니? 지우야, 괜찮아?"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땅으로 꺼지려고 운동장에 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눈보다 입에서 먼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꺼이꺼이 소리가 나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잠시 뒤에야 나는 친구들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릎하고 손바닥이 땅에 쓸려 피가 빨갛게 배어 나왔다. 머리카락까지 흙투성이가 됐고, 입에서는 모래가 씹혔다.
"많이 아프니?"
선생님이 거듭해서 물었다. 그리 많이 아프진 않았고, 피가 배어났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어쩌면 나는 당당하게 울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 「잃어버린 일기장」 중에서

여덟 살 때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던 어느 날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얇은 신발을 신고 있었던지 두 발이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산 아래 자리한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빨리 걷기 힘들 정도로 발이 시렸다. 거리는 서리가 내린 듯 온통 회백색이었다.

간신히 한 발 한 발 내디뎌 집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빈 방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따뜻한 집에 도착했지만 오는 동안 추위를 참아야 했던 게 어린 나이에 힘들고 서러웠었나 보다.

그때 왜 나는 집에 오는 동안 겪은 추위를 가족들과 나누지 못했던 걸까? 말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혹은 공유하기에는 지극히 불편한 나만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우린 살아가는 동안 아파서 우는 것보다 아픔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고 느껴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당당하게 울 수 있다면 그리고 힘들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말할 수 있다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은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 듯하다.

발이 시리다고 해서 혹은 불편하고 안 맞는다고 해서 뛰어가다 말고 운동화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또 다른 무언가 벗어던질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와 당신을 힘들게 한다면 그땐 혼자서만 참지 말고 곁에 있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를…….

전성현 올림

<전성현>
동화작가. 1972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그래 그건 너였어」로 당선했다. 『잃어버린 일기장』으로 제15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고학년 창작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원문은 책읽는 사회 문화재단 문학나눔의 행복한 문학편지 (http://letter.for-munhak.or.kr)에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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