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자료사진)
수천억대 횡령과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다시 한 번 재판을 받게 됐다.
대법원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그룹 위장 계열사의 빚을 계열사에 대신 갚도록 해 회사에 3500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로 김승연 회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 중 일부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 회장은 실형 확정을 일단 피했지만 대법원 판결이 김 회장 측에 유리하다고만은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法 “경영상 판단 아냐”…주요 쟁점 관해 검찰 손 들어줘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 대해 "경영상 판단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고 밝혔다.
김 회장 측은 그동안 재판에서 부실계열사에 대한 지원행위는 경영상 판단이기 때문에 면책돼야하고, 계열사들의 실질적인 손해가 미미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는 재판 내내 가장 큰 쟁점이었다.
그러나 원심은 부실한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다른 계열사에 손해를 끼친 행위는 배임이라고 판단했고, 대법원 역시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지 않았고, 위험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마련되지 않음은 물론 향후 손해가 해소되는 과정 등이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검찰관계자는 이에대해 "이번 사건의 핵심쟁점은 '부실화된 오너의 차명소유 회사를 지원하는 것이 경영판단이냐'였다"며 "대법원이 이는 명백한 배임행위이고 경영판단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됐는데 이는 검찰 측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고 김 회장 측의 주장이 완전히 배척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대법원의 이날 판결이 파기환송심에서 선고될 형량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수땅 재평가로 배임액 줄면 새로운 배임죄 인정 가능성 커져대법원은 크게 세 부분을 다시 심리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부실계열사인 한유통의 채무에 대해 한화 계열사가 지급보증을 한 것과 관련해 이미 지급 보증된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해당 계열사가 다시 지급보증을 제공했다면 이 같은 행위가 별도의 배임 행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기존 지급보증의 만기가 도래해 다시 지급보증을 서면서 금융기관이 바뀌긴 했지만 추가로 손해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재지급보증 과정에서 채권자가 달라진 만큼 해당 계열사가 새로운 손해를 발생시킬 위험을 초래했다며 이를 유죄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김 회장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은 또 계열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부실계열사에 저가로 매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계열사의 손해도 다시 계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제가 된 부동산의 적정 가격을 따진 감정평가가 잘못됐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김 회장이 계열사인 한화석유화학 소유의 시가 713억 원짜리 여수시 소호동 부동산을 부실계열사인 웰롭에 공시지가 수준으로 팔도록 지시해 272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문제의 부동산에 대한 감정평가가 실제보다 높게 산정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감정평가가 신설 회사인 아크런의 자산 재평가를 위해 이뤄졌기 때문에 시가보다 높게 계산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대법원은 부동산 감정평가가 관계 법령에서 요구하는 요인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거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 위법한데도 이를 그대로 유죄의 증거로 삼은 원심의 판결은 잘못됐고 이에 대한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는 김 회장 측에 유리하다.
그러나 대법원은 부동산이 저가 매각된 뒤 계열사를 인수·합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횡령이나 배임죄가 성립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새롭게 심리해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심이 무죄로 본 부분의 유무죄를 다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유죄 인정 부분이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저가에 매각된 여수 땅의 소유주는 계열사인 웰롭에서 분할된 아크런을 거쳐 이 회사를 인수한 드림파마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드림파마는 여수 땅의 시가가 713억원이라는 전제로 아크런에 선수금 578억원을 지급했다.
원심은 여수 땅이 웰롭으로 넘겨지는 과정 자체를 저가매각으로 판단했다. 이 경우 이미 손해액이 계산됐기 때문에 이후 인수·합병 과정에서 새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감정평가가 부풀려졌고 이에 따라 저가매각으로 인한 배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할때 이후 인수 합병 과정에서 부동산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실제 가치보다 많은 돈이 오간 셈이어서 새로운 횡령이나 배임이 성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관계자는 "여수 땅의 재평가액이 낮아지면 저가매도로 인한 배임액은 낮아질 수 있겠지만 선수금 지급과정에서 새롭게 횡령이나 배임 혐의가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김 회장 측에 유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김 회장 측은 “한화그룹 계열사가 부실계열사에 저가에 매도한 울주·화성 부동산에 대해서 항소심은 감정평가액을 원래 감정 액수보다 낮췄지만 뒷부분(선수금 지급과정)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며 “여수 땅 역시 전체 배임액을 더 낮추는데 기여하고, 무죄로 파단한 부분(선수금 지급과정) 역시 계속 무죄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 배임·횡령액 1500억대로 낮아질 가능성…300억↑이면 같은 형,
파기환송심에서는 대법원의 취지에 따라 배임액을 다시 산정하고 일부 유무죄 판단이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이 지적한 일부 재지급보증 혐의가 무죄로 판단될 경우 전체 배임·횡령액에서 300억여원이 빠지게 된다. 저가매각 혐의에 대해서도 추가로 무죄가 선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이후 인수·합병 과정의 횡령·배임 혐의가 무죄에서 유죄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당초 검찰은 김 회장 등에 대해 계열사 자금 3500억여원을 배임한 혐의로 기소했고, 1심은 3000억여원, 2심은 1800억여원의 배임을 인정했다.
파기환송심에서 재지급보증 300억여원을 무죄로 판단한다고 해도 1500억여원 아래로 배임액이 내려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법원 양형기준은 배임·횡령액이 300억원 이상이면 같은 기준으로 형량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김 회장에 대한 형량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변수는 있다. 김 회장에게 상고기각이었다면 3년형의 실형이 확정됐겠지만, 유불리를 떠나 사건이 파기환송됐기 때문에 한 번 더 심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김 회장 측도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날 판결에 대해 한화 측 변호를 맡은 강석훈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우리는 이번 판결 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변호인으로서 아전인수격 해석일수도 있겠지만 이번 대법 판결을 양형 심사를 새로 해보라는 취지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사건 수임하고 보니 원심에서 놓친 주장들이 있어서 상고심에서 그 부분들을 주장했는데 적법한 상고이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법에서 그 부분들을 판단하지 않았다”며 “파기환송심에서 이런 부분들을 다시 다퉈볼 수 있고 환송심에서 ‘지금보다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형법상 집행유예는 징역 또는 금고형이 3년 이상일 때 가능한데 김 회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상태다. 법원에 피해액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186억원을 공탁했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점도 재판부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변수다.
다만 김 회장은 전과가 있고, 최근 재벌 총수들에게 국가경제에 기여한 점 등을 근거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내리던 법원의 관행이 깨지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1800억 상당의 기업어음(CP)을 사기 발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계열사 자금 400억여원을 빼돌린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역시 1400억여원의 횡령·배임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