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인혁당 보상금으로 고리대금업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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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물고문·전기고문 모자라 이자고문까지 자행"

-인혁당 피해자들, 이자문제로 다시 고통 받고 있어

■ 방 송 : FM 98. 1 (18:00~20:00)
■ 방송일 : 2013년 9월 24일 (화) 오후 7시 3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전창일 (인혁당 피해자)


오열하는 인혁당 피해자 유가족

 

◇ 정관용> 오늘 3부에는 구순의 어르신 한 분을 초대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서 여덟 명이 무고하게 사형당하고 수많은 분들이 옥살이를 했던 이른바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이신데요. 30여 년 만에 법원이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해서 무죄 확정됐고요. 그리고 피해보상소송을 해서 보상금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보상금 산정을 또 달리하는 바람에 한 번 받았던 보상금 다시 돌려줘야할 이런 처지에 놓였네요. 국정원이 바로 이분들한테 다시 돌려달라 소송까지 제기했다고 합니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이어서 이자고문까지 당하게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사연, 이야기를 들어보죠.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여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신 분입니다. 현재는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으로 계신데요. 전창일 선생님을 오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 전창일> 네.

◇ 정관용> 연세가 구순?

◆ 전창일> 네, 구순이 넘었죠.

◇ 정관용> 구십 몇이세요.

◆ 전창일> 21년생이니까요.

◇ 정관용> 21년생. 그러면 93, 이렇게 되시네요. 우리나이로, 세는 나이로.

◆ 전창일> 둘이죠. 그렇게 되죠.

◇ 정관용> 네. 정정하시네요?

◆ 전창일> 네. (웃음)

◇ 정관용> 인혁당 사건 그 당시에 우리 선생님은 직업이 뭐셨어요?

◆ 전창일> 제가 그때 미국 회사 콜린스라디오 회사, 우리나라의 마이크로웨이브 기술 전수한 회사죠. 그 회사에 소위 한인 책임자로, 한인 종업원의 책임자로 있다가 그 일이 끝나면서 극동건설의.

◇ 정관용> 극동건설?

◆ 전창일> 네. 들어와서 외국공사 부장 직위에 있었습니다.

◇ 정관용> 외국공사를 담당하는 부장?

◆ 전창일> 네. 그래서 극동건설의 외국공사를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오일머니 그걸 수주하려고 여권신청을 수속하다가 갑자기.

◇ 정관용> 잡혀가셨어요?

◆ 전창일> 잡혀갔습니다. 그게 인혁당 사건이에요.

◇ 정관용> 그런데 다른 분하고,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신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 전창일> 네.

◇ 정관용> 그런 분들하고 우리 전 선생님하고 예전부터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겁니까?

◆ 전창일> 관계가 있었죠.

◇ 정관용> 어떤 관계였었습니까?

◆ 전창일> 4월 혁명 이후에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그냥 탄압을 받아왔던 통일운동세력들이 우후죽순으로 모두 양성화됐잖아요.

◇ 정관용> 맞아요.

◆ 전창일> 그게 말하자면 형성된 것을 총칭해서 혁신기라고 그랬죠. 그때.

◇ 정관용> 그렇죠.

◆ 전창일> 그래서 혁신기에는 집약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독재 청산하고 민주주의 실현하고.

◇ 정관용> 통일을 지향하자?

◆ 전창일> 평화통일을 지향하자.

◇ 정관용> 그렇죠.

◆ 전창일> 하는 걸로 되는데. 그런 운동과정에 제가 직접적인 관계라기보다 간접적인 관계를.

◇ 정관용> 직장생활하시면서?

◆ 전창일> 네.

◇ 정관용>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예를 들면 대학동창 이런 분들하고 이렇게.

◆ 전창일> 네. 그래서 인연을 맺었는데. 그러다가 5.16군사쿠데타 나면서 그 사람들 다 갇혔죠.

◇ 정관용> 그렇죠.

◆ 그런데 나는 다행이 옥살이는 하지 않고.

◇ 정관용> 주역이 아니셨으니까.

◆ 전창일> 네. 그분들의 옥바라지하고 그랬죠. 그런 도의적인 면에서. 그런 유대를 가졌는데 그다음에 그분들이 나와서도 우리끼리 친교관계가 유지됐죠. 그러니까 무슨 어떤 정치적인 조직이라기보다, 그건 가질 수도 없었고.

◇ 정관용>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가시려고 여권 만들다가 갑자기 잡혀가셨잖아요?

◆ 전창일> 네.

◇ 정관용> 딱 잡아가서 처음에는 뭐라고 하던가요? 왜 잡아왔다고 하던가요?

◆ 전창일> 그냥 밤에 내가 회사에서 퇴근해서 저녁 먹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대여섯 명이 들이닥쳐서 저 잡으려고 왔어요. 그래서 서재에 들어가서 뭐, 책. 사자 들어간 책을 전부 찾아서.

◇ 정관용> 증거 수집한다고 압수하고?

◆ 전창일> 네. 한 예를 들게 되면 우리나라의 루소가 저자한 민약론 있잖아요.

◇ 정관용> 루소?

◆ 전창일> 네. 그 하나는 출판사가 달라서 사회계약론이라고 나오고.

◇ 정관용> 사회계약론.

◆ 전창일> 하나는 민약론이라고 하는데. 사회계약론이 사회주의 체계.

◇ 정관용> 사회주의다?

◆ 전창일> 뽑는 거예요. 그런 사회 자 들어간 책을 서재 뒤져서.

◇ 정관용> 그렇게 해서?

◆ 전창일> 그래서 잡혀갔는데.

◇ 정관용>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더니. 처음에는 뭐라고 왜 잡아왔다고 하던가요?

◆ 전창일> 그러니까 나는 집에서 반주로 술 한 잔하고 얼큰해 있는데. 잠이 와서 이렇게 앉아서 자고 있는데, 책상에 엎드려서 잠들었어요. 이 사람이, 나를 데리고 간 사람. 한 사람이 와서 어깨 툭 치며 여기 어딘데 잠들고 있어? 나오라고. 그래서 또 나갔는데 차에 태워서 가는데 서대문형무소에 그대로 밤에.

◇ 정관용> 밤에요?

◆ 전창일> 딱 갇혔어요. 나는 무슨 영문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 이튿날에 교도관이 와서 당신 왜 들어왔냐 그래요, 나보고. 그래서 나도 모른다고.

◇ 정관용> 나도 모른다?

◆ 전창일> 왜 들어왔는지 모른다고. 진짜로 몰랐던 거니까. 그러니까 그 교도관이 나한테 하는 얘기, 두 사람이 왔더군요. 교도관이 한 사람은 적고. 그래서 모른다고 하니까 당신 여기 맛을 봐야 바르게 대겠냐고 교도관이 그래요.

◇ 정관용> 교도관이?

◆ 전창일> 네. 깜짝 놀라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하고 왜 왔는지 알면 내가 아는 대로 얘기하는데 이야기를 하는데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는 것 아니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항변했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어디를 통해왔는가 하고. 어딘지도 난 잘 모르는데 나 붙잡아간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그때서야 아, 그러세요. 그러니까 알더라고요. 왜 왔는지도 모를 수 있는 건, 중앙정보부에 잡혀온 사람들은 왜 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처럼 있는가 봐요. 그때서야 알았다고.

◇ 정관용> 그래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중앙정보부에 또 왔다 갔다 하면서 조사를 받으셨어요?

◆ 전창일> 한 닷새 동안 그냥.

◇ 정관용> 놔둬요?

◆ 전창일> 놔두더니 닷새 만에 내가 나갔어. 5월 1일날인데, 5월 6일인가 5월 7일인가 처음 끌려 나갔어요.

◇ 정관용> 중앙정보부로?

◆ 전창일> 네, 중앙정보부로. 그때부터 이제 쭉 내가 태어나서부터 살아온 걸 적으라고 그래요. 그래서 다 적었죠, 적으라니까. 그래놓고 거기에 무슨 캘 것 없잖아요. 그다음부터는 전부 모두 나보다 먼저 모두 잡혀가서 누가 누가 잡혀왔는지도.

◇ 정관용> 모르시겠죠.

◆ 전창일> 구체적으로. 대충은 알았죠. 라디오 방송도 나오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내가 지하당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서 학생 충동해서 제2의 4.19를 일으키려고 책동했다하는 식으로 자백서를 써라 그래요. 그래서 당치 않은 얘기를 어떻게 써요.

◇ 정관용> 그랬더니 막 고문도 했나요?

◆ 전창일> 아이고. 말 마세요. 그때 하려면 지금 괴로워요.

◇ 정관용> 그게 모두 며칠이나 그렇게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하셨어요?

◆ 전창일> 거기는 기한이 없으니까요. 구속기한이라는 게 없어요.

◇ 정관용> 대략 어느 정도 기간이나 그렇게 고문당하고 그러셨어요?

◆ 전창일> 저는 제일 늦게 끌려갔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제가 가기 전에 한 20일 전에 모두 잡혀 와서 고문당했는데. 그러다가 이제 한 친구, 아는 친구 만났더니 도대체 이거 어떻게 된 건가 하니까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른다는 거예요. 정신을 잃어서 고문당해서 정신을. 실신 상태에서 그놈들이, 수사관들이.

◇ 정관용> 부르는 대로 썼다?

◆ 전창일> 부르는 대로 썼고 유신헌법 반대하는 너의 주위사람들을 더 대라, 더 대라하니까.

◇ 정관용> 전 선생님 이름이 나왔다?

◆ 전창일> 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부른 거예요.

◇ 정관용> 그렇죠.

◆ 전창일> 전창일이 유신헌법 반대하는 사람이니까. 못 견디니까. 한 사람을 더 불러, 더 불러하니까.

◇ 정관용> 알겠습니다.

◆ 전창일> 그래서 내가 끌려간 거예요.

◇ 정관용> 그리고 모진 고초를 당하셨고.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으셨고. 8년을 수감하셨네요.

◆ 전창일> 8년 8개월.

◇ 정관용> 8년 8개월.

◆ 전창일> 그런데 그때에 수사 책임자가 나, 서대문 형무소에 와서 소장실에 나를 불러냈어요. 그러니까 만났더니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제거대상인데 회사 회장님께서 와서 사우디아라비아 출장 갔다, 나가서 서면 이 사람이 수천 만 불을.

◇ 정관용> 가져왔을 사람이다.

◆ 전창일> 가져올 사람이다 이렇게 해 놨다 호소해서 할 수 없이 무기로 떨군다고 그래요. 그래서 아니, 중앙정보부가 판결까지 하는 거야? 내가 그랬더니. 긴급조치 4호는.

◇ 정관용> 그때는 판결까지 했죠, 사실.

◆ 전창일> 자기들이 판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판결에 대한 의견서를 재판부에 낼 수 있다고 그래요. 그게 긴급조치 4호에 법적으로 규정돼 있다 그거예요.

◇ 정관용> 그래서 바로 그대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셨고. 그리고 8년 8개월을 복역하셨고.

◆ 전창일> 네. 안 그랬으면 지금 사형돼서 지금 이렇게 앉아서 대화할 수도 없죠.

◇ 정관용> 그때 8명이나 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돼서.

◆ 전창일> 그랬죠.

◇ 정관용> 세계 사법 암흑의 날로 국제 엠네스티가 정한 바로 그날 아니겠습니까.

◆ 전창일> 엠네스티하고 국제법학자협회에서 그렇게.

◇ 정관용> 그래서 82년에 풀려나셨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아오셨어요? 뭐, 변변한 직업 가지기도 어려우셨겠고, 그렇죠?

◆ 전창일> 그러니까 제 아내가 제가 들어가 있는 사이에, 그 사람이 의상디자이너예요. 그래서 꽤 디자인계에서도 알아줬기 때문에 그때는 양장점,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손님들이 왔다가 나가게 되면 경찰이 밖에서 지키면서 여자들한테 시민증 보자하고 남편 이름이 뭐냐? 직장이 어디냐 그런 것도 수첩에 적으니까 손님들 겁이 나서.

◇ 정관용> 뚝뚝 떨어지겠네요.

◆ 전창일> 다 떨어져서. 그래서 명동에 와서 또 개업을 했는데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고.

◇ 정관용> 똑같이.

◆ 전창일> 그래서 이 사람이 화가 나서 외신, 그때는 국내기자들한테 호소했대. 기사 못 올렸어요.

◇ 정관용> 보도를 못하니까. 외신에 호소를 하셨군요.

◆ 전창일> 외신에 호소해서 외신기자들이 그걸 보도하고. 그 문제가 그러니까 외국신문에 모두 나고 그랬어. 그래서 그게 비하돼서 UN인권위원회까지 문제가 상정되고 이렇게 됐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박정희 대통령께서 지나친 탄압이다. 나라 체면을 위해서도 그러지 말라고 해서 그다음부터는.

◇ 정관용> 양장점은 좀 됐습니까?

◆ 전창일> 양장점이 손님이 일단 다 겁이 나서 떨어지니까. 그다음부터는 단체복. 예를 들어서 화장품회사 가운 같은 것 이런 걸 맡아서.

◇ 정관용> 그나마?

◆ 전창일> 그나마 했어요.

◇ 정관용> 결국은 부인께서 생계를 다 책임지셨고. 그렇게 살아오셨군요?

◆ 전창일> 크게 돈 버는 건 아니고 그랬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고문조작 진실 규명했고. 그리고 2007년 법원이 사형수 8명에 대해서 무죄를 확정했고. 우리 전창일 선생님도 역시 재심청구해서.

◆ 전창일> 무죄.

◇ 정관용> 무죄 확정이 되신 거지 않습니까?

◆ 전창일> 네, 그렇죠.

◇ 정관용> 그 무죄 확정을 근거로 해서 손해배송 청구소송을 하셔서 1심, 2심, 3심 다 승소를 하셨어요.

◆ 전창일> 네.

◇ 정관용> 그런데 1심, 2심에서 손해배상 액수 이만큼 줘라라고 한 거랑 대법원이 판단한 거랑 지금 달라서 문제란 말입니다.

◆ 전창일> 네.

◇ 정관용> 그래서 우리 전 선생님께서는 정확하게 얼마 정도의 보상금을 받으셨어요?

◆ 전창일> 제 처하고 딸이 셋인데. 걔들 앞으로 그러니까 다섯 식구 앞으로, 한 30억 금액을 다섯 사람 앞으로. 그런데 거기에서 저희들이 이것은 우리가 그냥 받아서 다 우리가 사용하거나 쓸 것이 아니고 나라의 민주주의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기여하는 그런 하나의 법인체를 만들자 해서 모두 몇 억 씩 떼어 내 놨어요.

◇ 정관용> 기부를 하셔서?

◆ 전창일> 네. 그래서 만든 것이 지금 4.9재단이거든요.

◇ 정관용> 4.9재단?

◆ 전창일> 4.9평화통일재단.

◇ 정관용> 그 4.9가 바로.

◆ 전창일> 4월 9일날, 사형집행한 날.

◇ 정관용> 8분이 사형집행 당해 돌아가신 바로 그날?

◆ 전창일> 네.

◇ 정관용> 그래서 재단설립을 이미 다 마무리하셨군요?

◆ 전창일> 네. 그래서 지금 현재 이사장은 문정현 신부님이고. 그다음에 상임이사는 김형태 변호사 이렇게.

◇ 정관용> 그런데 이게 1심, 2심에서 판결된 액수보다 사실 대법원 가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판결이 나면 소송을 제기한 분들이 그 돈을 미리 달라 요청할 수 있고. 대신에 정부는 이거 전부 다는 지급 못한다. 일부만 지급해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지금 정부가 1심, 2심 판결 보고 나서 상당 부분 지급해라 그래서 지급받으신 거잖아요.

◆ 전창일> 그렇죠. 3분의 2.

◇ 정관용> 3분의 2까지 지급해라, 그래서 받으신 액수가 30억 조금 넘게 되는데. 그중에 또 기부금도 많이 내셨고. 그런데 대법원에서 이거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

◆ 전창일> 잘못된 게 아니라 이자가 참, 이자라는 말조차 우스운데. 과거의 판례가 우리나라의 판례가 보상금에 대한 이자 계산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이자 계산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74년에.

◇ 정관용> 그렇죠. 잡혀가셨으니까.

◆ 전창일> 잡혀갔으니까 그때부터 국가범죄가 시작된 거죠.

◇ 정관용> 시작된 거죠.

◆ 전창일>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자가. 이것이 과거의 대법원 판례랍니다. 그러니까 변호사도 이것은 대법원에 가서도.

◇ 정관용> 확정된다?

◆ 전창일> 검찰에 상고가 기각될 거는 불문가지다.

◇ 정관용> 그렇죠.

◆ 전창일>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는데.

◇ 정관용> 또 검찰도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3분의 2 미리 지급하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 전창일> 그렇죠. 그런데 뒤집은 거죠. 뒤집는 데는 대법관 전원회의에서 결정할 수 있답니다, 판례를 뒤집는 거는. 그런데 네 사람이서 그것을 뒤집고 이자를 그때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재심판결.

◇ 정관용> 확정된 후로부터.

◆ 전창일> 후로 이자 계산을 한 거죠. 그래서 이자가 다 없어진 거죠.

◇ 정관용> 그래서 차액이 엄청나게 났어요.

◆ 전창일> 그렇죠.

◇ 정관용> 그래서 지금 얼마를 돌려달라는 겁니까? 지금.

◆ 전창일>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받은 금액의 62%.

◇ 정관용> 62%를 돌려달라?

◆ 전창일> 돌려달라는 거예요. 돌려주고 거기에다가 오히려 반대로 정부는 대법원 판결날부터는 5% 이자 붙인다고 그래요.

◇ 정관용> 돈 안 되니까 이자 붙여라. 알겠습니다.

◆ 전창일> 대법원 판결날. 그리고 국정원에서 우리한테 소장 부본을 송달한 거 접수한 날부터는 20%.

◇ 정관용> 이자가 그렇게 또 높아져요?

◆ 전창일> 20% 이자를 내래요. 고리대금이죠. 그러니까 5% 플러스 20%의 이자가 우리가 반납을 할 때까지.

◇ 정관용> 계속 붙는다.

◆ 전창일> 계속 붙는다 그거예요. 그러면 우리 받은 돈을 거의 다 내놓으라는 얘기예요.

◇ 정관용> 정리하면 대법원에서 어쨌든 기존 판례를 뒤집어서 받으셨던 돈의 62%를 돌려줄 수밖에 없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고. 돈을 낼 수가 없다는 형편이 되니까 국정원이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 제기한 때로부터는 이자도 더 가산이 되고.

◆ 전창일> 네. 20%를. 그런 참, 이거 어떤 국가 이성이 지금 마비됐거나 실종됐어요. 내가 볼 때는. 하물며 개인들도 길가는 사람 붙잡고 얘기해도 그럴 수가 있는가, 다들 저희들이 동정합니다. 그런데 이게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이거 이자고문이에요. 그래서 이제 내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 지금 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게 되면 제 친구, 같은 저하고 무기수입니다. 무기징역을 받은. 이성재 동지 집안의 얘기를 한다면 그 가정이 전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예요. 부인은 목사예요. 그런데 대법원에서 그런 판결이 나서 검찰에서 받은 돈을 도로 내놔라라는 통지를 받고. 이 목사님이 고민하다가 어떻게 돼서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쓰러져서 병원에 1년 가까이 있는데 이번에 또 국정원에 소송하니까 본인 이성재 씨가 또 뇌졸증으로 똑같은 증상으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지금 경희대병원에 있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 전창일> 그건 내가 대표적으로 지금 예시하는 건데 각 집안이 전부 이런 상태예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인생 송두리 채 빼앗긴 분들에게 그 돈이 참, 뭐라고. 게다가 그 돈을 다 받아서 일부는 이렇게 다 기부도 하시고 그동안 빚진 거 갚으신 분도 많고 되돌려줄 처지도 못되는 분들한테 대법원은, 국정원은 왜 꼭 이렇게 해야 했는지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이네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전창일> 고맙습니다.

◇ 정관용>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으로 계신 전창일 선생님의 사연 들어봤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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