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하루에도 몇 번씩, 옆집에서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또 불쾌감이 치밀어오른다. 분노를 겨우 잠재우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이럴 때마다 일일이 항의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도 참는다.
하지만 인내도 잠시, 오늘은 빨래를 하는 날인지 옆집 그가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드르륵 드르륵'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귀마개도 무용지물. 욕설을 퍼붓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난다. '언제 이 집을 뜰 수 있을까'
직장인 서유미(30) 씨는 아직도 2년 전 그 집을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한참 수험준비에 매진하던 학생 시절, 서 씨는 서울 관악구의 한 원룸을 계약했다.
"공부해야 하니 조용한 집이어야 한다"는 서 씨의 요구 조건에 부동산 사장은 "새로 지은 집이니 소음만큼은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그렇게 살게 된 집에서 서 씨는 '지옥'을 봤다. 옆집인지 앞집인지 모를 곳에 사는 이웃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침을 했다.
막 잠에 들라 치면 집 앞을 다니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건 물론, 바로 옆집의 화장실 소리나 음악을 듣는 소리까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고시촌이다 보니 윗집에서 아이들이 쿵쿵 뛰거나 가구를 끄는 '층간 소음'은 없었다. 하지만 생활 소음은 그 유명한 층간 소음뿐이 아니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조차 모를 '벽간 소음'은 서 씨에게 끝모를 답답함만 안겨줬다.
"언제 계약이 끝날까만 생각하면서 살았고, 정말 빨리 이사 가고 싶었어요. 옆집 사람은 정작 내가 이렇게 고통 받는 줄은 생각도 안하고 살 텐데. 몇 번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거든요"
◈ 층간소음은 윗층일텐데…벽간 소음은 대체 어디?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박승원(49) 씨도 벽간 소음의 고통을 실감하긴 마찬가지다.
박 씨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10년 된 복도식 아파트. 오래된 아파트라서 그런 걸까, 바로 옆집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소음이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몇 집을 거쳐 오는지 모를 아이들 우는 소리, 떠드는 소리는 파김치가 될 때까지 일하고 들어온 집에서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파트인데도 이럴 정도면 방음 공사를 얼마나 날림으로 한다는 건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설사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 방음 시설이 미흡하다 한들, 공동주택에 산다면 최소한 이웃들을 배려해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박 씨의 생각이다.
촘촘하게 가구들이 들어선 대학가 사정은 한층 더 열악하다. 서울 신촌의 대학가 고시텔에 살았던 허모(26) 씨는 계약한지 2주 만에 방을 빼버렸다.
"다들 아예 집에서는 말도 안하고, 전화 통화도 포기하고 살아요. 서로 아는 거죠. 내 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들릴 것이라는 걸"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 방 주인과 ‘동거’하는 느낌으로 산 지 2주. 허 씨는 결국 계약기간을 채우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방을 뺐다.
학생인 데다 단기간 살 계획이었으니 어느 정도 소음은 참고 견뎌야겠다 생각했지만 "벽간 소음은 상상 이상으로 스트레스였다"는 게 허 씨의 말이다.
(자료사진)
◈ 법만 손질하면 될까? '역지사지' 없으면 규제도 무용지물
'내가 예민한 건가?'
공동주택에서의 벽간 소음을 경험한 이들 모두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다. 남들 다 참고 사는데 나만 괴로워하나 싶어 속으로만 끙끙 대느라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하기 일쑤다. 관리인이나 집주인에게 얘기해봤자 "조심할게요" 한 마디 뿐인 윗집, 옆집이 달라질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신경질적'으로 변한 자신만 발견하게 된다는 게 경험자들의 얘기다. 옆집 사람을 두고 험한 욕을 하는 건 일상다반사. 온라인 쇼핑몰에서 흡음제나 '윗집 공격용' 우퍼 스피커를 미친 듯 검색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
층간 소음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국회는 지난달 2일 소음·진동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환경부는 소음의 인내한도 기준을 10~15db까지 낮췄다.
하지만 직접 소음을 겪어본 이들은 "과연 이게 법으로 해결되겠느냐"고 입을 모은다. 이성과 지능적 규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뭘 하든 남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하는 몰이해의 문제에 차라리 가깝다는 것이다.
가령 다다미방 구조인 일본의 주택은 작은 움직임에도 큰 소리를 낸다. 그런데도 일본의 다다미 역사가 지속될 수 있던 건 결국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 덕분이라는 얘기다.
성동구 한 아파트에서 벽간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박승원 씨는 "옆집 배려가 생활화되도록 밤 10시 이후에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규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