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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학살한 일본군 병사 `진중일기'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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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1894∼1895) 당시 농민군 학살에 참가한 일본군 병사의 진중(陳中)일지가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노력으로 발굴돼 일본에서 공개됐다.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84) 나라여자대 명예교수와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68) 홋카이도대 명예교수, 박맹수(58) 원광대 교수가 지난달말 일본에서 출간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고분켄 刊)에는 일본군 후비(後備·후방 예비부대라는 의미)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한 일본인 병사의 진중일지가 실렸다.

지금까지 일본군 공식보고서와 부대 차원의 진중일지 등이 공개됐지만 병사 개인의 경험을 담은 일기가 발굴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 일지는 이노우에 명예교수가 지난해 이 병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했다.

도쿠시마(德島)현 출신인 이 병사는 '동학당 토벌' 대대인 후비 19대대에 소집돼 조선으로 건너갔고, 1895년 1월 전남 나주와 해남 등지에서 농민군 섬멸 작전에 참가했다.

이 병사는 일지에서 당시의 경험을 '우리 부대는 남서쪽으로 적(농민군)을 추적해 48명을 때려죽였고, 부상자 10명을 체포했다.

생포한 이들은 숙소로 돌아간 뒤 고문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거나 '오늘(1월31일) 동학 무리 잔당 7명을 붙잡아 (해남의) 성 밖에 있는 밭에 일렬로 세워 놓고 모리타 일등 군조(一等軍曹·일등상사)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한인(韓人) 등은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라고 묘사했다.

또 '(나주성의) 남문 밖에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있었다…붙잡힌 자는 심문한 뒤 중죄인은 죽였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고 묘사해 일본군의 공식 보고에 포함된 나주 처형자 수(230명)보다 훨씬 많은 이들을 학살했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효수당한 동학 농민군 해골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한일 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본격화됐고,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자료가 일본에서 다수 발견됐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군이 학살한 동학 농민은 3만∼5만명에 이른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인(약 2만명)이나 중국인 사망자(약 3만명)보다 많은 조선인들이 숨진 것이다.

한일 학자들이 약 120년 전의 동학농민운동 사료를 발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청일전쟁은 청나라가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자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등의 일본의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박 교수는 "현재 일본에는 '메이지(明治) 시대의 근대화는 좋은 것이었지만, 쇼와(昭和) 시대인 1930년대부터 군국주의로 치달았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며 "실제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근대화도 주변국 침략·학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

내년에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한 자료를 모아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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