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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대 대통령 선거를 8일 앞둔 지난해 12월 11일. 국정원 여직원의 온라인 여론조작 의혹이 민주당에 의해 제기됐다.
민주당 당직자들이 국정원 여직원의 오피스텔을 급습했고, 국정원 여직원은 문을 잠근 채 40시간을 버텼다. 새누리당과 보수진영에서는 민주당이 국정원 여직원을 감금시켰다고 역공을 취했다.
국정원 여직원의 여론조작 의혹 사건은 그 달 12일과 16일 열린 2,3차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주요 쟁점이 됐다.
경찰은 이례적으로 3차 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밤 11시에 악성 댓글을 달았다는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토론회를 잘 하지 못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튿날인 17일 보수신문들은 경찰의 발표를 근거로 ''국정원 여직원 감금''과 ''댓글 의혹 무혐의''를 크게 보도했는데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A일보는 ''40시간 국정원 여직원 사실상 감금하며 제기한 의혹…허위로''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를 실었다.
B일보는 1면 머릿기사로 ''국정원 직원 컴퓨터에 문재인 비방 댓글 없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난 14일 검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는 경찰이 한밤 중에 내놓은 결과와는 정반대였다.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공무원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및 국정원법(정치관여 금지)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해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고 선거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대선 직전에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실이 드러났거나, 경찰이 내부 조사 결과와 정반대의 허위 발표만 하지 않았어도 대선 결과가 그대로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가정을 전제로 정반대의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부질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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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 ''국정원 정치개입''에 대한 입장표명 필요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원 정치개입과 선거개입에 대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선거개입 의혹이 국정원 여직원 감금공방으로 변질되고, 경찰의 거짓발표로 이득을 본 쪽이 박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얼마나 사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당시 발언과 검찰 수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의혹이 제기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1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저를 흠집내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터무니 없는 모략"이라고 말했다.
16일 3차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는 "민주당에서 성폭행범이나 하는 듯한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에 대해 특별한 입장이나 국정원 개혁에 대한 의지를 따로 밝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16일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끝난 만큼 청와대의 입장 표명이 필요하지 않냐''는 질문에 "새정부는 사정기관이나 언론기관의 독립이나 공정성, 중립에 있어서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신있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따로 입장 발표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재판과정에서 공방을 지켜보면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지 않겠나"며 검찰의 수사 결과와 법원의 판단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살짝 내비쳤다.
정치권의 입장은 갈린다. 여당은 입장 표명이 어렵다는 것인 반면, 야당은 대통령은 물론 국정원장도 입장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순간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쿨하게 얘기하고 싶어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하지만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는 "국정원을 순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게 좋다"며 "그러면 대통령 지지율도 더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남재준 국정원장과 관련해서도 "강단과 소신이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정치에 관여했던 인사를 정리하고 고유의 업무에 충실하겠다는 자정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