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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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

'소녀상', 그러니까 전 5년 전쯤 일본대사관 옆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1000번째 수요집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겁니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수요집회 2000회가 되는 날에도 3000회가 되는 날에도 저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저는 앳된 얼굴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입니다. 귀 아래에 거칠게 머리를 뜯긴 흔적이 있고요. 두 주먹은 굳게 움켜쥐었습니다. 맨발이지만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습니다. 왼쪽 어깨에는 작은 새가 앉아 있고 제 등 뒤로는 구부정하게 허리가 굽은 할머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노컷뉴스 자료사진. (사진 = 박종민 기자)

 


1910년 소녀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강탈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말,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일본은 전쟁중인 군인의 사기를 올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위안소'라는 공창을 운영했습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위안소가 필요했습니다. 일본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소녀를 위안소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소녀를 '도라지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녀는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칸막이 방에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습니다.

소녀가 아프거나 병이 걸리면 몸에 약물을 투입했습니다. 소녀의 몸을 망가뜨리는 수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심한 경우, 소녀의 생명도 앗아갔습니다. 하루 24시간 감시하는 일본군 때문에 도망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반항에는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가녀린 소녀의 몸은 상처, 주사 자국, 수술 자국 등 흉터로 가득했습니다.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군이 1945년 8월 항복을 할 때까지 소녀는 전쟁터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사진 = 황진환 기자)

 


패전 이후 소녀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위안부'란 주홍글씨 때문에 말할 곳조차 없었습니다. 일본 뿐 아니라 조국도 '위안부' 문제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몇 해 뒤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상처는 전쟁 속에 고스란히 묻혔습니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반대한 한일협정의 핵심은 일본으로부터 금적 지원, 저금리 차관 혜택을 받음과 동시에 일제강점기 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노컷뉴스 자료사진.

 


1991년 8월 14일 서울의 한국여성단체연합사무실. 할머니가 된 한 '소녀'는 용기를 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밝히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 털어 놓기로 했습니다.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 주세요"

김 할머니의 증언이 나오자 수십 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는 할머니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첫 수요시위가 열렸습니다. 숨어 지냈던 할머니들은 집회에 참석해 진실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너너할 것 없이 사람들은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습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사과했습니다. 1994년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까지 사과했습니다. 이뿐이었습니다.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노컷뉴스 자료사진)

 


대신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해 민간차원에서 보상 문제를 추진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뒷짐지고 있었고 결국 "돈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할머니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를 냈던 이유는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책임이었습니다. 김 할머니는 1997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건강은 점차 악화됐습니다. 꼿꼿하던 허리는 구부정하게 변했고 집안 곳곳에는 약으로 가득했습니다.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이 문제는 영원히 역사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시간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2011년 11월 14일 수요일. 1992년부터 시작된 정기수요시위가 1000회를 맞았습니다. 이미 2002년 3월 13일에는 최장 기간 단일 집회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겨울의 찬바람도, 여름의 뙤약볕도 수요시위를 막진 못했습니다.

1000번째 수요집회 날, 정오가 되자 사람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였습니다.

그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소녀상, 제가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점입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이 곳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2011년 12월 14일 천 번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우다"

2016년 9월 28일 오늘은 1250차 정기 수요시위의 날입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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