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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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봄.

어린아이가 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기침 증상이었다. 이내 구토와 고열,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폐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증상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그해 봄, 비슷한 증세로 아이 7명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추가 환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났다.

봄이 되자 또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의사들은 당황했다. 분명 문제가 있어보였다. 의사들은 질병관리본부에 문의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여름이 되자 환자는 다시 종적을 감췄다.

2011년 봄 서울의 한 대학병원.

한 산모가 응급실로 들어섰다. 폐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산모가 응급실에 있는 상태였다. 원인도 병명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인불명 폐렴'이라고 부를 뿐.

5월이 되자 산모 중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4명의 산모가 세상을 떠났다.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대학병원 측은 질병관리본부에 다시 문의했다. 뒤늦게 보건 당국은 역학조사를 시작했다.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가습기살균제대책특위에서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발언을 하고 있는 양승조 특위 위원장의 바라보고 있다. (사진 = 윤창원 기자)

 


2011년 8월. 질병관리본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 모를 폐손상의 위험요인으로 추정됨'

피해자들은 황당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질병관리본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4년 출시된 가습기 살균제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었다. 주택에서 아파트로 주거 환경이 바뀌면서 가습기를 이용하는 가구도 증가했다. 씻기 번거로운 가습기에 액체만 넣으면 되는 살균제는 혁신과도 같았다.

질병관리본부의 발표가 있자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던 회사들이 생산 중단을 선언했다. 가습기 살균제 매출 1위인 옥시와 2위인 애경이었다.

한국소비자원도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추가 사망자도 나왔다.

한 해가 지났다.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피해자들은 정부 부처에 항의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 문의하면 산업부 소관으로, 산업부에 문의하면 환경부 소관으로 책임을 돌렸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 어느 정부부처도 책임지지 않았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개별 소송뿐이었다. 피해자들은 의학적 지식도 법률적 지식도 없었다. 제시할 증거라고는 가족이 죽거나 아프다는 사실 뿐. 모든 입증 책임은 온전히 피해자 몫이었다.

옥시 측도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바이러스, 황사. 꽃가루, 담배 등 제3의 위험 유발 요인이 있을 수 있기에 사망 원인은 재판을 통해 법적으로 밝히겠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유일한 처벌은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3곳에 부과한 과징금 5,200만 원이 전부였다. 잘못된 광고의 시정명령 차원이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모임이 파악한 피해자 규모는 174건을 넘어 섰다. 이중 사망은 52건에 달했다. 대부분 옥시 제품을 사용하다 사망한 것이었다.

피해자는 있는데 정부도, 가습기 살균제 제조 업체도, 판매 업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책임자를 찾는 수사도 진행되지 않았다.

보건당국은 2012년 11월이 돼서야 뒤늦게 가습기 살균제 전수조사에 나섰다.

또 시간이 흘러갔다.

2014년 3월.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가습기 살균제가 폐손상 사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사례 361건 중 127건은 인과 관계가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정부는 피해자는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구체적인 방법도 금액도 없었다.

애경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 피해 어린이 박나원양 가족이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 = 황진환기자)

 



또 한 해가 지났다.

2015년 10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기소중지하고 있던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검사는 단 1명.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뒤였다.

그사이 옥시는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조직을 변경했다. 유한회사는 외부감사 및 공시 의무에서 자유롭기에 훨씬 더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옥시 측은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해가 없다는 취지의 연구 자료도 준비했다.

옥시를 제외한 다른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는 옥시 뒤에 숨어 지켜만 보고 있었다.

또 한 해가 지났다.

2016년 1월. 검찰이 수사팀에 인원을 추가했다. 검사 1명이 지휘하던 사건에서 부부장, 평검사 등이 추가로 합류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은 전담팀 체제로 전환됐다.

검찰은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압수수색으로 옥시와 홈플러스, 롯데마트를 계속 압박해갔다.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옥시는 관련 자료들을 폐기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11년 치 자료였다.

2016년 4월. 검찰은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최종적으로 결론 내고 검찰총장에 보고했다.

그러자 다음날 갑자기 옥시가 보도자료를 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좀 더 일찍 소통하지 못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발생 5년 동안 아무 말도 않던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옥시가 갑자기 사과한 것이었다.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50억 원을 더 출연하겠다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옥시가 사과하자 그동안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던 홈플러스도 사과했다. 뒤이어 롯데마트도 사과했다.

지금까지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발뺌하던 업체들이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에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검찰 조사 결과 새로운 정확도 속속 드러났다.

소비자들 가습기 살균제 사요 초기부터 '호흡 곤란', '가슴 통증' 등을 호소하며 옥시에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옥시는 이를 무시했다. 2001년 4월 레킷벤키저가 옥시를 인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옥시 측이 검찰에 제시한 서울대, 호서대 연구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은 분노했다. 전국에서는 옥시 제품 구매 거부 운동이 벌어졌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인 한국의 옥시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영국 레킷벤키저가 사과하고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영국 레킷벤키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위가 가동돼 청문회까지 했지만 옥시의 핵심 증인은 대거 불참했다. 청문회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아타 샤프달 옥시 코리아 현 대표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사진 = 윤창원기자)

 


2016년 9월.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서 권고안이 발표됐다. 영국 레킷벤키저 본사가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기억하도록 중요한 장소에 영구적 기념물을 세울 것도 함께 제안했다. 국제사회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참사를 큰 문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2016년 9월까지 조사한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는 총 919명.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 숫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정한 판정 기준 때문이다.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는 정부 판정 기준으로 따지면 이중 일부만 피해자로 인정한다. 특히 폐 이외의 장기에 영향을 미친 경우, 기존 질환 악화된 피해자는 대상에 없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 없이 또 한 해가 지나간다.

피해자들은 말한다.

"아무것도 책임 지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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