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공무원시험 "시험 부정 막기 위해 블라인드 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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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9-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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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 부정을 막으려고 시험지의 인적사항을 가리고 제출된 답안은 필적을 알 수 없게 시험관이 붉은 먹물로 다시 옮겨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험장에 들어갈 때 신원 확인은 물론 몸수색까지 철저히 이뤄졌다. 시험지도 특수 제작하고 확인 도장이 찍힌 답안지만 유효하다고 인정했다.

조선시대 이뤄졌던 과거(科擧)시험 부정 방지책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부정 채용과 행정고시 특채 확대 방침을 놓고 논란이 일면서 최근 출간된 ''옛 그림 속 양반의 한평생''(허인욱 저)이 관심을 끌고 있다.

내용 중에도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은 과거시험 부정 방지책.

먼저 시험장소를 두세 곳으로 나누는 분소법(分所法)을 적용했다. 응시자인 거자(擧子)와 시험관 사이에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면 그 장소에서 시험을 치를 수 없게 했다. 아버지와 아들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용재총화의 기록을 보면 시험 당일 새벽 응시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한 명씩 이름을 불러 시험장에 들여보냈다. 이 때 수협관(搜挾官)이 봇짐과 상자, 옷깃까지 조사하는데 문서를 갖고 있다 잡히면 곧바로 결박되고 응시자격이 박탈된다. 시험장 밖에서 적발되면 3년, 안에서 들키면 6년 동안 시험을 볼 수 없다.

수험생들은 시험 열흘 전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내야 했다. 사조단자는 응시자 본인,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관직과 성명, 본관, 거주지 등을 기록한 것이며 보단자는 6품 이상의 조관이 서명날인한 신원보증서였다. 사조(四祖) 가운데 경국대전이 규정한 결격사유가 없어야 응시가 가능했다.

중종실록은 "과거를 볼 때는 반드시 내외 사조와 당사자에게 흠이 있는지 고찰해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것이 관례다"라고 적고 있다.

응시자들은 시험지 윗부분이나 끝에 본인의 관직, 이름, 나이, 본관, 거주지 그리고 사조(四祖)의 이름, 본관을 쓰고 관원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종이를 붙이거나 원통처럼 말아올리는 피봉(皮封)을 해야 했다.

시험관이 유생들의 답안지에 확인 도장을 찍었고 시험이 끝나면 도장이 찍힌 답안지만 제출토록 해 사후 부정의 소지를 없앴다. 답안지를 거두는 수권관은 등록관에게 넘겨 수험생의 필적을 알 수 없도록 붉은 먹물로 옮겨 쓰도록 했다.

채점관이 세력 있는 집안 자제의 점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보거나 신분을 알 수 없도록 해 시험에 공정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또 명지(名紙)라 불리는 시험지는 다듬잇돌에 반듯하게 다듬은 종이를 사용함으로써 응시자가 개인적으로 창호지 등에 작성함으로써 채점 부정이 생기는 일을 막았다.

반면 생원시, 진사시 같은 소과의 경우 응시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웃으며 시험을 치렀고 진행요원들도 감독엔 관심이 없고 수다를 떠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고 한다.

한편, 요즘 학생들이 ''족집게 과외''를 하듯 조선시대에도 선후배, 동료끼리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한 달 정도 사찰 등에서 함께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이 책은 과거시험을 비롯해 출생, 성장, 결혼, 관직생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양반의 한평생을 진귀한 그림 자료와 흥미로운 글을 이용해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했다.

돌베개. 280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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