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로 1000만 관객 고지에 다다른 화제작 '변호인'(감독 양우석)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을까.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봤다"고들 말한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극중 1980년대 인물들의 처지가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됐다는 말로도 옮길 수 있으리라.
돈을 좇던 한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우리에게 "개인은 물론 사회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삶의 자세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소통' '공감' '상식' '우리' '정의'라는 키워드로 집약되는 영화 변호인의 힘이 203040세대에게 각각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아봤다.
■ "취업취업취업 돈돈돈…우리는 안녕하지 못합니다"부산에 사는 취업준비생 장수현(가명·27) 씨는 영화 변호인에서 부조리한 국가권력의 희생양이 된 또래 대학생 진우(임시완)에게 감정 이입이 됐었다고 했다.
장 씨는 "그 청년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 자체가 슬펐고, 고등학교 때 현대사를 배우면서 글, 사진으로만 봤던 시대상과 당시 지성인들의 대처법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어 인상 깊었다"며 "요새 중앙대 청소노동자 대자보 사건 같은 걸 보면 사람들의 말할 권리를 아예 막아 버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데 '자유를 빼앗기는 건 아닌가' '내 앞길도 막막해지는 건가'라는 걱정이 든다"고 했다.
도시계획을 전공한 장 씨는 관련 공기업으로의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전공 특성상 직업 폭이 넓지 않은데다, 아르바이트와 인턴으로 두 차례 그곳에서 일한 경험을 살리고 싶은 까닭이다.
집에서 절반은 도와 준다지만 2000만 원에 달하는 학자금도 갚아야 하는 그에게 일자리는 간절하다.
장 씨는 "최근 쌍용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취업문이 더욱 좁아지는 상황에서 사회 문제에 더욱 귀기울이게 된다"며 "인턴으로 일할 때 법정 관리에 들어가는 건설사 밑에 딸린 원도급·하도급 업체들, 일용직 아저씨들이 몰려와 '돈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봤던 적도 있고 해서 남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개천에서 용은 절대 안 난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을 여러 차례 인용한 장 씨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장 씨는 "기업에서 80명을 뽑는다고 치면 그 중 10명은 인맥으로 이미 정해져 있고 나머지 인원에서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경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동기 중 한 명이 '나는 대기업 건설사에 줄이 있어 어느 정도 스펙만 쌓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봤고, 고등학교 때 교사를 뽑는데 공개 수업을 잘해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던 선생님이 아니라 별로였던 사람이 됐던 걸 떠올리면 제 앞길도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16일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게시판과 담벼락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응답하는 대자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이어 "영화 변호인 속 예전 대학생들은 사회 전반에 대한 관심이 크고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던 듯한데, 저를 포함한 지금의 대학생들은 취업에 눈이 맞춰져 '내가 살고 봐야지'라는 생각을 한다"며 "지성인이라기 보다는 '취업 취업 취업' '돈 돈 돈'에 쫓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 "청년 스스로 조금씩 세상 바꿀 수 있다는 것 깨달아"또래인 까닭일까. 정 씨와 마찬가지로 한지혜(30) 청년유니온 위원장도 변호인을 보면서 "고문 당하고 거짓 자백을 강요받던 대학생이 구치소 접견실에서 엄마와 만나는 장면에서 울컥했다"며 "시대는 다르지만 대학 생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억울한 그 학생의 모습에 감정 이입이 됐던 것 같다"고 전했다.
한 위원장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헌정 영화냐, 아니냐'라는 논란이 이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권력과 한 사람의 변화하는 모습이 두드러져 보였다"며 "주변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극중 대학생들의 억울함, 주인공인 변호사가 그 학생들의 편에서 진실을 알리려 애쓰는 모습을 많이들 이야기한다"고 했다.
청년유니온은 청년 세대가 스펙 쌓기를 강요 당하고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현실에서 만들어진 노동조합이다.
부당해고와 같은 부조리가 벌어져도 어느 누구 책임지겠다고 나서지 않는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등 청년 노동 현장이 청년유니온의 가장 큰 관심사다.
최근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고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미용실 스태프들의 실상을 고발해 고용노동부의 특별관리 조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 위원장은 "안정된 일자리가 많지 않은데다 경쟁도 치열하다보니 현장의 청년들이 해고에 대한 두려움과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번거로움 탓에 문제가 있어도 선뜻 용기를 내 말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청년유니온이 교섭권을 갖고 지자체나 사업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들 단체가 청년 노동 실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라고 전했다.
한 위원장은 다음달 초면 2년간의 위원장 임기를 모두 마친다.
그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청년 당사자로 있다가 청년유니온 위원장을 하면서 2년간 안정을 가졌고, 이제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청년으로 돌아가게 된다"며 "지난 20대를 돌아보면 대학 생활 자체는 좋았지만, 무리해서 대학을 가 학자금 대출을 받고,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지 못한 채 졸업해서 학자금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 온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한 위원장은 임기를 마치면 직업상담사가 돼 후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루라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각오다.
한 위원장은 "청년유니온에서 활동하면서 청년 스스로 작지만 조금씩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러한 작은 희망 하나 하나가 모여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영화 변호인도 그 작은 희망 가운데 하나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 "민주화라는 이름의 산 마저 넘어야 한다는 공감대"이창희(45) 서울지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사무국장은 영화 변호인의 인상적인 장면으로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이 지붕에서 소란을 떠는 쥐들을 향해 생선을 던지고 "야옹 야옹" 고양이 흉내를 내는 신을 꼽았다.
이 사무국장은 "주인공이 봉투에 구겨진 돈뭉치를 다소 천박하게 담아 올 때 경제적인 것에 매몰돼 사는 우리 모습이 떠올랐고, 지붕의 쥐들에 화가 나 생선을 던지고 고양이 흉내를 낼 때는 열악한 현실을 따뜻한 낭만으로 극복하려는 소시민의 삶이 보였다"고 했다.
서울역 앞에서 분신한 고(故) 이남종(40) 씨를 추모하는 촛불문화제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열린 가운데, 한 어린이가 촛불을 밝히고 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이 사무국장은 현재 북한학 박사로서 북한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강단에 서고 있다.
88학번으로 대학 총학생회장을 지낸 그는 "변호인에서 고문받는 대학생을 보면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주인공이 우리를 변호해 주려는 사람으로 느껴더라"며 "극중 상황처럼 현실에서도 개인들이 무시되고, 그 개인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는 데 공감하는 상황에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동문회는 1987년 군부독재에 대항해 일어난 6월항쟁 이후 각 대학별로 만들어졌고, 1991년 60여 개 대학이 모여 전국 단위로 꾸려졌다.
이 사무국장은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가 나름 민주화를 이뤘다고 판단들을 해 민주동문회 활동이 뜸해졌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민주주의가 적잖게 후퇴를 했고 위기가 왔다는 데 회원들이 공감해 다시 행동에 나서게 됐다"고 했다.
11일에는 전국 대학 민주동문회 40여 곳이 동참해 박근혜정부를 규탄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했고, 당시 열린 전국 22개 민주동문회 회장단 연석회의에서는 전국대학민주동문협의회 복원이 결정됐다.
이 사무국장은 "전국대학민주동문협의회는 지침을 하달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기억을 일깨우고 자극을 주는 소통의 공간인데, 민주주의를 악화시키는 힘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때 그것을 막고자 현실에 맞는 다양한 실천을 벌이게 될 것"이라며 "우선 온라인을 통해 소통망을 활성화시키고 올해 5·18민주화항쟁 때 공동참배를 기점으로 움직임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섯 살배기 딸을 키우는 이 사무국장은 후배이자 자식 같은 20, 30대 청년 세대에게 미안함이 있다고 했다.
그는 "강의를 하다 보면 학생들이 웃고 떠드는 역동성은 있지만, 아르바이트 등에 치여 낭만 없이 우리 때보다 힘들게 산다는 것을 느낀다"며 "우리 세대가 생물학적인 주류가 된 현실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벗고 예전에 가졌던 뜻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