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은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대선 결과 박근혜정부가 출범했지만 우리사회는 민주헌정이 자리를 잡은 1988년 이래 유례없는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 요즘 대학가에 유행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답답한 현실을 반영하는 한 단면이다. CBS는 대선 1주년을 맞아 아직도 대선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짚어 보고 대안을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파면 덮고…정보기관에 만신창이 된 대한민국의 1년
②고착된 이념 논쟁, 멀어진 국민통합
③대선 최대 이슈 경제민주화, 복지…빛좋은 개살구였나?④박근혜 스타~일, 유신회귀? 창조리더십?
◈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셨습니다. 그 꿈이 결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의원, 2009년 10월26일 부친 서거 30주기 추도식)
시정연설하는 박근혜 대통령. (송은석 기자/자료사진)
최근 대형선거의 최대 이슈는 단연 '복지'와 '경제민주화'였다. 중증질환에 시달리는 환자, 호구지책을 걱정해야 하는 노인, 등록금 부담에 시달리는 대학생과 학부모, 대기업의 압박에 고충을 겪는 골목상권까지 모든 유권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화두가 이것이었다.
민주당은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무상급식) 이슈를 선점해 두 선거를 이겼다. 하지만 그 다음의 총선과 대선에서는 기초연금 등 복지 이슈를 선점한 새누리당에 졌다. 새누리당은 뿐만 아니라 '야당이나 낼 만한' 경제민주화 이슈까지도 주도하면서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이명박 정권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를 탈피한 이런 '획기적' 선거전략은, 기존 '성장 대 복지'에서 '복지 대 복지'로 선거판을 교란시켜 야당의 차별성을 무력화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의 승리에는 스스로 구축한 '신뢰의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다. 유권자들은 2010년 6월29일 국회 본회의 때 "미래로 나아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그게 깨진다면 끝없는 분열이 반복된다"며 그가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킨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는 발언도 했다. 그래서 유권자는 그의 공약을 신뢰했고, 표를 던졌다.
그런 '박근혜표 복지', '박근혜표 신뢰 정치'가 대선 뒤 1년 동안에 차근차근 무너져 내렸다.
4대 중증질환(암·심장질환·뇌혈관질환·희귀난치성질환) 진료비를 전액 국가가 부담하겠다는 공약은 인수위 시절부터 손질당했다.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특진비)·간병비 등 '핵심적'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 보장에서 배제된 것이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할 것이라던 공약은 지난 9월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만 10만~20만원 차등지급하는 쪽으로 대폭 수정됐다. 박 대통령 스스로 "신뢰해주신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겨서 죄송"하다고 이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2014년까지 대학 등록금을 실질적 반값으로 만들겠다던 공약, 고교 무상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해 2017년까지 전면 무상을 실현하겠다던 공약도 내년 예산안에서 예산을 적게 배정하거나 아예 배정하지 않는 식으로 퇴보했다.
◈ "공약을 발표할 때 재원조달 방안을 함께 검토를 해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은 아예 뺐어요". (박근혜 후보, 2012년 12월10일 2차 대선 TV토론)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하는 박근혜 대통령. (황진환 기자/자료사진)
'박근혜표 경제민주화'도 더디다. 박 대통령은 공약집에 경제적 약자의 권익 보호(가맹점 불공정행위 금지 등), 공정거래 관련법의 집행체계 개선(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 등), 대기업집단 총수일가의 불법 및 사익편취행위 근절(일감 몰아주기 금지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순환출자 금지, 집중투표제 도입 등), 금산분리 강화(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 축소 등) 등 5개항을 포괄적으로 적시했다.
이들 공약 중 현재까지 입법이 완료된 것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 공정위 전속고발권 요건 완화 등 소수에 그친다. 경제민주화 입법을 맡아온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에 따르면 경실모가 발의한 21개 법안 중 18개 법안이 직·간접적으로 대선공약에 반영됐으나 현재까지 고작 9개 법안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런 상황은 박 대통령이 대선 전 "경제민주화에서 대기업 개혁은 아주 중요한 부분"(2차 대선 TV토론회)이라고 했다가 집권 뒤 "대기업이란 이유로 벌주는 식의 때리기로 가서는 안된다"(지난 4월17일 여당 의원단 오찬)고 입장 선회의 '신호'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전후해 당 내부나 재계에서 경제민주화 경계론이 빗발쳤고, '속도조절' 양상이 나타났다.
'경제 상황이 어렵고, 경기회복세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는 게 정부·여당의 해명이다. 어쨌거나 지난해 2차 대선 TV토론회 때 "재원조달 방안 검토 결과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은 아예 (발표에서) 뺐다"던 박 대통령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됐다.
지난 1년간 야당은 '공약 후퇴 비판'을 반복하느라 바빴지만, 새누리당 내부도 적잖게 들끓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 수정안이 마련된 시점에 돌연 사퇴하면서 공약 불이행 문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을 낳았다. 의원총회 때도 '공약대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반값 등록금 공약 문제에는 소장파 김상민 의원이 나서서 "대선불복 선언에 연연할 게 아니라, 국민들께 약속한 걸 이루지 못할까 전전긍긍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경제민주화 문제를 놓고는 이혜훈 최고위원, 남경필 의원 등 개혁파가 지도부의 속도조절론에 맞서 수시로 설전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결국 경제민주화의 토대를 다진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이 탈당을 예고하고 나서는 등 대세가 꺾인 양상이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야당 비판을 정쟁으로 치부하면서, 정치권에서 복지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지지 못했다. 공교롭게 기초연금 공약의 후퇴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NLL 대화록 국가기록원 미이관' 수사발표가 나오는 등 고비마다 새 국면으로 전환이 이뤄지기도 했다.
'대선불복 논란을 접고 이제는 민생에 몰두하자'는 게 새누리당의 대야 기조다. 박 대통령 역시 정기국회 시정연설을 "지난 일에 묶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협력하자"고 맺었다.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자'는 자세로는 문제의 해결이나 갈등의 해소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은 "국가기관의 정치개입은 언제든 재발될 수 있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이고, 복지공약의 이행 역시 그것을 믿고 표를 던진 유권자들에게는 당장의 현실적 문제"라며 "과거에 집작하는 것은 오히려 이전 정권의 남북관계를 공격하거나 공안통치를 강화하는 정부·여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이처럼 노골적으로 공약을 파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안하는 정부·여당에 민심이반이 크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지금이라도 이행할 수 있는 공약은 약속대로 실천해야 한다. 재정이 문제라면 당연히 증세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CBS노컷뉴스 장관순 기자메일